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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15일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감옥에서 숨졌다는 건 그냥 실수라고 치자. 대통령이 잘 몰랐을 수도 있지만 몇 차례 데스킹을 거쳤을 텐데 보좌진들 중에 아무도 이런 실수를 바로잡지 못했다는 게 더 심각하다. 


“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는 첫 문장부터 박 대통령의 참담한 역사 인식을 드러냈다. 1945년 8월16일 광복을 맞았으니 71주년인 건 맞다. 그러나 건국 68주년이라는 건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부르는 보수 진영 일부의 주장일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돼 있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1919년에 건립됐다는 의미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설립된 4월13일과 임시정부가 통합된 9월11일을 지지하는 견해가 엇갈리지만 대한민국의 기원이 1919년이라는 건 국민 대부분이 공유하는 상식이다. 굳이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고집하는 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임시정부가 정부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으나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를 국가가 없었던 시대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해방 이후에도 정부 수립까지 3년 동안 대한민국은 국가의 실체가 없었단 말인가? 게다가 1948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면 한국은 100년도 안 되는 신생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별도로 건국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역시 분단된 국가가 아니라 애초에 대한민국과 무관한 나라가 된다. 



건국절 논란이 시작된 건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부터다. 정부수립 60주년이 건국 60주년으로 포장됐고 당시 한나라당에서 국경일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으나 역사 왜곡 논란에 부딪혀 무산됐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48년 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싶은 세력들의 평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연설 이틀 전인 13일 청와대에서 독립유공자와 가족들을 초청해 열린 오찬에서 김영관옹의 발언도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오마이뉴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의 올해 아흔두 살의 김옹은 대통령의 면전에서 마이크를 잡고 “(건국절 주장은)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면서 김옹은 또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탄생했음은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이라면서 “왜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독립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국란 시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외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특별히 대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연설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이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다는 사실이다. “과거”라는 단어는 단 한 번 썼지만 “미래”라는 단어는 10번이나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언급도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한·일 관계도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뭉개고 지나갔을 뿐이다. 


오히려 이날 박 대통령의 연설은 뜬금없는 ‘국뽕’ 발언으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는 대목은 ‘헬조선’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며 “이제 다시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도전과 진취, 긍정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함께 가는’ 공동체 의식으로 함께 노력하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부의 분열과 반목에서 벗어나 배려와 포용으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키워나가고, 모두가 스스로 가진 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어려운 시기에 콩 한쪽도 서로 나누며 이겨내는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간다면, 한 차원 높은 도약을 이뤄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누며 이겨내라는 말은 며칠 전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를 청와대에 불러서 송로버섯과 캐비어를 곁들인 초호화 만찬을 즐겼다는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한국어과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그녀의 부왕께서는 ‘유언비어’를 다스리려 했는데 그녀는 이 거룩한 국정 이념을 이어받아서 인제 신조어까지 다스릴 생각”이라면서 “젊은이들에게 ‘이 신조어를 쓰지 말라’ 훈화 두시는 게 너무나 창조적이라서 참기가 힘들 정도”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요즘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 건립됐으므로 그날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역사적, 반헌법적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헌 헌법도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되고 제헌 헌법으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밝혔다”면서 “우리가 한반도 유일의 정통성 있는 정부임을 자부할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우회적으로 박 대통령의 연설을 비판했다. 


김홍걸 더민주 국민통합위원장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북한 얘기는 많이 해도 일본에 대해서는 말을 못하는군요.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러는 거겠죠. 가장 심한 것은 부자들의 기득권을 열심히 지켜주는 분이 대체 누구에게 ‘기득권에 연연하지 말라’고 한 대목이죠. 그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한편 이날 박 대통령의 연설과 관련, 일본 언론의 반응도 눈길을 끈다. 


아사히 신문은 이날 “박 대통령은 매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일본 측에 조기 해결을 촉구해 왔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언급을 피했다”고 보도했다. 


박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박근혜 정부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연설에서 어떻게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메시지를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의 해방 71주년 및 건국 97주년 연설은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첫째, 건국절은 광복절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일부 보수 진영의 주장이다. 기본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둘째, 광복절 아침에 위안부는 언급도 없고 사드만 강조했다. 북한을 비판하면서 정작 일본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건가? 

셋째, 과거는 묻지 않고 미래만 강조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넷째, ‘할 수 있다’는 정신이면 헬조선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대통령 때문에 국민들은 절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콩 한 쪽도 나누면서 이겨내라고? 

다섯째,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의거를 일으켰지만 체포된 뒤 뤼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 연설에서 해서는 안 될 실수였다. 


이정환 미디어 오늘 편집국장 /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위원 (2016. 8. 15.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