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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바꿀 특종, 머뭇거리다 뺏겼다


대통령을 바꿀 특종, 머뭇거리다 뺏겼다


NBC가 ‘발굴’한 트럼프 음담패설 동영상, 5일 동안 뭉개다 낙종... WP는 익명 제보 5시간 만에 기사화


미국 대통령 선거의 판도를 바꿀 워싱턴포스트의 특종 기사는 NBC가 취재를  끝내놓고 방송에 내보내지 못한 아이템이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현지 시간으로 지난 7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11년 전 막말이 담긴 비디오 파일을 공개했다. 


트럼프가 2005년 10월 NBC의 예능 프로그램 ‘액세스 헐리우드’의 촬영 도중 버스를 타고 스튜디오로 이동하면서 진행자 빌리 부시와 나눴던 대화 내용이 유출된 것. 트럼프와 부시는 둘 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었고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돼 파일로 남아있었다. 


이 파일에는 “그녀와 XX하려 했는데 실패했다”거나 “XX를 움켜쥐고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등의 대화가 담겨 있다.

 

이 동영상이 공개된 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가 성명을 발표하고 “남편과 아버지로서 트럼프의 발언과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면서 “나는 그의 발언을 용납하거나 방어할 수 없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벌써부터 선거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난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트럼프가 죽거나 스스로 사퇴하지 않는 이상 후보 교체는 불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동영상이 사실 NBC가 촬영한 것이고 방송용이 아니라 짜투리 필름에 지나지 않지만 NBC의 자료 영상이라는 사실이다. WP의 보도는 엄밀히 따지면 저작권법 위반 소지도 있다.  


더욱 흥미로운 건 NBC가 이 동영상을 ‘발굴’하고 기사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기사 작성까지 거의 다 끝내놓고도 방송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KBS나 MBC의 미공개 필름이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에 빠져나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WP가 취재 후기 형태로 보도한 8일자 기사에는 NBC가 왜 보도를 머뭇거렸는지 자세한 정황이 담겨 있다. 


NBC가 처음 이 영상을 발견한 건 지난주 월요일이었다. ‘액세스 헐리우드’의 PD가 과거 자료를 뒤지던 도중 우연히 이 영상을 발견했고 보도국에 넘겼다. 다음날 보도국은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취재를 시작했다. PD의 기여도를 감안해 뉴스 프로그램 이전에 파일을 넘긴 ‘액세스 헐리우드’에서 먼저 내보내기로 합의된 상태였다. 


출처도 명확했고 발언의 주인공이 트럼프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발언이 녹음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화면 싱크 등을 볼 때 조작 가능성도 없었다.  그런데도 NBC 경영진은 법률 검토를 먼저 해야 한다는 이유로 방송을 차일피일 미뤘다. 금요일 아침 무렵에는 기사가 거의 완성됐는데도 방송 일정이 잡히지 않았고 ‘액세스 헐리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WP 편집국에 익명의 제보 전화가 걸려온 게 그날 오전 11시였다. 이 제보자는 데이빗 파렌홀드  기자를 지목해 관련 파일을 넘겼고 이 기자는 곧바로 기사를 작성했다. 제보 전화를 받고 기사가 최종 출고되기까지 5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사가 나가기 직전 NBC도 1주일 가까이 묵혀뒀던 기사를 출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실제로 워싱턴포스트 보도 직후 MSNBC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의 보도가 나갔다. ‘액세스 헐리우드’는 그날 저녁에서야 뒤늦게 이 소식을 전했다. 


희대의 특종을 잡아놓고 NBC는 왜 물을 먹었을까.  WP의 후속 취재에 따르면 NBC의 고위 관계자는 “WP의 제보자가 누군지 모른다”면서도 “내부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으나 제보자를 추적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NBC가 몸을 사렸던 건 지난해 트럼프에게 소송을 당한 경험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NBC는 트럼프와 공동으로 미스 USA 선발대회를 개최해 왔는데 트럼프의 이민자 비하 발언 등이 논란이 되자 방송을 취소하고 미스 유니버스 조직위원회의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트럼프는 NBC를 상대로 5억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 


NBC 경영진 입장에서는 추가 소송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디오 파일은 몰래 카메라가 아니고 당연히 사생활 침해도 아니다. 11년 전 사건이긴 하지만 WP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올해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칠 가장 중요한 기사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소송을 두려워해서였든 지나치게 신중해서였든 NBC는 원본을 확보하고도 5일을 뭉갰고 결국 제보를 받아 5시간만에 터뜨린 WP에 특종을 빼앗겼다. 사실 추가 취재할 부분이 많지 않은 사안이기도 했다.  


실제로 트럼프는 WP 보도 직후 사실을 시인하고 “이것은 탈의실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농담이고 오래전에 있었던 사적인 대화”라며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은 골프장에서 내게 훨씬 심한 말도 했고, 나는 거기에 미치지도 못한다”고 해명했다. “누군가 상처받았다면 사과한다”고 밝혔지만 이번 기사의 후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누구나 사적인 자리에서 저속한 농담을 주고 받을 수는 있지만 육성 녹음과 특히 동영상이 갖는 위력은 막강하다. 가뜩이나 기대 수준이 낮았던 트럼프라는 사람의 실체를 드러낸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1년 전 트럼프는 자신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여론이 요동을 치고 있고 공화당 내부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앤 와그너 공화당 하원의원은 “펜스가 바통을 이어받아 힐러리 클린턴을 무찌를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고 공화당 소속 폴 라이언 하원 의장은 “구역질이 난다”고 말했고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도 “혐오스럽고 용납이 안 된다”고 말했다. 대통령도 대통령이지만 당장 자신들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심지어 트럼프의 음담패설 동영상이 더 나올 거라는 전망도 있다. 트럼프는 NBC의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직접 진행을 맡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NBC의 한 관계자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화 도중 쉬는 시간이면 그는 여성 출연자 중 한 명을 지목해 오늘은 ‘당신이 최고다(hot), 난 그 옷이 마음에 든다’ 등의 농담을 건넸다가 다른 남성 출연자에게 ‘저 여자와 자고 싶은가’ 등의 말을 건넸고 다들 웃곤 했다. 스튜디오에는 10대도 넘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는 그런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NBC에서 방영된 ‘디어페런티스’의 PD였던 빌 프루이트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디어페런티스'의 시즌 1&2 프로듀서로 내가 장담하건대, 트럼프 테잎은 훨씬 더 끔찍한 게 터져나올 것이다.” 


NBC가 늦게나마 추가 폭로를 터뜨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번 WP 보도만큼의 충격과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고 만약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면  역사는 당연히 NBC가 아닌 WP가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기록할 것이다. 


이정환 미디어오늘 편집국장 /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위원 (2016. 10. 10.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