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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현장/최신정보

언론의 파행과 민주주의 위기: 언론복합체의 실체와 부작용

* 본 글은 지난 3월 3일 발표된 한국언론정보학회 특멸세미나의 발제문 초록입니다.


언론의 파행과 민주주의 위기: 언론복합체의 실체와 부작용 


학계에서 발제를 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부담도 많다. 평범한 얘기를 나열하는 것 일수도 있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강요한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특히 최근의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 많은 진단이 나왔다는 점,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는 아직 좀 성급하다는 점 등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발제를 하겠다고 맡은 이상 피해갈 수는 없지만 ‘괜히 작두를 탔다’는 생각은 간절하다. 솔직히 말해서, 박근혜 탄핵 사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정확한 진단을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추정을 할 수밖에 없고 이 경우 불가피하게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해결책 제시에 있어 ‘돌팔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일의 시작과 끝을 모두 아는 현자는 없다”는 말에 늘 위로를 받는다. ‘진실’은 발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지적도 기억한다. 나름 지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그럴듯한 ‘담론’ 하나 정도는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의식도 있었다. 지금 제시하는 담론이 농담으로 끝이 날지 아니면 지금을 보다 명확하게 진단하고 나름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필요한 ‘진리 값’을 갖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냥 좀 용감해 보려고 한다.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의 무모한 ‘역주행’ 


좋아하는 시가 있다.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라는 구절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경험했던 것처럼 상황을 어떻게 정의(규정)하는가는 너무도 정치적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위궤양이라고 진단하는 것과 위암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이후 처방은 전혀 달라진다. 


자칫 오진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모두 알지 모르지만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는 ‘시장의 과잉’으로 인한 일시적인 ‘환율위기’로 진단했고 미국과 IMF 등은 ‘한국경제모델’의 ‘구조적 위기’라고 규정했다. 국제사회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고강도 구조개혁(정리해고제, 자본시장 추가개방 및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은 이를 배경으로 가능했다. 돌아보면, 당시에, 한국이나 일본이 옳았지만, 지금 이를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상황에 익숙해졌고,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담론은 상식이 되어 있으며, 이 상식은 일상생활과 규범 및 문화 등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신자유주의 담론이 관통했다는 의미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저널리즘학 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