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언론인 총리 후보자의 낙마를 생각한다
“도대체 낙이 없다.” 엊그제 새벽잠을 설치며 월드컵 TV화면을 지켰다는 한 이웃의 푸념이다. 알제리에게 2대4로 ‘잔혹패’한 한국축구의 얘기가 아니다. 스포츠경기야 이기고 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요즘 들어 더욱 뒤숭숭해지는 세상이야기를 빗댄 심사의 표현이다. 월드컵에나마 마음을 붙이려 했던 기대마저 사라져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일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석 달도 못됐다. 그 비극은 여전히 ‘국민 멘붕’으로 남아 있다. 그런 판에 강원도 전방에서 일어난 총기참사는 다시 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세월호 참사 34일 만에 국민을 향해 눈물을 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개조론을 다짐했다. 그 쇄신의 의미로 박 대통령이 내놓은 게 인사였다. 그러나 그 인사 역시 참사였다. 그리고 그 참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총리후보는 물론 장관 내정자들과 청와대의 수석비서관들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되지 않은 인사가 없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낙마에 이은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대한 논란은 국가개조는커녕 국가위기의 수준이 아닌가하는 느낌마저 준다. 6일 만에 끝난 ‘안대희 자진사퇴’는 상대적으로 격을 갖춘 셈이었다. 보름 만에 막을 내린 ‘문창극 버티기’는 보수세력의 대리전으로 발전,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중앙일보 등 일부 보수언론의 ‘문창극 구하기’는 세월호 보도참사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결국 그도 자진사퇴라는 방법을 통해 물러났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할 전망이다. 문창극 후보자가 중앙일보 주필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다 해도 중앙일보의 태도는 애당초 언론의 본령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문 후보자는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여러 측면에서 자격논란을 빚었다. 일본 군대위안부 문제와 관련,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강의내용이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 칼럼 등은 시발에 불과했다. 그의 극우적 칼럼 내용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언론인 시절 칼럼과 비견되기도 했다. KBS가 온누리교회에서 한 문 후보자의 ‘일본의 식민지배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친일적 강연내용을 특종으로 보도한 이후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이 보도 후 총리실이 이를 반박한다며 그의 강연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했지만 여론악화를 막지 못했다. 여권에서조차 문 후보의 자진사퇴가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나왔던 배경이기도 하다.
중앙일보는 이러한 전개과정에도 불구, 문창극 후보에 대한 KBS와 일부 언론의 ‘악마편집’ 때문에 문 후보의 역사관이 왜곡 보도됐다는 논지를 폈다. 이 신문은 각계 원로·중진인사 등 482명의 성명내용을 인용, “문창극씨가 총리가 되느냐, 못 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KBS라는 공영방송의 왜곡보도에 입각해 우리 사회가 중요한 사안을 잘못 결정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며, KBS의 왜곡보도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사설을 통해서도 KBS가 “한 시간가량의 동영상을 수분으로 짜깁기해 내보냈다. 문 후보자는 총리로 적절치 않다는 주관적 ‘틀 잡기’ 방식을 주로 동원했다. 강연 맥락과 문 후보자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웠다”며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보수일간지들도 보도와 칼럼 등을 통해 문창극 사태의 원인을 KBS에 떠넘겼다. 이에 화답이나 하듯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문 후보자의 강연 발언을 보도한 KBS를 심의하기로 했다는 보도다.
중앙일보의 주장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될 것이다. 이 신문이야말로 문창극 후보자가 지명된 이후 일방적 ‘문창극 감싸기’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 또 청와대의 ‘보도지침’사건으로 길환영 사장이 물러난 이후 새로운 변화기류를 보이고 있는 KBS에 대한 보수세력의 압력으로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악마편집이야말로 이들 보수언론이 애용해온 보도책략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참여정부 초기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수언론의 집단린치형 공격을 들 수 있다.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5·18 행사추진위 간부들을 접견했다. 당시 한총련은 노 대통령의 한미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며 노 대통령의 5·18 행사참여를 방해했다. 전교조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반대투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염두에 둔 듯 접견장에서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 말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강조하는 가운데 나왔다. 그런데 발언 의도는 사라지고 문제발언만 쟁점이 됐다. 이른바 악마편집이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를 1면 머리기사로 뽑아낸 조중동은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노 대통령의 염장을 질렀다.
따지고 보면 ‘문창극 사태’의 원인은 문창극에 있지 않다. 청와대 검증시스템의 문제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이다. 이미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수없이 지적돼온 적폐다. 이번 개각이나 청와대 개편내용은 더욱 참담하다. 차떼기 대선 자금과 북풍사건에 개입한 국정원장, 제자들의 논문과 연구비를 가로챈 의혹을 받고 있는 교육부총리와 오십보백보의 교육문화 수석, 제주 4·3사건을 ‘공산세력의 무장봉기’로 규정한 안전행정부장관, 술을 마시다 기자의 이마를 맥주병으로 내리친 민정 수석, 음주운전에 걸리고도 이를 보도한 방송에 소송을 건 문화부장관 등. 끝이 없을 정도다.
언론인 출신의 문창극 총리후보자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언론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그는 “언론의 생명은 진실 보도”라며 “우리 언론이 진실을 외면한다면 이 나라 민주주의는 희망이 없다”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우회적으로 겨냥했다. 그의 사퇴발표에 안타까움을 표시한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전적으로 동감을 느낄 것이다. 문제는 박근혜 정권에게 언론이란 그의 옷깃에 달린 브로치역할로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제 총리가 되기 위한 언론인은 더욱 멋진 브로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김광원 언론인/ 저널리즘학 연구소 소장 (2014. 6. 24.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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