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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현장/언론네트워크

해방의 힘, 지식


한겨레신문 <전망대에서>를 담당했던 고 정운영 선생은 국제정치경제에 대한 통찰력,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적 자세와 촌철살인의 글 솜씨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강사 시절 지방의 한 대학 강연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계기가 된 사과다. 선악과로 알려진 이 사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은 신과 결별하게 된다. 두 번째는 아이작 뉴턴으로 하여금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사과였다. 인간은 이 사과를 통해 비로소 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 비롯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독재자에 맞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던 윌리엄 텔의 사과였다.

왕과 귀족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던 민중은 이 사과를 계기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된다. 인간해방의 역사적인 순간에 공교롭게도 사과가 있었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 하지만 이 일화는 통치의 수단, 공동선 및 해방의 길잡이라는 지식의 본
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치학적 관점에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노예와 다르지 않다. 창조주의 피조물로서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그가 보기에 좋아야 했고, 그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야 했다. 노예인 아담은 따라서 자신이 왜 노예이며, 왜 자신의 운명이 주인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가를 질문해서는 안 된다. 아담은 또 자기 노동의 대가로 얻어진 성과물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자신의 노동시간이 적당한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철저하게 몰라야’ 한다.

그 대신, 그는 주어진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성과물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 한다. 통치자는 이에 따라 이들 노예들이 ‘게임의 법칙’에 대한 ‘정치적’ 지식 대신 게임을 보다 잘 하기 위한 ‘도구적’ 지식에 집중하도록 위협하거나 달랜다. 
 

 
하나님과 아담의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 ‘패권국과 약소국,’ 및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외형만 바뀐 채 유지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이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개념이 헤게모니(hegemony)나 이데올로기(ideology) 등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왜 가난한 농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복종하는가를 질문했다. 그는 또 왜 고통스런 노동과 자본가의 착취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지 않는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헤게모니 즉 지배계급이 생산하고 유통시킨’ 세계관 (또는 이데올로기)에 피지배계급이 ‘지적, 도덕적’으로 설득당한 데서 찾았다.

부연하면, 이 때 지식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지식인’에 의해 생산되며,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현재의 권력과 분배질서가 ‘자연적’일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믿게’ 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루이 알튀세르가 교회, 학교, 가정 및 라디오와 방송 등을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데 필요한 허위의식을 만들어내고 유포시키는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라고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통치의 수단으로 지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식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본 것이며, 이 경우 지식은 권력질서의 유지 또는 자발적 협력을 위해 동원된 가짜 지식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뉴턴의 사과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지식’으로써 ‘공유’를 통해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약하다. 치타처럼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사자처럼 억센 앞발을 갖고 있지도 않고, 원숭이처럼 재빠르지도 않다. 그래서 인간은 일찍부터 외부환경을 통제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지식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많은 의약품, 과학적 발명품, 자연과학적 지식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식은 서로 공유되었고, 누구도 특허권이나 저작권이라는 이름으로 상업적 이윤을 챙기려고 하거나 국가이익을 위해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의 화약기술이 자연스럽게 중동으로 전파되었고, 아랍 세계의 우수한 자연과학이 또 유럽으로 건너가 르네상스 시대와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통치와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지식에도 숨겨진 이면이 있다. 사람을 죽이는 군사지식과 사람을 살리는 의학지식 중 어디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현대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라리아가 사라지지 않는 반면, 막대한 돈과 인력이 다이어트 약품과 비아그라와 같은 최음제 개발에 투자된 것도 사회적으로 결정되었다.

윤종용 삼성 부회장의 “실용적인 공학과 기술교육만이 나라가 살 길이다”라는 주장이 불편한 것은 이런 이유이며, 정작 필요한 질문은 “어떤 지식을 추구할 것이며, 이 지식의 혜택을 어떻게 나눌 것이며, 나아가 무슨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이다. 
   

 
윌리엄 텔의 사과는 주어진 정치 질서가 ‘자연스럽지’ 않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변화’ 될 수 있으며, 인간이 그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로빈 훗의 정치 개혁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력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안토니오 그람시, 에드워드 사이드, 미셀 푸코, 파울로 프레이리 등은 이러한 혁명이 ‘지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통치의 지식은 이미 만들어진 분배와 권력질서를 ‘정당화’ 시키고, 피지배자들이 자신의 이익보다는 지배자의 이익에 더 충실하도록 설득시킨다고 했다. 해방의 지식은 이에 따라 부당한 질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대안적 질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 가령, 회사의 CEO와 일반 노동자의 임금차이가 400배가 나는 상황이 왜 문제이며, 노동자의 실질 구매력을 높이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전체의 이익이 된다는 주장을 생산하고 유통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푸코와 사이드는 이 작업을 두고 담론을 통한 투쟁이라고 말한다. 해방의 지식은 또 피지배자나 약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이익’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 영역이 무엇인가를 인도하게 된다. 예컨대, 한국이 수출 증가를 통해 달러를 쌓는 것은 한국의 진정한 국가이익에 배치될 수 있다는 것과 국제통화체제의 개혁을 위한 ‘정치적’ 투쟁과 ‘담론’ 경쟁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의 많은 비판 학자들은 공교육 시스템을 국가와 자본가를 위한 이데올로기 도구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교육 기관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며, 해방의 지식은 이를 통해 보다 안정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다. 더욱이 폴 윌리스가 <계급의 재생산>에서 본 것처럼 공교육을 부정한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더 빨리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래서 사이드는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비전을 보는 것을 넘어서 주인의 보호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공교육을 통해 해방의 지식을 배우는 동시에 어학, 컴퓨터, 글쓰기와 같은 도구적 지식을 배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교과 과정, 교수진, 등록금, 교과과목에 대한 미시적 정치투쟁을 통해 이 공교육을 변화시킬 때 건강한 시민과 성숙한 주체라고 하는 해방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

(경희대 대학원신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