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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0. 8. 00:58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야기’



폴 크루그먼이 자책한 것처럼 “로켓과학 못지않은 수학적 엄밀함을 추구해 온”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자연과학 반열에 오르길 기대한다. 하지만 경제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것은 고등수학이 아니고 ‘이야기’(담론)로 다가올 때이다. 이는 참과 거짓보다는 설득력의 영역이다. 1997년 말 아시아 경제위기를 겪으며 ‘내 탓이오’라고 한 한국과 ‘네 탓이오’라며 국제 투기자본을 겨냥한 말레이시아는 각자 그게 진실이라 믿었고 그 결과 나라의 행로가 많이 달라졌다. 박정희 정권의 ‘잘살아 보세’,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노무현 정부의 ‘2만달러 국민소득’ 같은 정책 드라이브는 모두 경제, 나아가 국가운영의 틀을 제시하는 커다란 이야기였다.


이야기로서의 경제에는 현실 인식과 진단이 있고 처방이 있다. 여기서 자연스레 정부의 정책방향이 도출되며 기업, 노동자, 국민 각자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이 제시된다. 청년 실업, 중산층 붕괴, 저성장 고착화 등으로 앞뒤가 막힌 듯한 우리 경제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때가 됐다. <축적의 시간>은 그런 이야기를 제시하는 책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에게 우리 산업이 처한 현실과 대안을 물어 정리한 책이다.


이 책도 우리 경제가 위기라 진단한다. 기업의 수익성과 전체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추세적으로 하락하는 것이 그 징표다. 세계 경제는 저성장이 새로운 보편(뉴노멀)이 된데다 저출산, 투자율 저하로 국내 요인도 움츠러들고 있다. 여기에 아베노믹스의 일본이 살아나고 광활한 내수를 지닌 중국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에서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어 한국 경제는 몇 년 못 가 변변히 수출할 만한 물건이 없는 ‘넛크래커’ 신세가 될 처지라는 것이다.


그 원인을 이 책은 우리 경제가 모방은 잘하지만 개념을 설계하는 선도자(퍼스트 무버)로서의 능력은 기르지 못한 데서 찾는다. “스스로 경험을 축적하기보다는 선진국으로부터 개념을 받아온 후 실행하는 것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왔고 “그 모델이 한계에 부딪치며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고 본다. 이 책이 핵심 열쇳말로 제시하는 ‘개념설계 역량’은 풀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역량”이다. 애플은 휴대전화를 통화기능이 있는 컴퓨터로 재정의해 스마트폰을 내놨고, 여기에 통신사를 끼지 않고 콘텐츠가 유통될 수 있는 앱스토어라는 생태계까지 만들었다. “컴퓨터 기능이 있는 전화”에 집착한 노키아 왕국을 무너뜨린 애플의 힘이 바로 개념설계 능력이다.


그런데 개념설계 능력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벤치마킹에서 크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시행착오를 ‘축적’해야 길러진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려면 혁신이 기업 내부에 잘 축적되는 제조업을 중시하고, 외국 저널의 논문 편수가 아니라 산학협동이 잘되도록 공대교육을 일신하며, 실수를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사회 전체를 축적 지향의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이 책은 제안한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추석 연휴에 읽으려 마음먹던 차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연휴에 의원과 당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유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 책이 제시한 이야기가 조만간 정부 여당의 경제정책이 될 수 있다. 이런 진단과 대안이 내키지 않는 정치세력이라면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 없이 비판만 해서는 주도할 수 없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2015. 10. 1.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