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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박근혜, 이것만은 아버지의 '강력함' 배워라

내년 최저임금이 7.2% 오른 5210원(시간당)으로 결정됐다. 월급으로 계산하면(1주 40시간 기준) 108만 9000원 정도다. 그런데 최저임금위원회가 생계비를 계산한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기준으로 혼자 생활하는 노동자가 한 달을 지내는 데 적어도 141만 원이 필요했다. 결국 지금의 최저임금 받아서는 빚을 지지 않고 살기 어렵다는 말이다.


새 정부가 최저임금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최저임금 인상 기준을 마련해 근로자 기본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관련한 제도적 보완을 약속했다. 전향적인 조처를 내놓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인상률만 예년보다 조금 높았을 뿐 저소득층의 빈곤해결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을"이라며 노인층 빈곤문제를 해결하겠다던 기초연금이 가고 있는 모양새도 그렇고, "공약(空約) 시리즈 내놓느냐"는 비판이 나오게 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주요한 국정 전략으로 제시했다. 그 개념이 모호해 과거 정권의 벤처기업 지원책 또는 과학기술 영재 육성정책 정도로 이해가 되지만, 사실 경제에서 창조성의 가장 큰 원천은 경쟁보다는 참여하고 협동하려는 의지이다. 국민소득이 높고 사회가 안정된 북구의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같은 나라는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믿음을 주는 신뢰지수가 높게 나온다. 신뢰는 협동의 원천이며,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을 풍성하게 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


그래서 이런 나라의 교육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가르친다. 핀란드는 시험을 치르되 등수를 나누지 않는다. 그런데도 학업 성취도는 어느 나라보다 높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오로지 내 앞가림하는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하는 우리의 교육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박 대통령도 참여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다. 지난달 중국 칭화대 강연에서 "창조경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며 "창의력과 잠재력이 나오려면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려 일할 때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그런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열정을 바침으로써 창의력이 나오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다"고 덧붙인다. 열심히 해도 꿈을 이룰 수 없는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상황에서는 창조경제가 피어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문제는 신뢰와 협동의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소득의 평등이란 것을 박 대통령이 간과하는 것이다. 소득격차가 큰 곳에는 불신이 높아져 협동하려는 의지가 반감한다. 미국 정치학자 에릭 우슬러너는 신뢰의 도덕적인 기초로 평등한 소득 재분배를 꼽았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불평등의 대가>에서 상위 1%로 부가 쏠리는 사회는 지극히 비효율적이 되고 성장 잠재력마저 잃게 된다고 밝혔다. 평등이 협동을 낳고 이를 통해 경제적 효율성마저 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루하루 살기 어려운 계층에서 박근혜 후보를 많이 찍었다. 과거 박정희 시대에는 뭔가 좋았던 것 같은 집단 기억도 크게 작용했다. 사실 박정희 시대는 상당히 불공평한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전략은 이른바 '불균등 성장전략'이었다. 차관을 들여다 관치로 운영되는 금융회사를 통해 재벌에게 특혜성 대출을 해줬다. 자원의 집중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국들을 따라잡으려는 전략이었다.


여기에 많은 국민이 동참해 개미처럼 땀을 흘린 결과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본과 노동의 분배가 상당히 불균등했는데도 국민의 참여 의욕이 꺾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역시 평등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때는 소득이 아니라 바로 소비에서의 평등을 조성한 것이다.


경제학자 이종현(가천대)의 연구('1970년대 정부의 반(反) 소비정책과 소비자행동에 대한 연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박정희 시절, 강력한 국가는 생산만 통제한 것이 아니라 소비에도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개입했다. 저축으로 모자란 투자재원을 조성하고, 이런 자원을 수출부문에 집중하기 위해 소비억압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간 것이다. 소비재 산업은 같은 제조업 안에서도 수출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으며, 유통산업은 단속과 감시의 대상이 됐다. 사치재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특별소비세를 도입하기도 했다.


지금도 당시의 신문과 방송에 '과소비 단속'이니, '위화감 조성'이니 하며 소비를 '죄악시'하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등장했던 기억을 할 것이다. 경제성장에 따라 소득도 빠르게 증가했지만, 박 정권은 가진 이들의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평등의식을 높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이 교수의 분석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처럼 경제발전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소비를 억제해 평등의식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소비를 늘려서, 즉 내수를 키움으로써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할 때다. 방법은 소득이 조금만 늘어도 효능감이 크고, 늘어난 소득이 바로 소비로 이어지는 계층의 소득을 적극 늘리는 것이다.


실질임금을 높이는 것도, 다른 방식의 재분배를 확충하는 것도 모두 필요하다. 그래서 정부는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의 절반 수준까지는 인상하고 노인기초연금을 내실화해 실질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를 얼마간의 저항이 있더라도 정착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소비억압에서 보였던 '강력함'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의 소득평준화 의지는 '뜨뜻미지근' 하기만 하다.


이봉현 한겨레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프레시안 201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