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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못난 개항> 관훈클럽 저자노트

문소영(서울신문 문화부/ 부장)

 

지난 3월에 나온 《조선의 못난 개항》은 내가 쓴 한국사 못난이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19세기 중반 조선의 개항과 일본의 개항을 서로 비교했다. 일본은 1853년에, 한국은 1876년에 개항했으니 겨우 23년의 차이인데 두 나라는 그 이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일본에 문명을 전해줬다는 조선이 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두 나라의 차이를 개항의 주체세력부터 개항을 앞둔 경제, 사회, 정치적 상황을 비교해 진단하고자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의 정치계에서는 “한국의 상황이 19세기 개항기와 비슷한 위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조선의 개항기와 대한민국의 21세기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떤 위기에 처해있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분석한 책은 없다.


책을 쓰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140~50년 전 개항의 결과가 21세기 한국의 정치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일본 식민지 배상문제로 인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배상들 말이다. 더 나아가 작금의 남북한의 전쟁위기도 조선이 개항에 성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남북이 분단될 일도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했고, 조선은 왜 실패했나’라는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의 못난 개항》은 일종의 실패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의 상황을 개항에 성공한 일본과 비교함으로써 빛과 그림자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개항기를 잘 살펴보면 외교정책이 부재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국제정세를 바라본 조선의 대외인식의 한계가 도드라진다. 그래서 조선의 외교적인 부문에도 비중을 많이 뒀다. 고종을 개혁군주, 계몽군주로 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2000년대부터 진행되고 있는데, 과연 그러했는지도 진단했다. 매국의 책임을 이완용 등 친일파 관료들에게 떠넘기고 고종은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1863년부터 1907년까지 43년을 재위한 고종황제의 망국의 책임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종이 친일, 친청, 친러, 친미 정책을 쓰는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이면서 어떤 악수를 뒀는지, 일본은 얼마나 조심스럽게 강대국과의 외교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살펴봤다.


고종을 비롯해 조선의 인재들에 대해서도 집어봤다. 일본의 개항의 진행은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넘겨준 위로부터의 개혁이 진행된 과정일 수도 있지만, 하급무사와 지식인들이 결합해 ‘존왕양이’ 운동을 펴고 이들이 사쓰마-조슈가 연합한 삿조 동맹의 기반이 돼 나라를 개화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볼 수도 있다. 걸출한 통합형 지도자 사카모토 료마도 있었다.


조선은 어떠했나. 조선이 국가개조에 실패한 원인을 내부에서 찾고자 이 책은 쓰여진 것이다. 특히 지도력의 차이와, 국가적 인재의 육성, 기용에서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했다.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위대하다면, 그 위대한 국민들을 어떻게 이끌어나갔는가가 국가운영의 주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당리와 당파에 의해 인재가 배척됐던 것은 지금이나 과거나 비슷하다.


또한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2010년 신영기금의 지원을 받아 쓴 《못난 개항》을 참고해야 한다. 《못난 개항》은 16~18세기 조선과 일본의 문화와 경제를 중심으로 분석한 책이다. 평소 “조선이 그리 잘났고, 왜놈은 그리 후진적이었다는데 어떻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냐”는 의문을 해결하고자 한 책이다. “혹시 일본이 16세기 이래 조선보다 경제, 문화,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 우월했던 것은 아니었나”라는 가설을 세우고, 전문 역사서적을 통해 해답을 찾아갔다.


책을 쓰면서 부담이 컸다. 국민이 싫어하는 일본은 잘했다고 하고, 조선은 못했다고 하니, 욕을 태산으로 먹겠구나 하는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돌직구’를 던질 힘은 강단의 학자들보다는 저널리스트가 낫겠다 싶다.

21세기 중국, 일본, 한국 등 동북아시아는 북핵을 둘러싸고 요동을 치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마저 가세했다. 외교적 역량이 필요하고, 인재의 적재적소 기용이 요구됐던 19세기랑 비슷하다. ‘못난’이란 표현 때문에 우려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못났다는 단어에는 애증이 깔려있는 것이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고, 미움도 깊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