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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줄 언론이 그립다

문화자본이라곤 전혀 없는 처지라 음악 얘기만 나오면 늘 기가 죽지만 가사가 너무 좋아 기억하는 것도 있다. 폴 사이먼과 아트 카펑클이 부른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다. 1981년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에서 무려 50만 명을 울린 이 노래에는“당신의 심신이 피로하고/작게만 느껴져서/눈에 눈물이 고이면/내가 닦아 줄게요/난 당신 편이에요/힘든 시기가 닥쳤지만/주위에 친구도 없을 때/내가 엎드려 험난한 물살 위에/다리가 되어 드릴게요”라는 내용이 있다.


삶에 미친 영향의 크기를 두고 볼 때 1997년의 외환위기는 1950년의 전쟁에 뒤지지 않는다. 국민의 상당수가 IMF 사태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는다는 통계도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던 환율시장의 동향은 그 이후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했다. 외환시장의 급변에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 역시 당시의 경험에 빚진 바 크다. 경제뉴스는 이렇듯 험난한 금융시장의 다리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국내 언론의 최근 엔화 관련 보도는 세상을 이해하는‘다리’가 아닌‘장애물’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금융시장의 속성상 가장 꺼리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떼거리 행동(Herd Behavior)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선정적이거나 자극적 단어를 사용함으로써‘감정적’으로 ‘본능적’인 행동을 유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국제사회를 돌아보면 금융시장은 항상 과도한 쏠림 현상에 노출되었고 그 결과‘과열과 폭락’이 반복되어 왔다. 정치적 여론시장과 유사한 면도 없지 않지만 금융시장은 특히 소수의 힘 있는 세력에 의한 시장정서(market sentiment) 조작 가능성이 존재한다.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순식간에 거래되는 곳에서 매번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물론 시장의 일시적인 왜곡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교정되지만 거래는 이미 완결되고 이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정부의 금리 및 환율정책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자국의 정책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성하고 다른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는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합리적 정책결정을 방해한다. 감성적 민족주의나 문화적 편견 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며 이중 잣대를 적용해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실물경제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정확히 진단하고, 전문적으로 원인과 대응책을 분석하고, 나아가 신뢰할 만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상에 매몰되지 말고 역사적인 흐름을 짚어내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고, 보다 전문적인 통찰력을 통해 시장 참여자들이‘합리적이고 성숙한’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의 일반적 규범으로 분류하자면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심층성 등에 해당한다.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 국내 경제뉴스의 상황은 참담하다.


 객관적인 보도는 모든 뉴스의 기본이다. 제3자가 봤을 때도 동일한 평가가 나올 수 있도록 감정적 언어를 자제하고, 관련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며, 의견을 앞세우지 말고, 특정한 이해관계자의 관점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최근의 엔화 관련 보도에서 이 원칙은 쉽게 배척되고 있다. 엔화 관련 뉴스는 우선 그 제목에서‘위기’단어가 너무 많다. 가령, “엔·달러 환율‘마지노선 붕괴’엔저 위기”“엔저 대공습... 수출기업·관광업계 위기 확산”“엔저 파고 이제 시작.. 하반기 더 큰 위기 온다”“엔저 위기 극복 위해 정부-경제계 공동 나서기로”등에서 알 수 있듯 최근의 엔저는 무비판적으로‘위기’로 규정되고 있다. 군사 용어인‘마지노선’‘공습’‘환율전쟁’등 감성을 자극하는 단어도 범람한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실제 위기로 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이런 용어 선택은 용납될 수 있다. 경쟁력 확대, 수출 증가 및 경기부양 등을 위해 각국이 경쟁적으로 환율을 낮추려고 한다는 점에서 전쟁이라는 표현 역시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환율은 수출만이 아니라 수입측면도 있고 글로벌 시장의 등장으로 인해 환율시장은“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은 환율의 등락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며 유럽의 경우 단일통화로 인해 개별 국가 차원의 환율전쟁을 하지도 않는다. 100엔 대비 한국 원화의 교환비율이 200원(1970년대), 800원 (1990년대 중반), 1,100원 (외환위기 당시), 1600원 (2008년)을 거쳐 2013년 현재 1,100원 언저리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기의 실체 역시 의심스럽다. 미국달러 대비 일본 엔화 역시 이 기간 동안 비슷하게 움직였다. 가령 1995년부터 2008년 가을까지 엔화는 1달러당 평균 115엔에 거래되었다. 2013년 현재의 110엔 수준은 지난 2011년 이후의 엔고(80엔대 초반)가 정상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한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국내 언론은 특정한 시점에 비해 엔화가 떨어지면 항상‘위기’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다음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역수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엔화만이 아니었다.


<그림1> 한일 무역수지 연도별 추이 


엔화의 하락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도 문제가 많다. 물론 엔화의 하락은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자동차, 전자, 철강과 화학 등의 분야에서 가격경쟁력이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의 그림에서 보듯 한국은 일본에 수출하는 이상으로 수입을 하는 경제구조다. 국내 기업의 상당수는 부품과 기계류 등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오히려 수입비용이 줄어든다. 특히 일본에서 자금을 빌려서 활용하는 많은 중소기업의 경우 엔저로 인해 부담해야 할 이자 비용이 줄어드는 이익을 얻는다. 국내 경제 주체의 입장에 따라 엔화의 등락에 따른 이익과 손실이 다르게 발생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엔저의 최대 수혜자로 알려진 국내 대기업의 경우 외환손실을 줄이기 위해 생산기지를 이미 해외로 옮겼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의 경우 2002년 중국에 공장을 설립한데 이어, 미국(2005년), 체코(2008년), 러시아(2010년)와 브라질(2012년) 등에 현지 공장을 각각 설립했다.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80년대 이후 지속된 미국과 유럽의 엔고 압력에 의해 일본 기업은 일찍부터 해외현지 법인을 설립했으며 환율 변동에 따른 다양한 리스크 관리 전략을 취해 오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이들 대기업은 따라서 환율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보다 환율시장의 안정을 더 선호한다. 유럽이 외환시장의 변동폭을 극적으로 없애기 위해 단일통화를 출범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국내 언론에서 이러한 공정한 입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이 나치게 수출 의존적인 경제모델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원화 가치의 하락(따라서 엔고 또는 달러고)만을 좋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많다. <고환율 음모>를 쓴 송기균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환율이란 돈의 상대적 가치이다. 때문에 누군가 고환율로 이익을 보았으면 그만큼 손해 보는 쪽이 생기는 것이 외환 시장의 이치다. 대기업이 수출로 달러를 벌어 들여와 우리나라 외환시장에서 높은 가격의 원화로 바꾸었다면, 수입 원자재, 곡물, 원유 등 수입품은 높은 가격의 원화를 주고 달러로 바꾸어 결제를 해야하는 부담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비싸게 수입된 유류, 곡물, 수입원자재 등으로 인해 기름값이 오르고 물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했던 것은 인위적인 고환율 정책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오마이뉴스, 12/11/2. 재인용)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국내 원화의 대외 교환비율(달러대비 또는 엔화대비)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저하게 낮아졌다. 1990년대 중반 원화의 가치는 1달러 또는 100엔 대비 800원 수준이었다. 2013년 현재 원화는 1,200원대 부근이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원화의 교환비율을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했으며 그 결과 1998년 이래 지속적으로 무역흑자를 기록 중에 있다. 장기간 계속된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막대한 규모의 외환보유고도 축적했다. 그러나 평균 50% 정도 평가 절하된 원화로 인해 수입 물가는 큰 폭으로 상승했고, 국내 수입업체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결과적으로 국내 내수시장이 붕괴되는 부작용도 겪고 있다. 게다가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달러보유고가 많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미국이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내는 양적완화 정책을 펴면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무역흑자국은 달러화 가치의 하락 비용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다. 국민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한편, 낮은 환율을 통해 달러를 모았지만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다시 미국 정부의 국채로 되사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한국 정부가 이 과정에서 발행한 통화안정채권과 외국환평형채권의 이자부담만 연간 11조를 넘어서는 상황이다.


외환정책은 국가 간 민감한 사안이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환율조작국이라고 비판하고 중국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지속적인 무역흑자에 반발해 미국과 유럽이 중심이 되어 1985년 플라자합의 등을 추진하게 된 것 역시 환율이 대외정책의 핵심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역시 1990년대 중반 지속적인 달러화 하락에 대한 대응으로‘강한 달러 정책’(strong dollar policy)을 추진한 바 있다. 대외정책에 있어 외환시장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언론의‘균형’있는 보도는 한가한 요구사항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국내 언론이 일본 정부의 환율정책을 평가하거나 보도할 때는 이중 잣대를 들어대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국가에도 동일한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보도는 문제가 많다.


(각주) 정부는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당사자가 아니다. 달러보유고를 축적하기 위해 정부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으로부터 달러를 매입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외평채를 발행함으로써 민간주체(기업 포함)가 갖고 있는 달러를 사들이고 이 돈은 자연스럽게 시중에 유통된다. 그러나 시중에 현금이 많아진다는 것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다는 것으로 한국은행은 통안채를 발행해 이 돈을 흡수한다. 외평채와 통안채의 평균 이자율은 약 7-8% 수준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렇게 모은 달러를 직접 보관할 수도 없으며 굳이 은행에 보관해 둘 이유도 없다. 미국 재무부 채권이나 공사채 등을 정부가 매입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며 이 경우 정부가 벌어들이는 금리는 약 2-3% 수준이다. 정부가 민간에 주는 금리와 미국에 대한 재투자에서 오는 금리의 차액(약 5%)이 고스란히 정부의 이자부담으로 남는다. 달러보유고가 늘어날수록 정부의 이자부담은 증가하며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질 경우 그 비용 역시 고스란히 정부의 몫이 된다. 미국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각국 정부는 이런 이유에서 보유에 따른 손실비중을 줄이기 위해 ‘국부펀드’를 운영한다. 한국은 2005년 1월 이를 전담하는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했으며 이를 통해 비용을 일부 보전하는 한편, 달러화를 대신해 유료화, 위안화, 엔화 등의 대안자산을 확보 중에 있다.


일본은행(BOJ)은 전날 통화정책위원회에서 당초 내년 1월로 예정됐던 무제한 통화 공급을 즉각 실시키로 하고, 규모도 기존의 곱절 이상인 매달 7조엔(약 84조원)을 풀기로 했다. 매달 방출되는 돈은 우리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추진하기로 한 올해 추가경정예산의 4배를 웃돈다.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물가 2% 목표를 2년 내 가능한 한 빨리 이루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일본 경제를 20년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탈피시키겠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베노믹스’ 실행에 구로다 총재가 머리띠를 매고 앞장선 것이다. 고삐 풀린 망아지를 보는 감마저 없지 않다(세계일보, 13/4/6).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공격적인 통화 완화 정책이 세계경제 교란 요인이 되고 있다. 그제 개막한 다보스포럼은 대일본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중앙은행 개입은 심각한 반칙행위이며 환율의 정치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국제통화기금은 이웃을 거지로 만드는 정책을 각국이 채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불편한 마음을 나타냈다(한겨레, 13/1/25)


아베노믹스의 첫 공격무기가 엔저정책이다. 집권당 간사장이 "바람직한 달러ㆍ엔 환율이 85~90엔"이라면서 엔저를 재촉하고 있다. 엔화가치는 달러당 78.4엔에서 두 달 새 90엔대까지 떨어졌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도 엔급락세를 버티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해외에서 잘나가는 중소기업 제품도 죽을 맛이다. 경동보일러는 미국에서 순간온수기와 보일러를 작년에 1억달러어치 파는 신기록을 세웠다. 일본 린나이를 제쳤다. 그러나 엔화 급락으로 상황이 역전됐다. 일본 업체들의 가격 인하를 통한 물량 공세로 수출타격이 가시화되고 있다(매일경제, 13/1/21).


일본에 대한 보도에 있어 국내 언론의 차이점은 거의 없다. 국내정치와 북한 보도에 있어 보수와 진보로 첨예하게 다투는 것과 달리‘일본 때리기’에 있어 국내 언론은 일심동체에 가깝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최근 일본 정부의 엔화 하락정책은‘아베노믹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전달된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정치, 경제, 사회와 외교 전 분야에서 보수적인 정책을 실천한 것에 빗대 일본의 외환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태도는 우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뒤이은 유럽위기로 인해 일본 엔화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다음의 <그림>은 전 세계 안정자산 중에서 각국 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1999년 유로화의 등장 이후 세계예탁자산(Reserve Currency)은 달러화의 점진적 하락, 유로화의 상승, 엔화와 파운드화의 정체 등으로 요약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부터 미국 달러화와 유로화에 대한 수요는 일시적으로 줄었으며 중국과 달리 변동환율제를 택하고 있는 일본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 앉았다. 달러화 대비 엔화의 가치는 1987년 80엔대를 처음 기록한 후 2012년 77엔을 기록했다. 수출 중심의 일본이 엔고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엔화는 평균 110엔 대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엔화 가치는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150엔대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당시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지난 30년에 걸쳐 일본은 이러한 서방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고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환율시장에 개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최근 엔화의 약세는 따라서 시장의 자연스런 조정과정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특히 미국과 유럽의 묵인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언론에서 이러한 역지사지의 관점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림> 세계예탁자산 분포현황




일본의 아베 정부가 자국의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장에 개입한다는 것 역시 정당한 주권 영역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변동환율제도를 도입한 이래 지금까지 외환시장에 개입해 오고 있다.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오를 때 마다 국내 언론은 경제위기론을 집중 부각했다. 정부는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급격한 원화절상을 막았다. MB 정부에서 외환정책을 총괄했던 강만수 장관은“장관은 환율에 대해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어느 선진국도 환율에 대해서 시장 자율에 완전히 맡기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한겨레21, 2008/10/10). 국내 언론 역시 아래에 있는 것처럼 이러한 입장에 동의했고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계에서는 환율이 950원대 이하로 내려가면 기업들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한다. 환율 하락의 기대감이 해외자금을 불러들이고, 이 자금이 다시 환율을 찍어 내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환율하락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을 불식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환율 시장에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수수방관한다면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환율 하락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당국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 절실한 시점이다(한국일보, 2007/6/1).


끝없는 원·달러 환율의 고공행진과 증시의 붕괴는 곧바로 실물경기로 이어져 우리 경제를 헤어나기 힘든 벼랑으로 몰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한가롭게 원칙론을 말할 때가 아니다. 한번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면 이를 되돌리는 데는 몇 배의 노력이 소요되는 법이다. 지금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 과감한 대처다.(세계일보, 2008/10/25).


그러나 국내 언론은 일본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조선일보>의 다음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08년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그의 고환율 정책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최근 밀어붙이고 있는 아베노믹스와 닮은꼴이다. 아베노믹스는 인위적으로 엔저(低)를 유도해 기업들의 수출을 늘리고, 실적이 회복된 기업들의 임금 인상을 유도해 소비 증가를 유발, 경기를 살린다는 것이다. 그가 추진한 고환율 정책은 '원저(低)'인 셈이니 출발점은 같다. 차이가 있다면 강 전 장관은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 상태에서 추진했고, 아베 총리는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장기적인 물가하락과 침체) 상황에서 고환율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2013/3/29)


아베노믹스로 인한 세계환율전쟁이 촉발될 가능성도 제기 되고 있다. 아베노믹스에 대해 불쾌하기는 미국.중국.유럽이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은 스스로도 양적 완화 정책이라며 돈을 펑펑 찍어내는 마당에 일본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기 힘든 사정이 있다. 중국도 스스로가 '환율 조작국'으로 몰리는 마당에 일본의 환율을 두고 가타부타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이문제는 국제 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다. 내달 초 열릴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일본에 공동의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데 외교적 역량을 쏟아야 한다(조선일보, 2013/1/23).


한국 정부는 당연히 원화의 급격한 상승을 방어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일본 정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내 언론을 관통하는“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논리다. 미국이나 유럽의 양적완화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만 유독 엄격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천문학적인 달러를 풀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달러화는 급격하게 하락했다. 급격한 엔고에 따른 시장 조정 측면이 있는 일본의 엔저 정책(?)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국내 언론에서 일방적인 비난을 받는 쪽은 일본 정부다. 미국의 양적환화 조치에 대해서는‘달러공습’‘부시노믹스’‘달러 저격’과 용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감정적 민족주의 또는 정치적 논리에 의한 균형성을 잃은 보도는 합리적인 정책 결정을 방해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왜곡된 창을 통해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국제사회 현안을 제대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데도 방해가 된다. 일본은 선진국이고 한국은 신흥국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논리는 G20 의장국으로 무역규모 1조원 클럽에 가입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국내 언론의 엔저보도는 이처럼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점(객관성 부족), 대기업의 입장만 옹호한다는 점(공정성 부족), 이중 잣대와 자의적 해석(균형성 부족)을 적용하는 점 등의 중첩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 언론은 일본 정부의 일방적 엔저 정책에 대한 높은 관심(아젠다 설정), 관련 정보의 전달 및 필요한 대응책 촉구라는 점에서는 제 역할을 했다. 문제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기 위해서는 이를 넘어서는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국내 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심층성 부족이 지적되는 이유다.


뉴스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공적지식이다.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고, 잘 가공되어 있어 쉽게 활용하며, 본질을 이해하고 적절한 전략을 모색할 수 있는 전문적 정보다. 민주사회는 이를 위해 언론인에 대해 다양한 특혜를 부여하고 언론인 교육을 위해 세금을 투자한다. 인터넷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 출입처가 제공하는 보도자료, 상투적인 분석과 대안을 얻기 위해서는 굳이 언론을 특별하게 대접할 이유가 없다. 언론 역시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있고 또 수집할 수 있는 콘텐츠를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다. 일본 엔저를 둘러싼 보도는 이를 고려할 때 심각한 낙제점이다.


일본 엔저의 영향 및 대응책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는 상투적이고 진부하며 전혀 알맹이가 없다. 환율과 관련한 다음의 보도는 지난 30년 간 언론의 보도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저유가·저금리·미 달러 약세라는 3저시대가 퇴조하고 고금리·고물가·달러 강세라는 3고의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 수출은 줄어드는 반면에 원유가 인상으로 수입부담이 늘어남으로써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원유가 인상은 국내유가 인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국내 기름값이 오르면 전체 물가의 상승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달러 강세는 바꿔 말해 일본 엔화의 약세를 의미하며 엔 약세는 우리의 수출경쟁력을 한층 더 위축시킬 게 분명하다(서울신문, 1990/8/7).


원·달러 환율 940원선이 무너진 것만 해도 큰 일인데 원·엔 환율마저 하락일로에 있어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17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엔 환율은 100엔당 792.50원을 기록, 9년전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14일의 784.27원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엔 환율 하락은 우리나라 수출 산업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대일 수출 비중이 높은 중소기업은 일본 수입선으로부터 제품값이 높아져 더 이상 구매할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출혈수출을 각오하기도 한다. 가격 인하에 동의하지 않으면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는 일본 기업들도 많다. 또 미국 등 해외시장에서 일본 상품과 경쟁하는 대기업들 역시 가격경쟁력에서 일본 상품에 밀리고 있다(문화일보, 2006/11/18).


엔저가 더 가속화되면 수출 부진에 이어 성장 둔화, 일자리 감소 사태를 부를 것은 빤한 이치다. 아베노믹스 입안에 관여한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교수는 1월 “한국 기업과 경쟁하려면 달러당 100엔이 적정선”이라고 했다. 일본의 속내를 알고도 남을 일이다.일본의 엔저 정책은 ‘나 살고 너 죽자’는 뻔뻔한 정책이다. 경제학에선 ‘근린궁핍화 정책’이라고 부른다. 우리 정책당국이 일본 의중을 제 손금처럼 환히 들여다보면서 체계적 대응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재앙을 부르는 무능’이다(세계일보, 2013/4/6)


한국 경제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불가피한 것이라는 반론도 물론 가능하다. 그럼에도 수십 년 동안 거의 동일한 문제가‘반복’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직접 겪은 당사자다. 1997년과 비교했을 때 무역흑자 규모는 물론 외환보유고 역시 몇 배나 증가했다. 다음의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한국의 무역수지 흑자는 1966년 이래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특히 1990년 이후에는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과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을 제외하면 적자를 기록한 적도 거의 없다. 달러약세나 엔저가 발생할 때 마다 수출악화를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안이한 보도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림> 한국 무역수지 동향 (1966~2013)



게다가 중국이나 일부 국가의 경우 고정환율제를 통해 굳이 환율시장의 흐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도 놓치고 있다. 일본 엔저 위기는 따라서“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왜 주기적으로 환율불안에 시달리는지,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쏟아 부으면서 환율을 방어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는지, 수출 중심의 경제모델로 인한 기회비용은 무엇인지”등을 질문하는 계기여야 한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안하기 때문에 외환보유고를 축적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수출을 통해 더 많은 달러를 벌어야 하며, 미국 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고환율 정책(따라서 일본 엔화와 미국 달러의 강세)은 불가피하다는 단순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왜 유럽과 같은 공동통화를 채택함으로써 환율전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로 인해 또 최근의 양적완화 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는 미국달러를 축적하기 위한 게임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 무역의존도가 100%에 육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금융질서라는 게임의 규칙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못하면서‘자의적’인 잣대로 주변국의 외환정책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 역사적 맥락은 전혀 무시한 채 특정 이해집단이 전해주는‘위기’담론을 무비판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 또한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온 논리를 맥락에 대한 이해도 없는 상황에서 단순 반복하는 것. 외환시장이 출렁일 때 마다 불안감을 증폭시키다가 시장이 조금이라도 안정을 찾으면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한국 언론이 이번 보도에서 보여준 민낯이다. 앞서 언급한 노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는“당신의 마음을 편히 해 드릴께요/ 항해를 멈추지 말아요. 소중한 그대/ 계속 나아가세요/ 당신에게도 환하게 빛날/ 때가 찾아 올 거에요/.../만약 동행이 필요하면 내가 당신 뒤를 따라 항해할 거에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란 말로 끝난다. 전쟁의 두려움과 경제위기가 일상화된 고단한 일상에서 이런 언론을 찾는 것은 한 여름 밤의 꿈에 불과한 것일까?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신문과방송, 6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