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irror.enha.kr/wiki/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떼와 같다.”
지난 8월 20일 ‘국정원(국가정보원) 대선 불법개입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천주교 수원교구 시국미사’에서 나온 이성효 주교의 강론 중 주요대목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권)’에 나오는 가르침을 인용한 내용이다. 그 표현이 너무 강렬했던지 이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약 900년 뒤에 태어난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보다 구체적 해석을 오늘의 현실에 대입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더욱 구체적으로 ‘입법자가 공동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 내지는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경우에 그 법은 정의롭지 못한 부당한 법이다’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대통령이 ‘나는 그 사건과 무관하다’는 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무책임하게 포기해서는 안 되며 국정원이 자행해온 정치공작과 대선 개입의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도 큰 문제지만 국정원의 불법활동 자체가 더욱 충격적이다. 사실 국정원 여직원 댓글사태가 이렇게 확대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던 측면이 없지 않다. 아무리 불법적인 개입이라 해도 민주주의와 헌법을 이렇게 유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 ‘여직원’이란 용어도 그 상식적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설마 국가 조직의 요원들이 벌인 행위일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기에 ‘여직원’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셈이다.
그 진상은 예상을 뛰어넘어 이제 상상력 그 자체를 무력하게 할 정도다. 지금까지 나온 검찰 수사결과와 정황들만 해도 국정원 공작의 끝을 알 수 없다.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달기는 이미 국가조직의 불법적 대국민 심리전의 일환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 심리전은 국정원장-3차장-심리전단장-팀장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 속에 움직여왔다. 이들은 이슈선점 방법과 자신들의 활동을 은폐하는 등의 업무 메뉴얼에 따라 행동하고 이를 보고체계에 따라 보고해왔던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원래 1개 국 소속이던 심리전단은 개편과 함께 3차장 산하 독립부서로 확대돼 4개의 사이버팀을 운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총괄기획팀의 기획에 따라 네이버 등 국내 대형포털, 일간베스트저장소 등 중소포털, 그리고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전담팀을 구성하고 각 팀은 다시 4개 파트로 나누어 12개 파트의 70여명에 이르는 팀원들이 매일 지휘계통의 지시로 게시글과 댓글을 작성해왔다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또 수백개의 계정을 통해 자동 리트윗(퍼나르기) 프로그램 등을 활용, 수백만 건을 퍼나르는가 하면 삭제팀원을 두고 흔적을 지워왔다. 더욱 이들은 댓글 공작에 외부 민간인 조력자를 동원하고 매월 활동비까지 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은 ‘빅 브러더’(Big Brother)라는 감시체제를 통해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조작하고 그들의 의식과 무의식까지 통제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국정원의 정보화 기술을 활용한 대국민 심리조작은 ‘1984년’의 버전업된 최신판이나 다름없다. ‘감시’보다는 훨씬 세련돼 보이는 ‘세뇌’에 그 방점이 찍혀 있으니 더욱 그렇다. 여기에 보수언론까지 힘을 더하고 있다. 국정원 의 정치개입 보도에 관한한 국정원 감싸기의 차원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나아가기는커녕 심리전의 보조역할이 돋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호도하기 위해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는 만행을 저지른 뒤 ‘셀프 개혁’의 망중한을 즐기는 듯하다. 국정조사특위에 출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약속이나 한 듯 아예 증인선서를 거부한 채 청문회에 나섰다. 그들의 증언이 위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만용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검찰이 증거를 통해 확인한 정치개입의 분명한 사실조차 막무가내로 부인했다. 또 집권 새누리당은 이들의 보호막 역할에 앞장섰다.
취임 6개월을 막 넘긴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8월 26일 국정원의 불법 정치개입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또 국정원 개혁에 대해 “우리 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조직개편을 비롯한 국정원 개혁은 벌써 시작됐다”고 강조했다.
석 달째 계속되고 있는 각계의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에 대한 답변치고는 사오정 문답이 무색할 지경이다. 국정원의 댓글공작과 이를 은폐하는 경찰의 수사발표, 그리고 스스로 국정원 여성 요원에 대한 ‘인권유린’사태를 강조하던 선거유세마저 잊은 것인가. 남재준의 국정원 자율개혁을 믿으라는 말인가. 1600년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구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까닭이다
김광원 저널리즘학연구소 소장 (미디어오늘 201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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