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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근무시간 보장 않는 일자리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대개 중심가에 있는 버킹엄 궁전을 방문한다. 전통 의상을 입은 근위병 교대식을 보며 사진도 찍고 여유가 있으면 궁내부의 상당한 부분까지도 관람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을 대표하는 버킹엄 궁이 근무 시간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일자리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정식 이름은 근무시간 제로 근로 계약(zero-hours contract)이다. 이 계약에 서명한 근로자들은 일이 있을 때만 일하지만 다른 부업을 가질 수 없다. 근무시간이 전혀 보장되지 않기에 휴가나 병가도 없다. 이를 제대로 된 일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기존의 파트타임 근로 계약이 있는데도 새로 이런 계약을 만들었다는 것은 경제위기에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저렴한 임금에 이들을 고용해보자는 고용주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자유주의적 시각을 지닌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이 버킹엄 궁을 안내하는 안내인이나 기념품 가게 근무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버킹엄 궁엔 엘리자베스 2세를 모시거나 왕가 일을 돌보는 소수의 인력이 있다. 나머지 업무는 외주를 주었는데 이 외주업체가 근무시간 제로 형태로 근로자들을 채용했다. 논란이 된 것은 이런 비인간적인 형태의 근로 계약이 영국을 대표하는 곳에서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찬성하는 쪽은 융통성을 들어 근무시간이 보장되지 않았지만 일이 있을 때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냐는 반응이다. 특히 방학을 맞은 학생이나 연금 생활자들 가운데 연금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이런 일자리가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런 일자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간단하다. 이는 비정규직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근무 형태로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여기에다 이런 근로계약을 맺은 근로자들의 수를 두고 또 한 차례 논란이 있었다.


영국 통계청은 3000만명의 근로자 가운데 약 20만명이 이런 근로 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다며 채 1%도 되지 않는 근로자들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인력개발연구원(Chartered Institute of Personnel and Development) 추산에 따르면 최소한 100만명이 이런 형태로 고용되어 있다. 이 연구원은 고용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이기에 정부 기관인 통계청 추계보다 더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근로 계약을 두고 집권 여당인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의 입장도 차이를 보인다. 친기업적인 보수당은 유연한 노동시장이 영국 경쟁력의 원천이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자유민주당은 근로 계약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일자리도 보장해주지 않으면서 다른 부업도 갖지 못하게 금지한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이 조항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야당인 노동당은 이 근로 계약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무리 유연한 노동시간도 좋지만 최소한의 근무시간도 보장해 주지 않은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불만이 높다. 상당수는 근로시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서 최저 생활도 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시간제 근로자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도 시간제 근로자 고용을 늘려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정책이 있다. 그러나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대별되는 우리의 근로 형태에서 비정규직이 아니면서 탄력적인 노동시간을 보장해주는 시간제 근로자 고용이 쉽지 않다. 자본의 논리는 최소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거대 자본에 앞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대응해 왔지만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노조 결성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시간제 근로자 고용이나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 해결에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적 개입과 관리감독이 필요하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경산신문 2013.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