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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바보 시대
국민이 바보가 되고 있다. 보수언론과 박근혜정권이 벌이고 있는 대국민 여론전이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게 그 목적이라면 그 목적은 소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당장 박창신 원로신부의 ‘북한의 연평도 포격’ 발언에 대한 보수언론과 권력의 역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 11월22일 저녁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이 국가정보원(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불법적 대선개입을 비판하며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 미사’를 올린 게 빌미의 시작이다.
포문을 연 것은 조중동 등 보수언론과 방송이다. 사제단의 핵심 메시지인 ‘국가기관들의 불법선거 개입’에는 침묵하는 대신 이 자리에서 강론한 박신부의 북방한계선(NLL)발언을 북한의 입장 비호라며 ‘종북’으로 몰아붙였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정의구현’이 아니라 ‘종북구현’사제단이라는 비아냥까지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뒤를 이어 정부 여당이 총출동, ‘박창신 때리기’에 나섰다. 이번에는 아예 박근혜 대통령이 앞장섰다. 그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신부를 겨냥,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들이 많다. 앞으로 저는 국민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이런 일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을 받아 정홍원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적에 동조하는 행위이며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우여 대표는 “북한이 최근 반정부 대남투쟁 지령을 내린 뒤 대선불복이 활성화됐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박근혜 정권과 보수언론의 여론몰이는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남의 일처럼 대해온 박 대통령이 이번 사태에 강경대응을 선언한 이상 그 파장도 커질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는 ‘사제가 직접적인 정치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미사강론을 대서특필, 천주교 내부의 서로 다른 의견을 정치 공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천주교의 정치참여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배경은 천주교의 사회교리와 그에 따른 사제의 역할,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천주교의 역사적 활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더욱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밖 사회’에 대한 관심촉구도 버팀목이다.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시작된 한국천주교의 정치참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를 토대로 한다.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이 정치참여의 최고 근거문헌으로 거론된다.
“교회가 언제나 어디서나 참된 자유를 통해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임무를 자유로이 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의 구원이 요구될 때는 정치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정당하다.”(76항)
한국 천주교회가 국가기관들의 불법 대선개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이유 역시 이 결의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정원의 개혁과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전국 15개 교구의 사제와 수도자들이 모두 참여한 것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7월 25일 부산교구를 시작으로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제들은 지난 9월초 현재 2200여명에 이르러 전체 사제의 절반에 이르렀다. 그만큼 사태가 위중하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박근혜정부의 사건은폐와 조직적 수사방해, 그리고 종북몰이 등 국민을 호도하는 물 타기 시도가 계속됐다. 그러자 각 교구들의 2차 시국미사가 이어졌고 이번 전주교구에서 박 대통령의 사퇴촉구 시국미사가 벌어진 것이다. 박근혜정부와 보수언론은 ‘종북’이라는 딱지와 함께 사태의 본질을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서 종교계의 정치개입 비판으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천주교 내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란은 사실이자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교회 내의 개혁적 흐름과 이에 반대하는 보수적 견해가 교차한다. 유신시대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기는커녕 유신정권과 협력을 모색한 사례도 없지 않다. 현재 천주교의 정치참여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의견 역시 엄존한다. 그럼에도 천주교의 현실참여는 공감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천주교 전체의 정치참여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고, 사제직과 예언직을 수행하는 신부들의 포괄적 실천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태를 덮는데 총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불법행위가 대선기간 동안 인터넷상에서 행해졌을뿐 아니라 대선전후의 주요 고비마다 박근혜정권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 범주 또한 국정원 외에 국방부와 보훈처 등 범국가적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여론은 여전히 50%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보도다. 박근혜정권과 보수언론이 여론몰이에 몰두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국민 바보 시대’는 결국 국민의 책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김광원 언론인 (2013. 11. 27 미디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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