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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소 잡는 칼과 닭 잡는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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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잡는 칼과 닭 잡는 칼

 

 

역대정권 고위공직자

거의 미국 유학파 차지
한국의 현실 위태로워

닭 잡는 칼, 소 잡는 데 쓰고

있다는 생각 커져

 

딸 바보 아빠는 왕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공주의 병을 고칠 유일한 치료제는 암사자의 젖이었다. 왕국의 절반을 떼어주고 공주와 결혼을 시켜준다고 해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는데, 마침 길 잃은 아기 사자를 돌봐 주던 한 젊은이가 용케 젖을 구했다. 그러나 왕궁에 다 와갈 무렵 논공행상을 두고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먼저 손이 나서 젖을 짤 수 있었던 자신의 공이 제일 크다고 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고단했던 발도 빠지지 않았다. 젖을 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고자 했던 입은 쓸모없는 존재로 놀림을 받았다. 왕의 면전에서 입은 그 앙갚음으로 염소의 젖이라고 했고, 모두의 사과를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진실을 말해 목숨을 구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각자의 역할이 있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얘기다. 못 배웠다고, 가난하다고, 생각이 다르다고 차별받거나 제 노력이나 능력을 넘어 부당하게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도 가르쳐준다. 특정한 지역 출신과 집단이 손, 발, 입, 머리 역할을 모두 도맡아 하는 것은 잘못일 뿐더러 공동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 역시 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돈, 명예, 권력을 미국 유학파가 독차지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런 상식은 안 통한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역대 정권의 고위 공직자는 대부분 미국 유학파다. 박근혜정부의 유민봉, 서남수, 방하남, 서승환, 현오석, 문형표, 윤병세 등도 예외가 아니다. 전 세계에서 미국 박사를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한 학교는 놀랍게도 한국의 서울대다. 2012년 현재 기준으로 서울대 전임교원 1천902명 중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는 959명이나 된다. 한국개발원(KDI), 조세연구원, 한국금융연구원 등 주요 국책연구소의 미국 유학파 비중은 90% 넘는다. 능력이 출중해서, 인품이 훌륭해서, 리더십이 있어서라고 믿고 싶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쟁쟁한 인물 중에서 유독 미국 유학파만 이런 자질을 갖췄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게다가 유학의 실체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거품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은 쉽게 드러난다.

 

지식에도 국적은 있다.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면 국가안보와 관련한 핵심 프로젝트에서 배제된다. 동일한 과목을 배우더라도 미국 엘리트와 외국 유학생에 대한 교수의 기대치는 전혀 다르다. 제3세계 관료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공부할 기회를 주는 것이 이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시 출신의 한국 유학생을 통해 국내 고급 정보가 고스란히 미국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과연 몇이나 알까. 미국의 지적(知的) 유행이 몇 년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 재현되고 한국 상황과 무관한 지식이 대량 생산되는 것도 낯설지 않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유학생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주류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미국식 모델을 정답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학위를 준 지도교수님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미국은 두렵고 위대한 존재다. 명나라 황제를 흠모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시던 조선의 사대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검든 희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사면초가에 놓인 한국을 잘 이끌고 가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지 싶다. 그렇지만 2013년 한국의 현실은 너무 위태롭다. 대통령이 불법 도청을 당해도 침묵한다. 북한에 대한 알량한 경제적 지원에는 인색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한물 간 미국산 전투기를 구매한다. 쌓으면 쌓을수록 손해를 보는 미국 달러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면서 정작 대안통화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에 직면해서도 한·중·일 정상회담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원래는 닭을 잡는 칼이었는데, 소를 잡는 데 쓰고 있다는 확신이 커지는 까닭이다.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13. 12. 11.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