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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혼돈 속 아스라이 보이는 새로운 세상의 맥박을 읽자"

 

 

"혼돈 속 아스라이 보이는 새로운 세상의 맥박을 읽자"

▣ 집중심의: 부음 기사 잘 만들기 
 
 우리 신문 칼럼 필자 김호씨가 쓴 ‘김호의 궁지’(2013년 12월24일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셋째, “한겨레에서만 볼 수 있는 기사”들을 개발하면 좋겠다. 예를 들어 우리 언론의 부음 기사는 별 특색이 없다. <이코노미스트> <뉴욕 타임스>의 부음기사는 매년 책으로 묶어 낼 만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잘 쓴 부음기사 한 편은 자기계발서보다 더 깊은 삶의 자극을 줄 수 있다. 한겨레만의 부음기사 스타일을 개발해보면 어떨까? 사람들이 한겨레 부음기사에 실리는 것을 인생 마지막 영광으로 느낄 수 있다면?】
 지난 1월13일에 열린 한겨레열린편집위원회에서 외부 열린편집위원 중 한명인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도 <한겨레>의 신뢰도가 높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죽었을 때 부음 기사가 한겨레에 실리는 것을 매우 큰 자랑과 명예로 여길 것이다.”
 이처럼 부음 기사는 그 신문에 대한 신뢰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는 ‘신뢰할 만한 신문’에서 매년 1위로 꼽히고 있다. 그 신뢰성을 부음 기사에서 적극 활용해보기를 제안한다.
 최근의 부음 기사를 다른 신문과 비교해보고, 특히 <뉴욕타임스>의 부음 기사 스타일을 집중 분석해봤다. 한국 신문과의 차이점을 통해 개선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 ‘Obituaries’의 장점을 인터넷한겨레에 적용해볼 방안은 없을까도 함께 생각해봤다.
 

  
■ 총평
 
 우리 신문의 부음 기사가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너무 밋밋하고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달리 말하면 무난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대체로 이름난 사람을 대상으로 주요 경력을 죽 나열하는 식이다. 지명도의 높낮이에 따라 담기는 항목에 차이를 두면서…. 그러다 보니 고인의 공적인 얼굴이 아닌, 이면의 인간적 모습이나 체취를 잘 드러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고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자료만 들춰보고 언제든지 써낼 수 있는’ 수준의 기사라고 하면 지나칠까.
 고인에 대해 제대로 공과를 평가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극찬 아니면 비하로 흐르는 경우가 잦다. 조금 과장하면 완벽한 인간이거나 악인으로 묘사한다고 할까. 고인에 대해 온전한 평가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다는 신문의 중요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도 약점은 있게 마련이며, 나쁘다고 하는 사람도 장점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차원에서 하는 얘기가 아님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지적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국내 다른 신문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특히 다른 신문들은 자신들과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를 경우, 고인에 대해 잘못된 잣대로 평가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다. 또다른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올해 들어 지난 18일까지 우리 신문이 부음 기사로 다룬 인물은 이문영(18일치), 아리엘 샤론(13일치), 강상욱(13일치), 너훈아(13일치), 이상만(10일치), 에우제비우(6일치), 김재춘(8일치) 등이다.(일반 ‘궂긴 소식’은 제외) 이문영, 아리엘 샤론, 에우제비우는 사람면이 아닌 사회면, 외신면, 스포츠면에, 다른 사람들은 사람면에 실렸다.
 이 가운데 몇 사람을 대상으로 우리 신문과 다른 신문이 어떻게 다뤘는지 살펴본다.
 
△이문영=우리 신문이 다른 신문보다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가신이의 발자취(20일치)’ 까지 담아서…. 이문영이라는 인물이 민주화 운동을 한 해직 교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우리 신문의 지향과도 맞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다만 부음 기사(독재 맞서 평생 민주화운동…이문영 교수 별세)나 ‘가신이의 발자취’에서 고인의 이력을 중심으로 좋은 점만 드러낸 것 같아 조금 아쉽다.
 
△너훈아=우리 신문은【‘나훈아 모창가수’ 너훈아씨】라는 제목 아래 일곱 문장으로 보도했다.(인물 사진과 함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가 우리 신문에는 실리지 않은 일화를 담아 좀더 자세하게 다뤘다. 조선일보는 이날 우리 신문과 비슷한 분량의 기사를 내보낸 뒤 다음날 ‘대중문화·바둑’면의 머리 기사로 다시 다뤘다. ‘짝퉁 가수라고 삶까지 짝퉁이랴’라는 제목 아래 그의 이런저런 역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적잖은 울림을 준다. 유명인사가 아니지만 비중을 두어 다룰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칼럼으로 다룬 신문도 몇 군데 있다.
    
 먼저 우리 신문 기사이다. 
 【가수 나훈아의 곡을 모창한 가수로 유명한 너훈아(본명 김갑순·사진)씨가 간암으로 1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57.
 나훈아를 빼닮은 외모와 모창 솜씨로 인기를 끈 고인은 20년 넘게 전국 각지 밤무대에서 활동했다. ‘이미테이션’ 가수를 소개하는 각종 방송에 빠지지 않고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근해씨, 아들 별리·달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병원, 발인은 14일 오전 6시. (02)797-4444.】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이다.
 【빈소는 휑했다. 이름도 낯설었다. 고인 이름 옆 괄호 안의 ‘너훈아’란 이름이 없었다면 알아볼 수도 없었다. 13일 오후 서울 순천향대병원 빈소에 들어섰을 때 노래하고 있는 모습의 그의 영정이 반겼다.
 지난 12일 간암으로 숨진 모창 가수 너훈아(본명 김갑순·57)는 ‘짝퉁 나훈아’로 살았지만 그의 삶은 진짜였다. 빈소엔 코미디언 이상용·엄용수·이용식과 트로트 가수 장윤정·박현빈이 보낸 조화가 있었다. 누군가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1994년 청량리에서 3시간 동안 사회 보시면서 선친의 회갑 잔치를 빛내주시던 고마움에 감사드리며, 하늘나라에 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패튀김, 태지나, 나운하, 니훈아, 나운아 등 다른 모창 가수들의 이름도 방명록에 있었다. 빈소엔 태지나(본명 윤찬·50)가 삼베 띠를 팔뚝에 두르고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형은 짝퉁이란 말을 진짜 싫어했어요. 인천 스탠드바에서 사회 볼 때 관객들 웃기려고 ‘짝퉁 나훈아’라고 소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 삐쳤더라고요.”
 그가 처음부터 너훈아였던 건 아니다. 충남 논산에서 농사짓고 살던 너훈아는 소 판 돈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중국집 배달부로 일하며 돈을 모았고 일이 끝나면 한강으로 달려갔다. 목청을 틔우려고 소리를 질러댔다. 1989년 본명으로 ‘명사십리’라는 음반을 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낙담한 그는 고향에 내려가 돈을 모은 뒤 다시 상경했다. 그때 수중에 7만6000원이 있었다. 밤업소에서 노래를 하다 코미디언 고(故) 김형곤을 만났다. 김형곤은 첫눈에 “나훈아랑 판박이네, 너훈아 해라”고 했다. 다른 모창 가수 ‘조영필’과 함께 무대에 섰다. 너훈아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의 강점은 얼굴이었다. 동생 김철민(46)씨는 “나운하는 경상도 출신이라 목소리가 굉장히 비슷한 반면 형님은 얼굴과 표정이 주 무기였다”고 했다.
 충무로 길거리에서 “차 한잔 하자”며 말을 걸어 결혼까지 한 아내 김근해(45)씨가 매니저 역할을 하며 23년간 살아왔다. 1990년대 초 서울 합정동에 살 때 너훈아는 옆집에서 시끄럽다고 할까 봐 장롱 속에서 노래 연습을 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위해 장롱 한 칸을 통째로 비워줬다. 빈소에서 만난 아내 김씨는 “가짜지만 진짜처럼 노래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한 달 100회 넘는 행사를 뛰었어요. 병상에 있던 작년 12월 24일에도 은평구 복지관에서 와달라고 해서 옆구리에 링거를 매달고 갔어요.” 너훈아는 그때 복지관에 가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진짜 나훈아는 이런 데 못 오잖아. 나를 보면서 대리 만족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로 된 거야.” 2008년 나훈아가 루머를 해명하며 바지를 벗어 보이려 했던 기자회견장 한구석에 너훈아도 있었다. 그는 이날 나훈아의 모습을 보고 “내가 바지를 벗고 싶었다. 나는 가짜라서 괜찮으니까”라고 가족에게 말했다. 이날 오후 5시 너훈아는 비로소 김갑순이 되어 관 속에 들어가 누웠다.
 그의 애창곡은 ‘잡초’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의/ 이름 모를 잡초’처럼 살았다. 가족은 “나훈아 이상으로 열심히 살다 갔다. 자랑스러운 남편이고 아빠였다”고 말했다.】
 
△이상만=우리 신문은 ‘한국 1세대 발레리노 이상만씨’라는 제목 아래 일곱 문장으로 다뤘다. (인물 사진과 함께). 이 기사만 보아서는 이상만씨가 ‘1세대 발레리노’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기가 어렵다.
 
 우리 기사이다.
 【‘한국 1세대 발레리노’ 이상만(사진) 리(LEE)발레단장이 8일 오후 10시37분 경기도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암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66.
 유족으로는 부인 이영희(간호사)씨와 아들 은호(대학생)·수현()씨, 딸 영란씨가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발인은 10일 오전 9시30분이다. (031)787-1509.】
 
 다음은 경향신문 기사이다.
 【1세대 발레리노 이상만씨가 8일 오후 10시37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고인이 이끌던 ‘리(LEE) 발레단’ 관계자는 “림프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엊그제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해 별세했다”고 전했다.
 194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벌예대 작곡과를 거쳐 한양대 무용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양대에서 국내 발레리노로는 처음으로 무용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임성남발레단에 입단해 활동했으며 1973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지귀의 꿈> <지젤> <코펠리아> 등의 작품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다.
 1977년에는 미국 ‘내셔널 발레 일리노이’에 입단해 국립발레단 남성 무용수로는 처음으로 외국 발레단에 진출하기도 했다. 1985년에 자신의 성을 딴 리 발레단을 창단해 <메밀꽃 필 무렵> <무녀도> <금시조> <김삿갓> 등 매년 한 편가량의 창작발레를 무대에 올려왔다.
 고인은 한창 투병 중이던 지난달 26~27일에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창작발레 <무상>(Vanity)을 무대에 올려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영희씨와 아들 은호·수현씨, 딸 영란씨가 있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9호실. 발인은 10일 오전 9시30분. (031)787-1509】
 
△김재춘=우리 신문은【‘5·16 쿠데타 주역’ 김재춘씨 별세】란 제목 아래 중요한 이력을 나열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공과를 평가하는 대목은 없다. 이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뭔가 언급을 해볼 만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5·16 쿠데타’라는 구절로 일부 가름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고인과 관련한 일화도 없다. 다른 신문보다 하루 늦은 기사이건만…. 
 
 우리 신문 기사이다.
 【5·16 군사쿠데타’ 주도세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재춘(사진) 전 중앙정보부장이 2일 오후 노환
으로 별세했다. 향년 87.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고인은 61년 5·16 당시 6관구 사령부 참모장을 지내며 박정희 소장 을 도와 쿠데타를 주도했다. 63년 2월 3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지만 내부 권력 다툼 때문에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무임소장관 등을 거쳐 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희방씨와 아들 태호(충북대 교수)·정호(영국 거주)·용호(연세대 교수)씨, 딸 혜숙씨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5일 오전 7시다. (02)2227-7550.】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이다.
 【5·16 주역이었으며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춘(金在春·87) 전 의원이 2일 별세했다.
 육사 5기 출신인 김 전 의원은 1960년 4·19 때 6관구(현 수도군단)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경무대로부터 군인들에게 실탄을 지급해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이를 거부, 명령 불복종으로 투옥돼 처벌을 받을 뻔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오히려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1961년 5·16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당시에도 6관구 참모장으로 박정희 소장을 도왔다. 당시 6관구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었다. 6관구 참모장실은 5·16 주역들이 15일 밤 10시에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행동에 착수한 곳이었다. 김 전 의원은 이후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으로 혁명 사령부 같은 장소였다”고 말한 바 있다. 육사 5기는 당시 육사 중대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인연이 있었다. 김 전 의원은 그러나 5·16 성공 직후에는 민정 이양을 강하게 주장했었다.
 그는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등 육사 8기생들과의 갈등 때문에 박정희 정권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5·16 직후에는 당시 ‘2인자’로 불리던 김종필 중정부장을 견제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 김종필 부장은 1963년 중정부장에서 밀려나 외유를 떠났다. 그때 당시 김 부장을 견제했던 육사 5기의 핵심 인물이 김 전 의원이었다. 그러나 김 전 의원도 63년 2월 중정부장을 맡았다가 5개월 만에 김형욱 부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무임소 장관으로 옮겨야 했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을 반대하다 투옥된 적도 있다. 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시 여당이던 공화당에 공천 신청을 했지만 정권 핵심 세력들의 견제로 공천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 전 의원은 민중당으로 출마, 경기도 김포·강화 지역에서 당선됐다. 그 뒤 공화당에 재입당, 9대 의원까지 지냈다.
 김 전 의원은 5·16민족상 이사장을 지내고, 98년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발을 들인 직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화해를 주선하기도 하는 등 5·16 관련 활동을 많이 했다. 김 전 의원은 최근에는 다른 전임 국가정보원장들과 함께 “국정원 기능을 축소하는 정치권 논의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중매를 섰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육 여사의 친척 오빠인 송재천씨와 친분이 있었던 인연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희방씨와 태호(충북대 교수)·혜숙·정호(영국 거주)·용호(연세대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특 1호실. 발인은 5일 오전 7시. 장지는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이다.】
  
 
■ <뉴욕타임스> 등의 사례로 본 부음 기사 스타일
 
 부음 기사도 기사이다. 인상적인 문구로 잊혀지지 않는 한겨레만의 부음 기사 스타일을 창조해볼 수 있겠다. 위키피디아 인물 검색을 하다보면 고인에 대한 추가 정보를 볼 수 있는 ‘References’란에 흔히 <뉴욕타임스> 관련 부음 기사가 링크돼 있다. 그 만큼 <뉴욕타임스> 부음 기사는 정평이 나 있다. <뉴욕타임스>에는 한 해 동안 1천여 명의부음 기사가 실리는데,부음 기사만을 모아책으로 발간하기도 한다. 주간지 <타임>에도 매주 유명인의 부음를 전하는 ‘Milestones’이란 지면이 있다.
 아래 <뉴욕타임스> 부음 기사들은 대체로 10문단 이상으로 구성된 비교적 긴 글이다. 종이신문에서는 분량 제약이 있겠지만 인터넷한겨레에선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표현하는 글도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부음 기사들은 대체로 고인이 생전에 한, 인상 깊은 말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하면서 그의 인생을 되짚어 보여준다. 고인들의 인터뷰나 관련 책, 자서전에 나오는 대목들이 곧잘 인용한다. 또 고인의 삶에서 극적인 어떤 순간을 포착해 자세히 묘사하고, 주변 인물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한 개인의 삶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자칫 이력서나 경력 나열 중심이 되기 쉬운 밋밋한부음 기사 형식을 탈피하고 있다. 아래에 <뉴욕타임스>부음기사의 패턴을 나름대로 뽑아 간추려보았다.
 
△기사 첫 문단에 고인이 인생에서 남긴 업적을 간명하고 인상 깊게 묘사한다.
 [1995년3월12일자, 도먼 치즈회사의 빅터 도먼(Victor Dorman) 회장부음 기사] =첫 문단에 【“치즈 조각 사이에 종이를 끼워 넣은 슬라이스 치즈”를 발매해 미국 치즈시장을 바꾸어놓은 도먼 치즈회사의 빅터 도먼 회장이 별세했다.】라 돼 있다. 치즈 패키징 역사에서 종이를 끼워 넣은 방식으로 미국인의 치즈 구매 방식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그의 평생의 업적으로 꼽아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기리고 있다.
 
△태어난 년도와 이력·경력 사항은 기사 중반부 이후에 쓴다.
 대다수부음기사는, 고인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내용을 기사 앞부분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고인의 삶의 특징과 업적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을 앞부분에 쓰고, 언제 태어나 어떤 경력을 거쳤는지 등 다소 딱딱하기 쉬운 내용은 중반부 이후에 쓰는 작법을 취하고 있다. 2014년 1월20일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부음 기사, 2010년 11월28일자 코믹 배우 <총알탄 사나이>의 배우 레슬리 닐슨(Leslie Nielsen)부음 기사 등 상당수가 이런 작법을 따르고 있다.
 
△고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어떤 순간이나 열정을 쏟는 대상을 포착해 자세히 묘사한다.
 
#사례1
 [2014년 1월15일자, 캔자스 범죄탐정 켄 랜드훠(Ken Landwehr)부음 기사] =1992년부터 2012년 은퇴할 때까지 위치타(Wichita)시 경찰팀에서 600여건의 살인사건 조사를 담당했는데 그의 활약상 중 가장 이목을 끈 건 연쇄 살인범 레이더(Mr. Rader)를 체포한 것이다. 기사는 레이더를 체포해 신문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레이더의 첫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랜드훠는 아직 20살도 안됐다. 1980년대 중반에 이 사건에 수사에 뛰어들어 위치타 경찰수사팀에 배속되었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살인범이 자기도취에 빠지도록 전략을 짠 인물이 바로 그다. 그는 디스크 등 증거물을 내세워 레이더를 지목하고 살인범 친척에 대한 유전자 검사도 진행했다. “나와 그가 서로를 쳐다본 첫 만남에서 레이더의 첫 마디는 ‘헬로, 미스터 랜드훠’였다. 그는 플로피 디스크 추적에 대한 경찰의 권한 범위를 자신한테 잘못 알려줬다고 벌컥 화를 냈다. ‘당신이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하고 그가 물었다. 그러자 랜드훠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단지 당신을 꼭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례2
 [2006년 5월11일자, <뉴욕타임스> 편집인 로젠탈(A. M. Rosenthal)부음 기사] =이 기사는 로젠탈이 쓴 칼럼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3년 동안 격주로 연재한 ‘On My Mind’ 칼럼 코너의 처음과 마지막 칼럼이 동일한 제목(‘제발 이 칼럼을 읽어주세요’)이다. 【그의 <뉴욕타임스> 마지막 칼럼이 저널리스트로의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요약해준다. 그는 이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칼럼니트스로서 내 자신이 당시에는 잘 깨닫지 못했으나, 편집자로서 수집한 하키 종목과 채무 관계 등을 포함해 온갖 피상적인 팩트와 정보 그 아래에 놓여 있던 어떤 것들을 나는 격정적으로 칼럼에 썼다. 가장 흔하게 빠져든 격정은 인권문제 였는데, 잘못된 것들을 스스로 바로잡겠다고 칼럼에서 약속하지는 않았다.…하지만 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할 것다. 지금 인생의 또다른 신선한 출발을 하는 시점에서 나는, 나를 미국시민으로 키워주고 대학생 통신원 신분으로 타임스에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다른 칼럼니스트들이 내가 쓴 칼럼을 보고 열등감으로 자책하도록 만들 기회를 나에게 준 신에게 감사드린다.”】
  
△고인의 생애를 언급한 관련 책이나 언론매체 인터뷰 내용을 곧잘 인용한다.
 
#사례1
 [2014년 1월15일자, 금융 폰지 사기범 매도프 사태 해결을 주도했던 연방파산법원 법관 버튼 리프랜드(Burton R. Lifland)부음 기사] =어느 금융학자가 2006년에 쓴 관련 책에서 리프랜드를 ‘파산분야의 유명인사’로 묘사했다는 대목을 언급하고 있다. 파산법관이 ‘유명인사’(celebrity)로 불린다는 대목을 통해 그의 명성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사례2
  [2014년 1월21일자, 세계적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부음 기사] =뉴욕타임스와의 과거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인터뷰할 때 아바도는 방어적인 태도로 짧게 응답하곤 했으나 때로는 많은 주제에 대해 강력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음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타임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다보면 사람들은 어떤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당신이 음악가인데 왜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는 식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이탈리아 라 스칼라에서 파시즘 반대 콘서트도 했다. 나는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으나 단순히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산당 지지 투표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소련 공산당은 여러 측면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자유를 추구할 뿐이며 자유를 부정하는 모든 것에 나는 저항한다.”】
 
#사례3
  [2014년 1월17일자, 1940·50년대 미국 인기 여배우이자 가수였던 실리아 가이스(Sheila Guyse)부음 기사] =당시 흑인 여배우로서 인종차별 장벽을 깬 점이 가이스 인생에서 주목해야할 포인트라는 사실을 인터뷰 기사 인용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1958년 MGM레코드 앨범 발표 당시 제트(Zet) 매거진이 커버스토리로 그를 다뤘다. 가이스는 당시 질병을 극복한 뒤에 찾아온 결혼 실패, 재정적 압박을 이겨내면서 밤무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그녀는 이 매거진에 “오랫동안 절망하고 낙담했으나 나에게 삶의 더 좋은 쪽이 점점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기는 끝내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1952년 제트 매거진에 실린 헤드라인은 ‘백인남편을 둔 흑인여성’이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같은 결혼이 성공하려면 지성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건 사랑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당신 스스로의 생각에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건 무시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사례4
  [2010년 11월28일자, 코믹 배우 <총알탄 사나이>의 레슬리 닐슨(Leslie Nielsen)부고 기사] =【그는 (그의 캐릭터인 흰 백발을 연상시키 듯) 1960~70년대에 머리가 더욱 하얗게 세기 시작하면서 점점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1993년에 펴낸 자서전 <Naked Truth>에서도 그의 코믹한 개성을 살려 자신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거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염문을 뿌렸다는 둥, 한때 우스꽝스런 농담중독 증세 때문에 재활치료를 받았다는 둥 코믹한 허구를 채워 넣었다.】
  
△고인의 별명이나 종사한 직업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를 언급한다.
 
#사례1
 [2014년 1월10일자, 레이건 시절 백악관 대변인 래리 스피크(Larry Speakes)부음 기사] =【그는 백악관 사무실에서 조용한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그는 당시 점점 적대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는 출입기자들의 공세를 교묘히 비켜나갔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거칠게 다루면 가시로 쏘아대는 ‘미시시피강의 메기’로 불렸다.】 그의 별명을 통해 대변인으로서 그의 삶을  간명하고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나온다. 【1988년에는 그 자신이 뉴스 거리가 되었다. 백악관을 떠난 뒤에 남긴 회고록에서 레이건이 대통령 시절에 말하지 않은 두가지 코멘트를 자의적으로 발표했다고 썼기 때문이다. 그 폭로에 백악관이 격노하면서 이에 따라 메릴린치 대변인직을 사임해야 했다. 훗날 그는 <워싱턴포스트>에 당시 지나치게 열정적이어서 대통령한테 누를 끼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는 “진실은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미국의 그라나다 군사공격 당시 국가안보국 관료의 조언에 따라 그는 ’공격은 가당치도 않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했으나 다음날 곧바로 공격이 이뤄졌다. 그는 1985년에 그때가 가장 곤란했던 때라고 술회했다. “나는 정보를 잘못 파악했고 결국 잘못된 정보를 언론에 준 격이 됐다. 우리는 비난받았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1만 가지의 말하는 방식이 있는데 ‘노 코멘트’를 제외하고 나는 9천999 가지 방식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사례2
 [2014년 1월15일자, 캔자스 범죄탐정 켄 랜드훠(Ken Landwehr)부음 기사] =【연쇄살인범 B.T.K.를 체포하는 공을 세운 랜드훠에게 위치타(Wichita)시의 시장이 별명으로 ‘딕 트레이시’(Dick Tracy·체스터 굴드의 형사 누아르 만화 ‘딕 트레이시’)를 붙였다.】 별명 하나로 그의 삶을 금방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사 끝 문단은 ‘유족으로는 누가 있다’ 식이 아니라 고인의 흥미로운 직접 코멘트로 마무리한다.
 
#사례1
  [2004년 1월20일자, 세계적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부음 기사] =기사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아바도는 요즘 미디어가 주도하고 있는 연주의 함정에 빠지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다. 객석의  커튼콜을 받고 무대를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매너에 어색해했다. 1973년 인터뷰에서 커튼콜 응답을 싫어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그렇게 해왔으나, 요즘은 관객들에게 정중하려 애쓰고 있다. 나는, 청중의 호응을 좋아한다. 청중의 반응에 무관심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내 진심이 아니다. 하지만 고개 숙여 청중한테 답례하는 게 여전히 쑥스럽다. 나는 쇼맨(showman)이 아니다.”】
 
#사례2
  [2014년 1월15일자, 금융 폰지 사기범 매도프 사태 해결을 주도했던 연방파산법원 법관 버튼 리프랜드(Burton R. Lifland)부음 기사] =기사 끝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간혹 톡 쏘는 유머감각을 보였고 법정재판에서도 비공식적인 진행을 보이기도 했다. 긴장되고 밀폐된 법원의 중재법정에서 그는 당사자들을 위해 팝콘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90년대 초 어느 기업의 파산 사건을 주재할 때 그는 파산보증인에게 ‘다시 이 기업이 회생한다면 7월4일 독립기념일 축제와 추수감사절 폭죽 퍼레이드를 이 기업이 계속 주최할 것을 돌에 새기듯이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어 자기 집 근처에 있는 해안가 위로 터지는 폭죽을 보길 원한다고 넌지시 농담을 던졌는데, 그러면서도 ‘폭죽 행사를 TV중계로 보면 될 터인데 왜 굳이 사람들이 뉴저지 쪽으로 가서 폭죽 장면을 구경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례3 [2010년 11월28일자, 코믹 배우 레슬리 닐슨(Leslie Nielsen)부고 기사] =낭만적 영웅 역할에서 코믹 배우로 전환한 그의 배우 인생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1988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닐슨은 코믹 배우로 전환한 자신의 연기자 삶에 대해 최근에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지난 연기자 생활 35년간 내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연기를 해온 게 아닌가 조금씩 회의가 들기도 했었으나 결국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역을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고인이 별세한 다음날 치에 꼭부음 기사를 실을 필요는 없다. 꼼꼼히 더 취재해 며칠 시간이 지난 뒤에도 좋은부음 기사를 생산해 제공할 수 있다.
 최근 88세로 타계한 가수이자 배우인 가이즈(Sheila Guyse)부음 기사는 <뉴욕타임스> 지난 1월17일자 종이신문(A23면)에 실렸다. 그가 사망한 날은 2013년12월28일이다. 거의 보름 후에부음기사가 실린 셈이다.
 
△연예인 및 정치인부음 관련 두 인상적인 사례
 아래는 주간지 <타임>의 2010년 12월13일자 ‘Milestones’ 코너에 실린 두 부음 기사다. 각각 4문단으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기사다.
 
#사례1 : 연예·영화배우 부음 기사
 <총알 탄 사나이> 코믹 배우 레슬리 닐슨(Leslie Nielsen)부음 기사. 이 기사는 닐슨이 등장한 1980년 영화(<Airplane!>)에 나온 농담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비행기 승무원이 “설마, 농담이겠지”(Surely, you can‘t be serious)“라고 말하자 또다른 비행기 탑승객으로 출연한 닐슨이 “농담 아니야, 나를 셜리(Shirley)라고 부르지마”라고 대꾸했다.】는 장면으로, 그저그런 농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화사에 기록된 명대사 중 하나라고 한다. 게다가 기사의 머릿글감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그가 코믹 배우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그의 연기 삶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이 기사는 320단어로 된 3단짜리 짧은 글인데, 그 안에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의 부모, 형제는 누구인지까지 넣고 있으며, 출연작품들도 그저 나열하지 않고 그의 생애와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짚고 있다. 기사 끝문장 역시 그가 남긴 유명한 농담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텔레비전 시리즈물 <Police Squad!>에서 수사팀원으로 출연한 그가 사건을 해결하자 동료가 “자 그럼 케익 한조각 먹을래”라고 권한다. 그는 “아니, 괜찮아”라고 말하고나서 곧장 케익 한조각을 덥석 문채 “벌써 먹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 짧은부음기사는 코믹 배우로서 그의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례2 : 정치인 부음 기사
 미국 자유당(Libertarian Party) 창립자 데이비드 놀란(David Nolan) 별세(66세) 기사. 그가 정치인으로서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정당 활동에서 맡은 직책이 무엇이었는지 같은 정치적 이력은 매우 짧게 다루고, 그 대신에 그가 왜 27살 젊은 시절에 미국 정치사에서 양대 정당(공화당과 민주당)이 아닌 자유당을 창설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쓰고 있다. 놀란이라는 한 정치 풍운아의 삶을 미국정치사에서 자유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 집중해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골드워터 후보 지지 대학생 모임에 참여했던 그가 청년시절에 자신의 콜로라도 집 거실에서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과 모여 새로운 정당 창당계획을 구상했던 당시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한때 건축가가 되고자 했던 그는 대신에 빌딩 건축이 아니라 정치조직 건축에 나섰다. 그는 최소 정부를 지향했으며, 당시 텔레비전에서 닉슨이 임금과 물가통제를 연설하는 끔찍한 광경을 거실에서 보고, 또 달러와 금의 태환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접하고나서 기존의 전통적인 정치 스펙트럼이 안고 있는 한계와 결핍을 절감했다. 그가 표방한 청사진은 현재 ‘놀란 차트’(정치이념성향 조사 서베이)로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져 있는데, 그의 지향점은 좌우 양쪽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놀란 차트의 두 축은 경제적 자유 및 개인적 자유로서, 1971년에 공식 출범한 자유당의 강령은 놀란의 콜로라도 집 거실에서 이미 그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사는 【(그의)개인소득세 철폐와 마약 처벌조항 삭제 주장에 대한 대중의 반감, 연방정부 지출삭감 주장이 초래한 항공관제사들의 분노(대대적인 파업) 등이 터져나오면서 그가 표방한 이데올로기와 그가 옹호하며 싸워온 가치는 황량한 폐허만을 남긴채 끝나고 말았다.】라고 그의 삶과 도전, 자유당의 실패를 분석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 부음 기사를 인터넷한겨레의 특장점 중 하나로 설정해보자.
 
 종이신문 지면에 부음 기사를 충분히 할애하기 어렵다면 인터넷한겨레에 부음 관련 카테고리를 만들어 서비스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뉴욕타임스> 온라인의 오비추어리(부고기사)란 아이템 목록은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A Moment for the Flames That Went Out in 2013 ☞마가렛 대처, 넬슨 만델라 등 2013년에 별세한, 전세계적으로 대서특필된 인물 몇몇의부음 기사 내용(관련 기사, 타임라인 이력, 동영상 등)을 한데 모아 서비스하고 있다.
△Notable Deaths of 2013 ☞인생 상담 칼럼 ‘디어 애비(Dear Abby)’로 유명한 칼럼니스트 폴린 필립스(Pauline Phillips). 나이지리아의 세계적 작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 우고 차베스 등 연도별로 그해의 주목받은 고인 목록을 따로 모아 싣고 있다. 
△The Lives They Lived ☞영화배우 제임스 갠돌피니(James Gandolfini) 등 고인이 된 사람의 공적·사적인 삶과 그들의 삶을 형성한 내밀하고 역사적이고 뜻밖의 사건들을 기념하는 사진, 비디오 자료 등을 올리는 코너다.
△The Lives They Loved ☞연간물 ‘The Lives They Lived’의 한 부분으로, 고인과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고인을 기리며 관련 사진과 이야기들을 올리는 코너다. 
△The Life and Legacy of Nelson Mandela: 1918-2013 ☞특집으로 만델라 꼭지를 구성해 독자들이 이 코너에 들어와 만델라의 일생에 관한 모든 것을 볼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Last Word Videos ☞3선 뉴욕 시장이었던 에드 코흐(Ed Koch), 노벨문학상 수상자 히니(Seamus Heaney) 등 고인들이 생전에 한 연설 등 멀티미디어 자료를 따로 모아 편집, 서비스하고 있다.
△From the Archives ☞온라인부음 기사란 맨 끝에 아카이브를 구축해 1963년에 타계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1933년에 별세한 미국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빅토리아 여왕(1901년 타계), 간디(Mohandas Gandhi, 1948년 타계) 등 세기의 인물들의 자료를 구축해 서비스하고 있다.
 덧붙여, <뉴욕타임스>는 Obituaries 코너에 ‘Paid Death Notices’ 코너를 따로 마련해 유료로 일반인들의부음를 올리기도 한다. (인터넷)한겨레부음 기사가 언젠가 이름을 얻게 되면 유료부음기사로 비즈니스에 활용할 수도 있겠다.
 
△온라인 부음 기사에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자
  <뉴욕타임스> 인터넷판 부음 기사란을 보면, 2013년8월30일 별세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히니(Seamus Heaney)가 본인 육성으로 시를 낭독하는 동영상(Seamus Heaney in His Own Voice)이 올려져 있다. <중앙일보>는부음 지면 [사람 사람]에 간혹 고인과 관련된 동영상 주소를 안내하고 있다. 2014년 1월10일치 중앙일보의 발레리나 이상만씨부음 기사는 “이씨의 관련 동영상을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고 안내하면서 링크를 표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의부음 기사란에 있는 ’Video: Last Word’를 차용한 듯하다.
 온라인 공간에서 고인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찬반 코멘트 및 댓글 달기’도 활용해볼 수 있겠다.
 <뉴욕타임스> 온라인판은 지난 1월11일 사망한 이스라엘 전 총리 새론(Ariel Sharon)의부음 기사를 별도 코너로 마련해 노출하고 있다. 이부음 기사는 ‘재임 기간에 평화를 추구한 매파’라고 뽑은 제목 아래 그 첫줄을 【유대인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민족적 요구를 단호하게 주장하고 지켜야 한다는 새론의 믿음은 비난과 찬양을 동시에 받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비판과 지지라는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별도의 코너로 배치해 독자들이 여기에 직접 참여해 코멘트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론의 생애 이력은 ‘타임라인’으로 별도로 넣어 금방 찾아볼 수 있게 해두고 있다.
  또한, 온라인부음란에서는 종이신문에 게재된부음 기사에 등장하는 년도표기나 가족 사항 등의 오류를 ‘바로잡습니다’로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뉴욕타임스>의부음 기사에도 이런 Correction이 해당부음 기사 맨 끝에 종종 달려 있다.
 
△화제성 인물의 부음 기사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좋은 창이다.  
  부음 기사 중에서 찬반 격론이 뜨거운 정치인이나 유명 음악가·배우·스포츠선수 등은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끈다. 꼭 유명하지 않더라도 화제성 인물부음 기사에는 코멘트가 매우 많이 달린다. <뉴욕타임스> 1월18일자에 실린, 2차대전 당시 일본 ‘최후의 황군’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려 30여년간 필리핀 정글 속에 숨어 지냈던 히루 오노다(Hiroo Onoda)가 91살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사에는 150여개의 코멘트가 달려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일본인의 죽음을 1월17일자 인터넷판 머릿기사로 비중 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 제안
 
△부음 기사 매뉴얼을 만들자.
 
 부음 기사의 작성 원칙과 배정 지면·분량 등을 매뉴얼로 만들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람면이 아닌 1면에 게재하는 인물의 요건은 어떤 것인지, 2면에는 어떤 비중의 인물들을 실을 것인지 원칙을 정해두는 게 좋겠다. 관련 기사는 어떤 경우에 싣는지, 분량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도 대락적으로 생각해두면 도움이 되겠다.
 이런 매뉴얼이 있으면, 돌아가신 인물 평가에서 형평성을 잃는 일을 줄일 수 있다. 그날의 지면 사정과 제작진의 판단에만 의존해 주요 인물 부음을 처리하다 보면, 어떤 인물은 너무 크고 어느 인물은 소홀하게 다루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주요 인사들의 부음 기사를 미리 준비하자
 
 고령이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인사들의 부음은 만들어 두는 게 좋다. 덩샤오핑, 만델라 같은 경우는 준비를 했던 것으로 안다. 국내외의 주요 인물은 편집국 차원에서 리스트를 만들어 담당 부서에서 작성하면 되겠다.
 국외의 유력 신문들은 사전에 부음 기사를 작성해두는 관행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20011년 숨진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1면 머리로 올린 <뉴욕타임스> 기사 작성자는 6년 전 세상을 떠난 기자였다. 2000년대 들어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건강이 악화되자 각 사들은 부음 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멜 구소 기자 역시 방대한 기사를 작성해 놓았다. 2005년 그가 암으로 숨졌지만, <뉴욕타임스>는 그의 기사와 이름을 실었다.
 
△야근 점검 체계를 재정비하자
 
 야근 상황에 나오는 부음 기사가 누락되는 경우가 있다. 사건·사고 뿐 아니라 밤 사이의 부음·인사를 제대로 챙겨야 한다. 야근자는 통신 기사를 확인할 때 부음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사로 실어야하는 부음은 담당자에게 연락해 작성하도록 한다.
 야근 때의 부음 기사는 사람면에만 출고할 게 아니라, 주요 인물인 경우 야근 데스크에게 보고해 앞쪽 면 배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비중이 있고 뉴스 가치가 있는 인물인데도, 야근 상황에서 사람면에만 배치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가신이의 발자취’ 활성화를
 
 1보에 해당하는 부음 기사 뿐 아니라, 한 인물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무미건조하게 학력·경력·가족관계를 소개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다간 이들의 언행과 공과를 되새보는 글이다.
 미국에는 ‘부음 기사 중독(Obituary Addiction)’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부음 기사를 챙겨있는 독자가 많다고 한다. 죽은 이의 인생을 통해 삶의 가치와 교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게재해 온 ‘가신이의 발자취’를 활용하면 될 것이다. 자발적인 기고나 친분에 의한 청탁 수준을 넘어서면 더 좋겠다. 글의 분량도 정해두면 들쭉날쭉해지지 않을 성싶다. 1보 기사를 잘 챙겨야겠지만, 설령 늦더라도 제대로된 오비추어리를 담는 게 중요하겠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2014. 1. 23 한겨레경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