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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간첩조작사건, 국가에게 국민은 없다.

 

한겨레

간첩조작사건, 국가에게 국민은 없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안사건 등을 보노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대적인 선거개입 정황들이 속속 밝혀졌지만 정부는 뚜렷한 대안 책이나 사과 한마디 없었다. 국정원 국정조사, 개혁 특위 등이 국회에서 개최 되었지만 아직도 그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 윤석열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사건 특별수사팀장 등이 조직에서 배제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린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청와대는 과연 국가의 본 임무를 다 하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 법원의 잇따른 부림 사건 무죄, 강기훈 씨 유서 대필사건 무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 등 이른바 ‘공안사건 무죄 판결’ 등을 살펴보면 과거에 국가 공권력이 얼마나 오·남용 되었는지 밝혀졌다. 여기다 국가정보기관·검찰의 증거 조작, 고문을 통한 증거수집 등도 드러났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70년대 군사정권이 자행한 사상검증과 불순자 색출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차 있다. 이른바 '자기검열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침 지난 17일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죄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이 있었다. 법원은 실체적 진실이 모호했던 RO조직에 대한 성격규명과 활동인원에 대해 명확한 선을 그으며 이석기 의원에 징역 12년 형을 선고했다. 국기문란이나 국토침탈에 행위에 대해 엄벌을 처해야 하는 것은 국민상식에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판결로 인해 국민의 삶과는 무관하게 반대진영에 대한 탄압과 공인몰이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집권여당의 행보를 두고 우려감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되었던 '부림사건'과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서는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불복해 상고를 결정했다. 시민단체들은 공권력의 남용에 의해 개인의 삶을 망가뜨린 사건에 대해 정부가 사과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검찰은 결국 상급심의 심판을 받기로 선택한 것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혐의로 기소된 유우성 씨 또한 1심 재판부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항소심 재판에서 검찰이 제출한 유씨의 ‘북한-중국’ 출입국 기록 등이 위조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중국 정부는 공식 회신한 문서에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과 중국간 미묘한 외교분쟁이 싹트고 있지만 이에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는 지난 2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중국 공문서가) 위조라는 답변은 영사부의 얘기다. 중국 외교부가 그렇게 얘기했느냐”며 “(중국 정부 입장에서) 이 건은 방첩사건이다. 치열한 정보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국가이익을 생각해 정치권이 이 문제는 따지지 말자”고 말했다. 정부와 집권여당은 책임전가는 물론 생뚱맞은 ‘국익론’으로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만기침란’이라는 사자성어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 핀다’는 말로써 임금(대통령)이 만사에 사사건건 개입한다는 말이다. 2014 소치 올림픽 기간 중 논란이 되었던 빙상계의 파벌이라든지, 염전노예 사건, 경주 리조트 붕괴 사건 등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비서관 회의에서 책임자 엄벌과 재발방지를 촉구하며 사심 없는 발언을 했다. 물론 국민 일상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문제점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리더의 덕목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국기문란 사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정작 리더의 자질에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조직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워진다. 결국 결정적 순간에 힘을 발휘해야 할 대통령의 리더십이 무너지기 쉽다.

 

강기훈 씨 대필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현재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기춘 대원군'으로 불리며 오늘날 한국 정치판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사건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법조인 244명과 함께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부장검사였던 강신욱 전 대법관은 2007년 박근혜 캠프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지냈다.

 

이처럼 과거 공안사건의 유력인사들은 오늘날 박근혜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거나 박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시간끌기와 책임전가를 일삼고 있다. 국가가 공권력 오·남용에 대해 반성 하지 않고 처벌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나라에 정의가 있으며, 애국이 있으며 법질서가 바로 설 수 있을까. 역사를 배우라는 말이 일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과거사를 반성하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최종환 저널리즘학연구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