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언론이 수장시킨 경험치
그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 보도에서
언론, 역할 제대로 못해
비극 반복 않기 위해선
언론 바로 세워야 해
멀쩡해 보였던 한국 경제는 1997년 11월 파산했다. 언론은 위기를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는 반성문을 썼고, 그 이후 IMF 주도의 구조개혁 전도사로 재빨리 변신했다. 정부, 대기업과 노동조합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며, 그간의 많은 장점은 한순간에 구조적 문제라는 낙인이 찍혔다. 민영화, 정리해고와 금융기관의 해외매각 등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언론 덕분이었다. 꽤나 긴 유학을 통해 비로소 “언론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개입으로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당시 위기의 주된 원인은 자본시장 자유화, 투기자본과 관련이 깊었다. 한국의 문제는 감기 정도였는데 폐렴으로 발전한 경우였다. 약을 먹거나 푹 쉬면 낫는 병이 국가부도 사태로 이어진 것은 언론의 부적절한 개입 탓이었다. 언론은 외환보유고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뿐더러 투자자를 안심시키는 대신 불안을 부추겼다. 각종 이해집단의 주장을 분별없이 보도했고 정부의 리더십을 마비시켰다. 냉정한 분석 대신 희생양 만들기에 앞장섰고, 위기는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문제를 키운 사례는 더 많다.
1994년 10월21일에는 성수대교가 내려앉았다. 직장인과 학생 수십 명이 죽었고, 언론은 절규하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내보냈다. 피해자의 사생활은 전혀 보호받지 못했고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만 높였다. 95년 4월28일에 일어난 대구 상인동 폭발사건과 같은 해 6월29일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에서도 언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피해자는 물론 가족이 제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정부 발표만 앵무새처럼 반복함으로써 정작 현장의 목소리는 전달하지 못했다. 피해자들이 정상적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는 없었다. 일단 위기를 극복한 다음에 차분하게 들여다봐야 할 책임소재 문제 역시 희생양 만들기로 변질되고 말았다. 2003년 2월18일의 대구 지하철 참사에 이어 2014년 4월16일의 세월호 침몰에서 목격하고 있는 풍경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무려 300명 가까운 이들이 실종된 상황에서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했다. 당연히 긴박감은 사라졌고, 필요한 조치는 미뤄졌으며, 판단 착오가 생겼다. 멀쩡히 구조될 수 있었던 많은 생명이 이렇게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았다. 언론은 또한 정부의 발표만 믿고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합리적 의심 앞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고 유언비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정부 내부에서는 혼선이 생겼고, 피해자 가족은 정부를 믿지 않았으며, 불신의 비용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높아졌다. 일흔에 가까운 대리 선장을 살인마로 욕하면서도 정작 저임금의 계약직 노동자에게 안전을 맡기는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 것도 언론이었다. 그 결과 구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정부의 고위층 인사는 면죄부를 받고 국민은 다시 한 번 눈앞에 있는 희생양을 대상으로 분풀이를 하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 살인자로 규정하면서 여론재판이 사법부를 대신하는 상황 역시 반복되고 있다.
재난 현장에 뛰어가 공무원을 준엄하게 꾸짖는 대통령의 모습은 감격스럽다. 그러나 공무원의 부모는 대통령 자신이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권력이 존재하는 한 아랫사람의 모든 허물은 윗사람과 무관하지 않다. 언론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언론을 비판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봄의 무거움과 엄중한 경고 앞에서 침묵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언론은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재난을 통해 공동체가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길은 결국 언론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14. 04. 30.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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