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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울면서 마속을 베다

나라 기강 잡기 위해


제갈공명은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


박근혜정부가 모르쇠


하지않아야 할 역사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화자찬과 달리 인간은 그렇게 똑똑한 존재가 아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도 자기 분야를 벗어나면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오류는 일상적이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에 제약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는 만큼만 받아들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직접 경험을 하거나 특별히 잘 아는 문제가 아니면 언론이 제공하는 특정한 논리적 얼개(프레임)를 좇는 경향도 강하다. 약소국에 대한 금융시장 개방을 ‘자본자유화’로 부르거나 이라크 전쟁을 ‘민주화 작전’으로 이름 붙이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자본자유화를 반대하면 자본통제를 찬성하는 사람이 되고 민주화 작전을 반대하면 독재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몰리기 때문에 프레임은 격렬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에서도 프레임은 예외없이 그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국정원 여직원을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은 ‘인권유린’과 ‘국기문란’이라는 상반된 프레임을 적용하기 위해 공방했다. ‘공정한 선거’와 ‘인권’ 모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였다. 경찰의 중간보고를 통해 당시 사건은 ‘인권유린’으로 규정되었고 야당은 그 값을 치렀다. 민주당은 딸 같은 어린 여자를 정치공방에 이용하려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렸다. 50대 이상의 유권자가 압도적으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데는 딸 가진 부모의 동정심이 한 몫을 했다. 전체 그림을 보기에는 너무 분주하고 또 아는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 역시 이 프레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딴 프레임이라고 하기엔 대선 토론이 끝난 직후인 밤 11시의 중간발표가 너무 뜬금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담론이 프레임 형성과 무관했다면 애초에 국정원이 댓글을 다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주에 발표된 검찰 수사 결과로 프레임 전쟁은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국정원은 총선과 대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의 중간발표도 조작되었고 경찰 윗선에서 수사에 개입한 증거도 드러났다. 국정원, 경찰과 여당이 이와 관련해 사전에 합의를 했다는 정황 증거도 제기되었다. 국정원 여직원은 이제 인권을 유린당한 불쌍한 딸이 아니라 공정선거라는 민주주의 근간을 짓밟은 공권력의 하수인으로 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재발 방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둘러싼 논란이 꼬리를 문다.


국민은 벌써부터 군부독재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동원했던 온갖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다. 물리적으로 죽고 죽이는 권력투쟁을 평화적으로 제도화시킨 선거가 부정되면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재현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생긴다. 박근혜 대통령을 찍지 않았던 49%의 국민이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이 인정할 수 없는 게임을 통해 집권한 리더가 앞으로 국정을 어떻게 끌고 갈지 걱정이 앞선다. 민주화 이후 사라졌던 대학생의 시국선언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제갈공명은 울었다. 삼국통일을 위해서는 마속과 같은 뛰어난 장수가 너무도 필요했다. 국가의 대계를 위해서는 마속을 베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군대의 기강이 서지 않을 때 초래될 후폭풍은 너무도 엄청났다. 당장 목을 안 베는 것이 아니라 못 베는 것이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공명의 숨은 지시에 따랐기 때문에 혹은 친구의 아들이라서 면죄부를 받았다는 소문도 우려된다. 마속의 전례를 내세우며 다른 장수들이 동일한 대우를 요구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무엇보다 군령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본 장병들이 목숨을 던져 적군과 싸우지 않을 것 같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공명은 마속의 목을 베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이 모르쇠 하지 않아야 할 역사의 한 장면이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영남일보 2013.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