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섭(朴基燮) 시인은 대구 달성 출신이다. 그의 작품 중 <잔치는 끝나고>에는“가마솥 모은 자리 상기도 남은 불씨// 깨어진 옹기쪽이 그제사 눈에 들고//뒷마당 섭섭한 터에 산그늘만 짙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지난 대선의 승리를 한껏 자축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문득 이 시를 떠올린다.
대구경북은 지난 15년 동안 박 당선인의 든든한 정치적 고향이었다. 대통령이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그를 바라보는 지역민이 자부심과 기대감을 갖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당선 축하 현수막과 마을회관의 만세삼창에서 그 마음을 잘 엿볼 수 있다. 제2의 박근혜를 키우고, 지역 숙원 사업을 풀고, 대구의 영광을 다시 찾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 역시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모든 잔치는 그러나 기회비용이 있다. 잔치의 흥에 겨워 깨트린‘옹기쪽’은 없는지 미처 챙기지 못한‘산그늘’은 어디인지를 반성할 책임도 따른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 후보는 대구에서 80.1%를 얻었다. 2002년 대선의 77.8%라는 최고 득표율을 가볍게 넘었다. 광주와 호남의 90%에는 못 미치지만 몰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영남지역 유권자는 1,000만 명이 넘고 호남은 겨우 400만 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전혀 밑질 게 없다는 이기적인 ‘계산속’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까? 잔치를 돌아보면서 당장 눈에 띄는 불편한 진실이다.
지난 대선의 투표와 그 이후의 축제를 통해 우리는 시대정신을 외면했다. MBC와 YTN 등의 해직 언론인은 물론 언론자유의 후퇴에 대해 침묵했다. 공정한 게임을 원하는 노동자와 남북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좌빨’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남들은 21세기에 사는데 우리만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구 출신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갈 우리의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제 멋에 취해 돌아보지 못했던 그늘이다. 물론 냉정한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항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벌써 천 삼백년 전 원효대사는 우리와 다른 길을 걸었다.
고위 공직자의 아들이었던 원효는 촉망받던 화랑이었다. 전쟁에서 죽은 친구의 복수를 꿈꾸던 중 적군 역시 똑같이 고통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출가했다. 당나라로 유학길에 나섰던 그는 전쟁 난민의 참상과 분열을 목격한 후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 승려가 누렸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채 25년 이상을 백제 부흥의 본산이었던 변산반도에 머물렀다. 화쟁(和爭)사상으로 알려진 그의 설법을 통해 물리적인 삼국통일을 넘어선 정신적인 구심점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상황과 2013년 지금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그의 행적은 많은 교훈을 준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기득권 버리기다. 당시 최고의 석학이면서 명사였던 원효는 승자의 영광 대신 패자의 아픔을 선택했다. 전쟁에서 이긴 신라가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대신 삼국은 평등하다고 말했다. 관용을 의미하는 똘레랑스([tolerance)의 정신도 큰 가르침이다. 파격(破格)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형식을 거부했다. 종교, 이념과 신분의 차이는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가르쳤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처받은 자들에 대한 힐링(healing)이라는 것도 그의 교훈이다. 점령군에 속했던 그는 피점령지의 난민과 살았다. 그들의 원망과 아픔을 경청했고 같이 통곡했고 위로했다.
영남의 정신적 지주 퇴계 이황은 "모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악이다"고 했다. 2013년 계사년 새해를 맞아 우리에게 주어진 화두다. 모두가 제대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영남일보 20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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