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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국민TV의 조건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의 원래 제목은 "의미를 갈망하는 인간"이다. 나찌 수용소의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인간에게 있어 명예, 권력,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갈 이유'라고 말한다. 크리스마스나 새해가 지난 직후에는 유독 많은 수용자들이 죽었는데 그는 그 이유를 자유로운 몸이 되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무너진 것에서 찾았다.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이지만 삶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할 때 희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제18대 대선은 각별했다. 명백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유, 평등, 소통과 같은 시대정신이 배반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근거없는 낙관이 너무 많았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었기 때문에 충격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진정될 줄 몰랐다. 영남의 인구는 1,000만 명이 넘고 호남은 400만에 불과한 현실에서 지역주의가 부활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절망했다. 검찰, 경찰, 국정원과 수구 언론 등이 똘똘뭉쳐 지키고 있는 기득권은 난공불락으로 보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치였고 "이제 더 이상은 길이 없다"는 체념이 앞섰다.

 

낙하산 인사에 포획된 공영방송, 종편으로 무장한 보수신문, 생존의 경쟁 앞에서 정파성에 내몰린 기성 언론에 절망했던 국민에게 <나꼼수>는 희망이었다. 카타르시스였다. 해직 언론인이 주도가 되어 1주일에 한번씩 찾아온 <뉴스타파>라는 방송도 신선했다. 대선 직후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TV'를 추진한다는 뉴스는 그래서 희망의 단비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별은 더 빛난다"는 말처럼 국민방송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자칫 무모한 망상일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이중의 좌절을 안길 수도 있다. 제대로 된 희망을 위해 굳이 조건을 다는 까닭이다.

 

대선 결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그 첫번 째 조건이다. 국민은 왜 새누리당을 택했을까? 집단지성을 통한 합리적 선택일까 아니면 대중적 조작에 의한 왜곡된 선택일까? 대구와 경북 지역의 몰표와 충청도 및 50대 이상의 투표가 과연 공정하지 못한 보도 또는 진실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때문일까? 정치적 계산 혹은 야권에 대한 불신 등이 더 큰 원인은 아니었을까? 정파성, 자사이기주의, 상업주의 등으로 인해 언론 전체에 대한 불신감이 누적된 결과 언론은 주변적인 요인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저널리즘 전반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경우 지금 필요한 작업은 다른 대안 언론을 모색하는 작업이 아니라 저널리즘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아닐까? 대안학교의 장점에만 주목함으로써 제도권 교육이 갖는 긍정적 기능 조차도 부정하는 것과 유사한 오류일 가능성은 또한 없을까? 국민TV를 추진하기에 앞서 제기해야 할 질문들이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미디어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도 고민해야 할 조건이다. 물론 50대 이상 연령대에 있어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과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국내 공영방송에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와 같은 수준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복합 플랫폼이 들어서고 이동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점에 그러나 굳이 TV라는 특정 플랫폼에 투자하는 것은 효율성에서 문제가 있다. 정부가 신설 보도채널을 허용할 이유도 없고 민간 기부만으로 상당한 규모의 운영 자금을 확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IPTV 등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채널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허핑턴포스트나 프로퍼브리카 등에서 보듯 영향력과 신뢰도는 ' 플랫폼'이 아니라 '콘텐츠'와 독자의 '참여'에 의해 좌우된다. 뉴욕타임스와 CNN과 같은 거대 언론사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양질의 고비용 콘텐츠를 국민TV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콘텐츠 경쟁력도, 접근성도, 상호작용성도 떨어지는 매체가 과연 좋은 대응전략일 수 있을까?

 

매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미국과 유럽에서 비영리언론이 가능한 이유는 '상업모델'의 한계로 인해 민주주의에 꼭 필요한 양질의 정보 제공 및 환경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대다수의 비영리 언론사는 또 정치적 색깔을 배제하고 공동체의 보편적 이해관계에 집중한다. 보다 평등하고, 자유롭고, 투명하고, 정의롭고, 조화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지역공동체와 밀착해 있기 때문에 대기업은 물론 보수단체와 보수적인 시민도 자발적으로 쉽게 동참할 수 있다. 지역밀착형도 아니고, 재벌과 정부 등 기득권과 대립하고, 약자를 대변하고자 하는 국민TV가 과연 이런 전략을 추구할 수 있을까? 공동체 전체의 자산이 아닌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라는 편견이 있는 상황에서 운영에 필요한 적절한 규모의 시청자와 기부금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까? 국민TV가 충족시켜야 할 또 다른 조건이다.

 

물론 국민TV의 구체적인 진로는 아직까지 결정된 게 없다. 정체성은 물론 재원과 목적 등에 있어 다양한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된 상황이다. 동일한 비영리 모델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 경험이나 시민사회의 성숙도 측면에서 미국과 유럽은 한국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특정 집단이 정치, 경제, 언론 및 문화와 종교까지 모두 독차지 하는 담론복합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상황은 이들과 많이 다르다. 국민TV와 같은 한국적 대안언론 논의가 제기되는 까닭이다. 지금껏 알려진 국민TV는 그러나 앞서 제기된 필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절망의 크기를 감안할 때 설익은 희망이라도 필요한 때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제대로 된 희망을 위해서는 뜨거운 가슴만큼이나 차가운 머리도 필요하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13.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