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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글로벌 뉴스 전쟁, 배경과 현황


언론은 국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분주하다.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린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에서 의미 있는 교훈을 얻지 못하고 성찰을 통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지 못한다. 멀리는 병자호란과 한일합방과 같은 불행한 역사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고 가깝게는 6.25전쟁과 외환위기 등에 대한 복기(復棋) 과정이 없었다. 정작 이해당사자인 우리는 외면하는 가운데 외국 학자와 전문가들만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들의 진단과 해석은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었고 그 상식을 토대로 현재를 살아간다.


과연 우리 중에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 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다”고 했던 정부의 발표는 정말 잘못된 것일까?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구조조정 및 노동유연성 정책 등은 과연 옳았던 것일까? 당시 미국계와 영국계 언론은 왜 한국의 경제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보도로 일관했을까? 국내 언론이 한국 정부의 말만 믿고 위기 경보에 소홀했다는 소위 “내 탓이오” 반성은 정당했을까?


2003년 이라크 전쟁, 2011년 가다피 정권의 붕괴, 2012년 시리아 사태, 2013년 북한의 핵실험 등에 대한 외신의 보도는 전혀 동일하지 않다. 객관적인 제3자를 표방하지만 이들의 보도는 자국의 대외정책에 따라, 자사의 입장에 따라, 취재하는 기자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와 아랍 언론의 보도는 때로 정반대의 관점을 갖기도 한다. 관점의 차이는 사실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라 취사선택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진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게다가 언론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학교와 마찬가지로 언론은 시민 교육에 참여한다. 3.1절이나 광복절과 같은 국가 기념일은 언론의 단골메뉴로 이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단정체성이 형성된다. 국내의 다양한 갈등에 대한 보도에 있어서는 공정한 제3자의 역할을 요구받지만 올림픽이나 전쟁과 같은 특수상황에서는 ‘애국심’을 발휘해야 한다. 역사 교과서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 아닌 것처럼 언론이 국적(國籍)을 초월한 주제와 관점을 택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특파원을 직접 파견하지 않고도 현지인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특파원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일본의 관점에서 필요한 정보와 중국의 관점에서 놓칠 수 없는 정보는 다르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보도에 있어서도 국내 언론과 외신의 입장은 다르다.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가 동일한 강도와 관점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국가 간 경쟁과 협력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국가이익을 완전히 무시하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보도는 오히려 비정상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 언론은 그 점을 놓쳤지만 2008년 미국 경제위기에서 미국 언론은 이 점을 인정했다. 권력의 남용과 보편적 가치의 훼손에 대한 엄격한 감시자면서 동시에 국가공동체의 번영과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언론의 이중성은 그래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와 저널리즘

 

지난 2008년 가을 한국은 제2의 외환위기설에 시달렸다. 2008년 8월을 고비로 외국인의 국내 주식, 채권 및 원화에 대한 매도 강도는 높아지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보유한 8조원 규모의 채권 만기일이 9월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 자금이 일시에 한국을 빠져나감에 따라 환율과 금리가 급등하고, 외환시장의 단기 유동성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2008년 한국 경제의 건전성은 1997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된 상태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2008년 9월 기준으로 외환보유액은 2,396억불로 1997년의 8배에 달했고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의 비중도 1997년의 264%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68.1%에 불과했지만 금융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만 브라더스 (Liman Brothers)가 파산한 9월 15일 이후 국내 금융시장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외국인들의 대규모 투자금 회수와 더불어 달러사재기와 역외 투기세력이 결합되면서 환율은 1,600원까지 상승했다. 1997년 가을에 있었던 것처럼 정부는 “한국 경제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외신의 부정적 보도를 비판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마침내 2009년 3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런던에서 ‘한국경제의 진실’을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했고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를 비롯해 이코노미스트와 로이터 등을 직접 방문해 협조를 구했다.


 국제사회의 ‘공감과 동의’(hearts & minds)를 얻지 못하면 국가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그렇다면 왜 국제사회의 여론이 이렇게 중요해졌으며 어떻게 해야 우호적 여론과 호감을 확보할 수 있을까?


군부독재 시절, 대한민국의 주요 대내외 정책에 있어 국민 여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엘리트와 전문가 집단이 정책을 결정했고 국민은 순응했다.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다. 정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없었으며, 무관심했고, 무지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비로소 국민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권력에서 독립한 언론은 그간 금기시되었던 많은 주제를 다루었고, 국민은 이를 토대로 여론을 형성했고 정책담당자를 압박했다. 정치권을 비롯한 권력집단을 감시하고 정치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 개입은 인터넷 혁명을 통해 더욱 증가했다.


과거의 수동적이고 무식했던 국민은 이제 많지 않다. 주류 언론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했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블로그와 대안매체를 통해 직접 대화에 나섰다. 정치인의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자금과 조직을 공유함으로써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참여연대가 주도했던 일부 정치인에 대한 낙선운동과 광화문 촛불시위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강제와 억압으로 대표되는 경성권력(hard power)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연성권력(soft power)을 통한 회유와 설득이 더욱 중요해진 것은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2010년 12월 17일. 모하매드 부아지(Mohamed Bouazizi)는 경찰의 차별에 항의해 분신했다. 그 사건은 페이스북을 통해 전 세계로 전달되었고 튀니지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은 이렇게 시작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컴퓨터 전문가들이 2003년 세운 온라인 공동체 어나니머스(Anonymous) 역시 변화한 국제사회를 잘 보여준다. 2009년 4월 이들은 저작권 법안을 지지했던 국제포르노협회를 대상으로 디도스 공격을 실시했고 2011년에는 미국 의회가 입안했던 온라인 저작권 침해 방지법(SOPA)에 항의해 FBI, 법무부, CIA 홈페이지를 일시적으로 폐쇄시키기도 했다. 2012년 3월에는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를 통해 CIA 자회사인 스트랫포(Stratfor)의 비밀 이메일을 공개했다.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미군 헬기가 바그다드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알렸고 그 이후에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한 추한 진실을 꾸준히 폭로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평가받는 미국조차도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있으면서 인터넷과 스마트 미디어를 통해 언제든지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이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2001년 9.11 테러에서 목격하듯 국가가 아닌 일개 조직도 초강대국인 미국에 물리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이라크 전에 참전했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수상이 결국 재신임에 실패하는 것을 통해서 보듯 대외정책에 있어 국민은 더 이상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다. 24시간 위성방송과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전문적 외교관에 의한 정보통제와 지식독점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위기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파급되고, 중국의 황사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글로벌 문제도 꾸준히 증가했다. “국제사회 대중의 요구를 이해하고, 자국의 관점을 제시하고, 자국과 국민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 국제사회의 공통된 대의에 참여하고 리더십을 키우는” 공공외교가 각광을 받는 이유다(Leonard, 2002).


공공외교는 미디어를 활용하는 전략을 포함해 문화원 개설과 인적교류 등 보다 포괄적인 활동이다. 그럼에도 다른 국가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정부 주도의 프로그램에서 영화, 출판물, TV와 라디오 등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흑색선전(propaganda)은 1950년 대 냉전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가령, 소련은 1948년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시작한 이래, 1956년에는 헝가리로, 1968년에는 체코로 그 활동을 확대했다. 유럽의 민주화를 지원하고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미국의 프로파간다는 1950년‘진실 캠페인'(Campaign for Truth)을 시작으로 1949년과 1953년 라디오자유유럽(Radio Free Europe)과 자유라디오(Radio Liberty) 등으로 이어졌다. 언론을 통한 공공외교는 이로 인해 'PR 로비, 진실 프로파간다, 또는 은밀한 프로파간다'로 불리기도 한다. '미국의 소리'(VOA), 유럽자유라디오(RFE), 알 후라(Al Hurra) 등은 미국 국무부가 관리하는 언론사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허위정보 또는 윤색정보를 적극 활용하는 프로파간다와 진실성과 균형성을 통해 합리적 설득에 주력하는 공공외교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모든 정보에 대한 공개적인 검증이 가능하고 다양한 채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일방적인 관점이나 생각을 강요하거나, 대안적인 시각을 차단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다.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한 양질의 담론을 통해 공감과 동의를 얻고자 하는 뉴스 전쟁은 그래서 등장했다.

 

24시간 영어채널과 저널리즘 외교의 현장


비동맹운동(Non Aligned Movement)은 미국과 소련 그 어느 진영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던 알제리, 튀니지, 인도네시아, 유고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1970년대 후반 이들은 국제정보가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약소국에 대한 뉴스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냉소를 부추기며, 국제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했다. 보다“자유롭고 균형 잡힌 정보의 흐름”을 촉구했던‘신국제정보질서’(New International Information Order) 운동은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국가 이미지 개선, 국제투자 자금의 유치, 우수한 인력의 확보 및 문화상품의 수출 등에서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효율적인 발신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이들 국가들은 고스란히 불이익을 감수해 왔다. 불공정한 국제정보질서를 바꾸려는 노력은 디지털 혁명을 계기로 가속화 되고 있다.


1999년 출범한 중동의 알자지라 방송은 2001년 9.11 테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글로벌 매체로 성장했다. 2000년에는 아시아의 목소리를 국제사회로 전달하기 위해 씨엔에이(Channel News Asia)가 싱가포르에서 시작되었고, 중국에서도 24시간 영어채널인 씨씨티브(CCTV News)가 출범했다. 미국의 정보 주도권에 대항하기 위한 노력은 France 24(프랑스), Russia Today(러시아), Telesur(남미연합) 등으로 이어졌다. 2007년에는 이란의 Press TV가 개국을 했고, 중국은 2010년 또 다른 24시간 영어채널인 CNC World를 출범시켰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텔레수르의 목적은 “우리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가 가진 문제에 대해 우리식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 프랑스의 자크 시락 대통령 역시 “프랑스의 눈으로 국제뉴스를 발굴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France 24와 같은 매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뉴스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매체는 다음의 <표1>에 나오는 것처럼 비교적 많다. 그 중에서 글로벌 권역을 갖고 있는 BBC와 블룸버그 등은 위성의 송출 범위가 지구 전체를 포함하며 케이블 방송, 인터넷과 스마트 미디어 등을 통해 각 가정에 도달한다.

 


 글로벌 전체에 도달하고 있는 매체는 모두 미국과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미국의 CNN은 1985년 인텔셋을 통해 처음으로 글로벌 방송을 시작했고, 1991년 걸프전 이후 중남미와 아시아 전역으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영국의 BBC World는 CNN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1991년 3월 11일 출범했다. FOX 뉴스는 1996년 10월 7일 설립했고, 2001년 9/11 사태 이후 급성장했다. 선정적이고 보수적인 보도로 잘 알려진 이 채널은 현재 유에스에이네트워크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시청률이 높은 케이블 방송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제뉴스 분야에서 경제뉴스는 1980년대 이래 꾸준히 증가했다. 글로벌 사회에 도달하는 5대 매체 중 2개가 경제전문 매체라는 것도 이러한 추세를 잘 반영한다.


블룸버그 TV는 1981년 설립되었으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글로벌 매체로 성장했다. 뉴욕, 런던과 홍콩에 각각 본사를 두고 있는 이 매체는 현재 2억 이상의 가정과 기업체에 금융 및 비즈니스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 엔비씨(NBC) 유니버설이 소유하고 있는 씨엔비씨(CNBC)는 '소비자 뉴스와 비즈니스 채널'(the Consumer News and Business Channel)을 줄인 말이다. 1989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꾼 이 채널은 1991년 파이난스 뉴스 네트워크(Finance News Network)를 인수함으로써 대폭 성장했고, 2009년 현재 3억 9천만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영역을 점차 확대하는 매체도 많다. 유럽 최초의 24시간 뉴스 채널로 알려진 스카이 뉴스(Sky News)의 서비스 제공 권역은 유럽과 아시아이며, 프랑스24는 유럽은 물론 동유럽,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을 포괄한다.

 

2005년 출범한 러시아투데이의 서비스 제공 지역도 유럽, 동유럽과 중동이고, 동일 지역에서 경쟁하고 있는 도이치벨도 2004년 기준으로 이미 2억 이상의 가정에 도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1999년과 2010년 각각 등장한 중국의 씨씨티브와 씨엔씨월드는 동아시아, 북미, 유럽, 동유럽,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등에 도달하고 있으며, 1988년 시작된 인도의 엔디티브(NDTV 24x7)는 서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아프리카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PTV는 세계 도처에 있는 파키스탄 국민을 위한 방송으로 인도, 중동, 중앙아시아, 일부 동남아 국가 등 30개 국가에서 시청이 가능하다. 그 밖에, 일본의 NHK World는 동아시아, 북미와 유럽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씨엔에이는 동아시아, 서남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가정을 목표층으로 공략하고 있다.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이지만 자국 시장이 충분히 큰 경우 국내 시청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엠스엔비씨(MSNBC), 캐나다의 씨비씨(CBC) 뉴스월드, 인도의 두어다샨뉴스(Doordarshan News), 헤드라인투데이(Headline Today), 다운뉴스(Dawn News) 등이 있다.

 

뉴스 전쟁과 역사적 교훈

 

2011년 3월 8일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은 상원연설을 통해 “미국은 정보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말했다. 저널리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뉴스 전쟁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2년 발발한 시리아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이 자국의 24시간 영어채널로 국제적 여론 전쟁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는 공공외교에 연간 90억불을 투자하고 있으며 국제뉴스 부분에 쏟아 붓는 비용만 해도 10억불이 넘는다(Hall & Smith, 2013). 2010년 가다피의 축출과 뒤이은 아랍 민주화 과정에서 카다르 왕족이 후원하는 알자지라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미군 기지가 있는 중동의 작은 왕족 국가에 불과한 카타르의 외교적 역량은 이 매체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


뉴스 전쟁이 공공외교에 있어 얼마나 큰 효과를 내고 있는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인터넷을 비롯해 트위터, 구글과 아이폰 등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고품격 저널리즘을 통한 ‘공감과 동의’ 경쟁이 올바른 전략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정부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인해 자율성이 훼손되고 결과적으로 신뢰를 잃고 있는 알 자지라와 텔레수르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면서 공공외교 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국제적 영향력 경쟁에 있어 저널리즘 외교를 통한 공감대 형성과 우호적 여론의 확보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의 발간사에는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 즉, 혹 편벽된 말만 믿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하고 ... 외국 사정도 조선 인민을 위하여 간간히 기록할 터이니 그걸 인연하여 외국은 가지 못하더라도 조선 인민이 외국 사정도 알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불행히도 당시의 시도는 실패했다. 조선의 목소리는 국제사회로 전달되지 못했고 국제사회의 변화를 조선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2013년 한국은 세계 10대 경재대국으로 성장했지만 뉴스 전쟁과 국제뉴스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하다.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칭 Korea 24와 같은 영어뉴스 채널을 설립하고 담론경쟁에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성해 (2011) 디지털 혁명과 미디어 외교: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의 현황과 시사점을 중심으로, <한국언론학회> 세미나 발제문

김성해·강국진 (2009) 『국가의 품격과 저널리즘 외교』한국언론재단 연구서.

Hall, I. & Smith, F. (2013) 'The Struggle for Soft Power in Asia: Public Diplomacy and Regional Competition, Asian Security 5:1

Leonard, M.(2002). Public Diplomacy, London: Foreign Policy Centre. 유재웅외 역(2008).『이미지 외교』. 서울: 한나래.

Walt, S. M. (2005) Taming American Power: The Global Response to U.S. Primacy. Boston: Norton Books.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신문과 방송> 3월 호 게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