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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이들 학생 자살의 책임은 사회 모두가 함께 져야 따뜻한 사회 만들어"


대구의 2월은 울고 있다. 봄은 아직도 먼데 그들은 이른 새벽을 깨고 죽음으로 향했다. 또래 언니와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던 그 아침,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고독했다. 국민행복 시대에 대한 약속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세상이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희망도 없었고 분노도 없었다. 2013년 2월24일 새벽 5시. 그들은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것 같지도 않다.


모질고 무섭다. 미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하고 떠난 어린 학생을 대하는 대구의 태도가 그렇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이들에 대한 위로의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 자살률이 너무 높다고 하면 대구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핀잔을 준다. 통계가 왜곡된 것으로, 대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과장을 한다는 그럴 듯한 음모론도 나온다. 너무 편하게 키워서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고 정작 떠난 이들을 꾸짖는다. 제 목숨을 끊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고독한 여정인지는 생각지 않고 손쉬운 희생양만 찾는다. 우울증, 어려운 가정환경, 성적비관, 학내 폭력 등 뻔한 얘기만 반복한다. 제 꿈 한번 활짝 펴보지 못한 채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났는지, 우리가 행여 도와줄 것은 없었는지 묻지 않았다. 메아쿨파(내 탓이오)라는 참회 대신 많은 진실을 외면했다.


대구 학생이 유독 많이 자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생에게 가혹한 도시라는 것은 틀리지 않다.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보충수업과 심야자습은 필수다. 방학도 없다. 편하게 책이라도 읽고 지친 영혼을 달래줄 도서관은 턱없이 부족하다.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멍든 가슴속 얘기를 들어줄 선생도 없다. 다른 도시에서는 모두 포기한 경전철에 몇 천억씩 쏟아부으면서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변변한 문화공간은 없다.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치마가 조금만 짧아도, 세상의 표준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서울, 경기, 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 당연하게 인정되는 학생인권조례조차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한 모든 일은 어른이 결정하고 학생의 의견을 묻지도 않는다. 대화와 토론은 억압되고 침묵과 순종은 미덕이 된다.


문제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가정이 있고 문제 사회가 있다. 염치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고 제 잇속을 위해 양심은 팽개치는 TK 출신 엘리트는 대구가 길렀다. 공부만 잘 하면 인간성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었고 자기만 살면 된다고 가르쳤다. 다른 지역 사람이 뭐라고 해도 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제 하고픈 말만 했다. 아무리 몹쓸 짓을 해도 내 식구면 무조건 감쌌다. 권위만 앞세우고 위로는 뒷전이었다. 편하게 대화할 상대, 갑갑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고 제 의견이 존중받지도 않는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자기보다 강한 어른에게 화를 내는 대신 또래와 후배를 대상으로 폭력을 쏟아냈다. 친구의 고통을 통해 제 상처를 대신 달랬다. 부당한 세상에 저항하는 마지막 방법으로 제 목숨을 던졌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대구 학생의 눈물에서 자유로울 대구 어른은 없다. 대구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대구의 명예를 되찾고, 학생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는 위선도 이제는 벗자. 도서관 대신 기숙사를 짓고, 문화시설 대신 육상경기장을 세우고, 그 흔한 상담센터 하나 제대로 못 갖추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자. 단 한번이라도 우리 아이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봤는지, 말 못할 고민을 함께 풀려고 노력했는지, 그래도 세상은 따뜻하고 살아갈 만한 이유가 있다고 행동으로 보여줬는지 돌아보자. 죽음의 굿판을 걷어낼 당사자는 아이들이 아니라 이 게임을 만들고 강요하는 우리 자신이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