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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유럽 핵폭탄’을 껴안은 英

'유럽'이라는 핵폭탄이 의회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을 겨냥해 날아가고 있다. 이 폭탄은 테러리스트가 제조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영국의 집권당인 보수당이 유럽 통합을 두고 갈등을 겪으면서 만들어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 폭탄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고, 독일 같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은 물론이고 동맹국 미국도 영국의 이런 내분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EU에서 하루빨리 탈퇴하자는 폭탄은 유로존 재정위기가 도화선이 되었다. 단일화폐 유로를 채택하지 않은 영국은 유럽통합에 지극히 실리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2010년 그리스의 구제금융에서 비롯된 유로존 재정위기는 이런 실리적인 입장을 크게 바꾸게 했다. 영국 수출의 50% 정도가 EU 회원국으로 나가고 많은 영국 기업도 독일이나 프랑스 등 다른 EU 회원국에 진출했다. 그런데 유로존 위기 극복이 더디게 진전되고 유로존 붕괴까지 공공연히 거론되면서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은 고민에 빠졌다. 차제에 아예 발을 빼야 하나, 아니면 사태를 면밀하게 주시하면서 유로존의 위기 해결이 가닥을 잡아가면 그때 결정을 내려야 하나? 영국의 금융서비스 산업을 의미하는 '더시티'나 파이낸셜타임스(FT)지 수석 경제평론가인 마틴 울프 같은 지식인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보수당의 의원 가운데 3분의 1은 정반대로 이때다 싶어 EU 탈퇴라는 칼을 빼들었다.


 이런 유럽통합 회의론자들은 자랑스러운 주권국가의 주권을 빼앗아간 '브뤼셀'의 EU기구로부터 노동정책이나 사회정책 같은 정책권한을 다시 환수해 와야 하고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결국 캐머런 총리는 지난 1월 말 이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그는 2015년 상반기 예정된 총선에서 보수당이 집권하면 정책 권한의 일부 환수를 포함해 EU와 관계를 재설정하는 협상을 한 후 EU 탈퇴냐 잔류냐를 묻는 국민투표를 2017년 안에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로존 위기 해결을 이끌어온 독일은 최소한 경제정책에선 자유무역을 선호하고 친미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영국과 일정 부분 협력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독일은 유로존 위기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기극복책을 비난하면서 내분을 겪고 있는 영국의 보수당을 보면서 착잡하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영국이 EU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강화하는 것임을 캐머런 총리에게 주지시켰다. 세계화나 환경문제 등 강대국조차 혼자 대처하지 못하는 글로벌 이슈를 EU는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줘왔다. 그런데 아직도 강대국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섣불리 EU 탈퇴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와 30㎞밖에 떨어지지 않은 영국의 도버해협에 자욱하게 낀 안개는 언제 걷힐까.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파이낸셜뉴스 2013.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