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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3D 프린터가 빚어내는 '제3차 산업혁명'

1986년 개봉한 영화 플라이(The Fly)는 ‘공간이동’이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뤘다. 원리는 물체를 원자로 분해해서 전송한 뒤 멀리서 재조립하는 것. 영화에서 천재 과학자 세스 브런들은 자신의 발명품을 실험해 보다 우연히 장치안에 날아 든 파리의 유전자와 뒤섞여 전송되는 바람에 파리인간이 되고 만다.


영화의 공간이동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기술이 실재한다. 바로 3차원 입체(3D) 프린터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이 입체프린터로 격발이 되는 권총을 복제해 논란이 됐다. 국내 한 종합병원은 바로 뒤 이 프린터로 인공뼈를 만들어서 암수술의 부작용을 최소화했다는 소식도 나왔다.


3D 프린터로 복제한 권총을 발사해 보고 있다                                                   (BBC 누리집) 


영화에선 비극이었지만 현실의 공간이동에는 큰 희망을 거는 사람이 많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 초 국정연설에서 입체프린터를 혁신기술의 대표 사례로 소개하며 ‘제 3차 산업혁명’ 이라는 말까지 썼다.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입체프린터를 중세 말의 인쇄술, 산업혁명 초기의 증기기관, 1950년대의 트랜지스터, 1980년대의 인터넷과 같은 반열에 놓기도 한다.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기술이란 예상을 하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는 이 기계 어디에 그런 심오한 가능성이 있을까?


 입체프린터는 플라스틱이나 금속 분말을 녹여 잉크처럼 뿌리면서 컴퓨터디자인(CAD) 프로그램이 지시하는 입체를 만들어낸다. 얇은 레고를 쌓는 것과 비슷한 이런 방식을 ‘첨삭식 제조’(additive manufacturing)라 한다.


 이 기술은 지난 수십년간 자동차, 항공우주 등에서 완성품의 모형을 만들어 보는데 널리 쓰였는데 기술이 향상되면서 차츰 보석, 주방기구, 자동차 부품 등 실제 사용되는 물품으로 제조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특히 디자인이 복잡한 물건을 훨씬 쉽게 만들 수 있어 비행기 날개 같은 정교함을 요하는 물품도 제작하고 있다. 요즘은 플라스틱 뿐 아니라 티타늄 등 여러 재료를 섞어 컬러 프린트하듯 복잡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게 됐다. 기계 가격이 몇억~몇십억원씩 했으나 요즘은 200만~300만원짜리 가정용도 나와서 팔리고 있다.


 입체프린터의 잠재력은 제조업 생산을 ‘개인화’하는데 있다. 아직 품목이 제한적이지만 나중에는 누구나 원하는 물품을 집안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소비자와 가까운 곳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적시에 제품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큰 공장에서 대량생산해야 가능했던 ‘규모의 경제’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해진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제품을 낱개로 생산할 때도 수천, 수만개를 생산할 때처럼 낮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다.

 첨삭식 제조는 재료를 깎고 이어붙이는 전통적인 제조 방법에 비해 원재료가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든다. 그만큼 자원과 에너지 소모가 적어서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부품을 이리 저리 이동하거나 미리 재고를 많이 만들어 둘 필요가 없어 물류비용과 재고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공과대학 연구진이 지난해 만들어낸 길이 0.285mm의 초소형 자동차 모형. 연구진은 액체상태의 수지를 레이저로 단단하게 만들어 '3D 나노프린터'로 제작해 종전에서는 수시간에서 며칠 걸리던 것을 4분만에 완성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것들은 그간 거대기업 위주로 발전해 온 제조업 생산이 소규모 지역화된 제조업자들의 네트워크 형태로 바뀔 가능성을 말해준다. 기업이 소량으로 소비자의 반응을 봐가며 제품을 개발할 수 있어 초기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소비자와 가까운 곳에서 적시에 생산한다는 것은 지금 같이 중국이나 인도에서 만들어 미국이 소비하는 형태의 국제 분업에도 변화를 가져 올 수 있고, 산업화와 함께 진행된 도시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첨삭식 제조의 발달은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로 음반, 서적, 소포트웨어 같은 지식산업에서 새롭게 태동하는 경제원리가 제조업으로도 확산되는 의미가 있다. 불특정 다수가 참여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사전을 만든 위키피디아나 애플의 앱스토어 사례에서 보듯 새로운 경제를 움직이는 원리는 분산된 개인이 협력하고 공유하면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입체프린트 시대에는 디자인 파일만 내려받으면 누구나 물건을 찍어낼 수 있고, 누구나 제품의 모양과 기능을 조금씩 변형하고 개선할 수 있어 제조업이 소프트웨어 산업과 비슷해진다. 당연히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고 이에 맞서 디자인과 기술을 공유하고 협업하는 오픈소스 운동이나 클라우드소싱 작업이 일어나게 된다.

 

 미국 엠아이티(MIT) 대학의 닐 거센필드 교수가 처음 만들어 세계에 퍼뜨리고 있는 제작소 팹랩(FabLab)이 바로 그런 오픈소스 공동체인데, 여기서는 물건을 만드는데 필요한 디자인과 기술을 공유하고 교환한다. 디자인과 제조 기술이 무료이고 플라스틱과 금속가루가 원가의 대부분이라면, 음악파일이 그러했듯 물건의 가격은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스마트그리드로 대표되는 에너지 분야, 앱스토어로 상징되는 지식산업을 거쳐 제조업으로 확산되는 이런 신경제가 경제학자이자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책으로 쓰고, 오바마 이번에 대통령이 강조한 ‘제3차 산업혁명’일 것이다. 3차 산업혁명의 사회와 경제는 분산된 개인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습이어서 위계서열식 지휘통제가 잘 통하지 않는다. 개인간 협업을 이뤄내는 소통이 요즘 유난히 강조되는 것은 이런 문명사적인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이봉현 한겨레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 2013.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