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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경제 금언’도 이제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경쟁사 제품 좇는 ‘빠른 추적자’

지금은 ‘최초 혁신자’ 위치에 서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우리 사회

첨단과 전통산업 융복합 맞아

경제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바꿔야


2008년까지만 해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양분했던 노키아와 블랙베리가 전성기 주가 대비 10~20% 수준의 헐값에 매각됐다. 우리는 필름의 대명사 코닥, 전자왕국 일본의 상징 소니, 120년간 흔들리지 않은 오락 외길 닌텐도 등 업계의 대표주자들이 한꺼번에 주저앉는 걸 목격하고 있다.


산업의 지형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기업의 부침이 가팔라지고 있다. 생각도 못한 경쟁자가 출현해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시대다. 혁신에 실패하거나 과거의 승리에 안주할 때 나락의 비탈길에 들어선다. 한국의 대표기업들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위기감이 높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0년 내로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이 대부분 사라질 수 있다”며 고강도 혁신을 거듭 주문했다.


우리 대기업은 외국 경쟁사의 혁신적인 제품을 재빨리 모방해 더 좋게, 더 싸게, 더 다양하게 만드는 ‘빠른 추적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지금까지 성공해 왔다. 이제 많은 제품군에서 앞에 뛰는 선수가 없을 만큼 선두 주자가 됐다. 보고 배울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맨 앞자리를 지키려면 ‘최초 혁신자’(first mover)가 되어야 한다. 제품뿐 아니라 사업모델, 전략면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와야 하고, 첨단과 전통 산업이 섞이는 융복합이 일어나야 한다. 새 정부의 정책의제인 ‘창조경제’도 이를 실현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혁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빠른 추적자’의 마음과 ‘최초 혁신자’의 마음은 같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생각이 먼저 길을 열어야 기업인의 투자도, 소비자의 선택도, 정부의 정책도 달라진다. 어떤 사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집약된 것이 금언(교훈이 담긴 짤막한 말)인데, 경제도 금언에 적잖은 영향을 받는다. 복잡한 현상을 간명히 보여주고, 스토리(이야기)를 부여하며,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의 빠른 추적자 시대를 대표한 금언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천재 한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앞의 둘은 1993년과 2002년 이건희 회장의 입에서 나왔고, 마지막은 1995년 삼성그룹의 이미지 광고에서 나와 유행했다. 20년 전 신경영이 나올 때만 해도 현대, 엘지와 키재기를 하던 삼성이 빠른 추적자 시대를 선도하며 앞으로 쑥 치고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금언은 요소투입 증가만으로는 한계에 이른 1990년대 이후 한국 산업에 고부가가치화와 디자인 혁신을 주문한 것이었다. 또 평등의식이 유난한 사회 속에서 차별화를 감행해 핵심 인재를 확보하고, 승자독식이 심화되는 국제 경영환경에 대비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비록 지난 20여년간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해온 이들 금언의 효용이 아직 남았더라도, 이제는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때다.


우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마누라와 자식만 (그룹 채팅방에서) 빼고 다 연결하라”는 것이 새로운 혁신의 조건을 잘 말해준다. 한국 대기업은 자급자족형 혁신의 덫에 걸려 있다. 그런데 지식기반 경제에서 혁신은 폐쇄된 연구실이나 기업 내에서 이뤄지는 것과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기술은 성공을 위한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고, 여러 요소를 결합해 가치를 창출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기업 외부의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이 세계적 추세다. 그래서 새로운 혁신은 기업이 얼마나 사회에 열려 있고 소통할 줄 아느냐에 크게 좌우되게 됐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기술과 결합할 줄 알았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사실 훌륭한 커뮤니케이터였다.


또 “천재 한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10만명의 노력이 천재 한명을 만든다”로 바뀌어야 한다. 심리학자이자 경영컨설턴트인 키스 소여는 “천재가 위대한 발명을 했다는 것은 신화이고, 위대한 창조물은 여러 사람이 협력해서 이뤄낸 것”이라며, 이를 ‘그룹 지니어스’(group genius)라 이름지었다. 전구만 해도 에디슨은 소켓에 직선으로 끼우려 고생만 했으나 이를 나선형으로 끼워본 것은 연구팀의 아이디어였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의성을 위해서는 이제 고객, 핵심 협력사, 경쟁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산업의 측면에서 볼 때도 혁신의 대부분은 무수히 많은 작은 중소기업에서 나오지 3·4세 경영으로 넘어가 안정을 추구하는 대기업에서 나오기 어렵다. 아울러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진 사회는 섬에 갇혀 동종교배를 거듭하는 동물처럼 퇴화해가게 된다. 대기업의 자원이 중소기업에 흘러가도록 제도적 물꼬를 트고 상생의 경제민주화를 이뤄내는 게 그래서 필요하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실패한 2류를 기억하라”로 바뀌어야 한다. 최초 혁신자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2등은 감지덕지고 꼴찌를 해도 이를 빨리 털고 일어서게 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창업의 기대수익이 의사·법관·은행원 같은 안정된 직장의 기대수익보다 낮은 상황에서 퍼스트 무버가 나올 수 없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이스라엘에 이어 두번째로 사업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큰 나라다. 창조경제는 여전히 모호하다. 경제가 달라지려면 경제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들도 바뀌어야 한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한겨레 2013.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