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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사제들이 광장으로 나온 까닭


지난 9월23일 서울광장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의 ‘국가정보원(국정원)개혁과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국미사’가 열렸다. 이 미사에는 전국 15개 교구에서 300여명의 사제와 500여명의 수녀, 그리고 수천명의 신자와 시민들이 참여했다. 손에손에 촛불을 든채 미사전 행사로 그들은 ‘아침이슬’과 ‘광야에서’를 가슴으로 함께 불렀다. 70년대와 80년대의 대표적 저항가요가 2013년을 다시 일깨우는 듯했다.


어쩌다가 70년대의 저항가요가 다시 이 땅의 민주주의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일까. 어찌하여 70년대에도 없었던 사제단의 서울광장 시국미사가 이날 벌어지기에 이른 것인가. 사제단의 시국선언문은 그 예언자적 목적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국정원 개혁보다는 국정원 해체를, 정부의 회개보다는 민주주의 회복을 강조한다.


시국선언문은 지난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국정원이 조직적인 공작을 전개함으로써 민의를 왜곡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며 “한국 천주교회는 절차민주주의 훼손과 오염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고 밝혔다. 선언문은 특히 “전국 15개 교구의 사제와 수도자들이 뜻을 모아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은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시국선언문은 이어 4개항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첫째, 민주주의 존립을 위협하는 해악적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한 국정원은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둘째, 원세훈 김용판 등 국정원 사태와 관련된 모든 범법자들을 엄중히 처벌하라. 셋째, 청와대는 법과 원칙에 따른 검찰의 진상규명 노력을 제지하려는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 넷째, 박근혜 대통령은 이상의 불법을 깨끗이 정화한 다음 국민 앞에 사과하고 새롭게 신임을 구하라고 요구했다.


이 선언문은 지난 봄부터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한 진상규명과 국정원 개혁을 요구해온 각계각층은 물론 천주교의 요구를 수렴하고 있을뿐 아니라 그 요구수준을 더욱 높이고 있다. 사제단은 특히 “이번 국정원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는지 보여주는 현상”이라며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만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임을 명심하자고 촉구할 만큼 단호함을 보여준다.


천주교가 이처럼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후 처음이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천주교의 이번 시국선언은 로마교황청의 공식승인을 받은 단체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천주교의 시국선언에는 지난 7월25일 부산교구를 시작으로 9월4일 현재 의정부교구에 이르기까지 15개 교구 전체가 참여했다. 특히 보수적 성향인 대구 경북교구는 1911년 출범이래 102년 만에 처음으로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시국선언에 참여하고 있는 천주교 사제는 2200여명에 이르며 전체 사제의 절반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외에 6500여명의 수도자와 1만1000명 이상의 평신도 역시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천주교회가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배경은 천주교의 사회교리와 그에 따른 사제의 역할,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과 사회적 관심에 대한 촉구,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천주교의 역사적 역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한국천주교가 참여하기 시작한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였다. 공의회 문헌인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민주화운동의 핵심내용을 이룬다. 


“교회가 언제나 어디서나 참된 자유를 통해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임무를 자유로이 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의 구원이 요구될 때는 정치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76항)


이 구절이야말로 천주교회의 정치참여를 정당화하는 핵심적 내용으로 일컬어진다. 사실 한국천주교는 당시 위와 같은 세계교회의 물결에 뒤처져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유신체제가 들어선지 2년 후인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 7월6일 원주 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가 공항에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요원에게 연행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지 주교는 당시 민청학련사건의 배후 지원자로 지목돼 1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했다.


이 사건을 통해 천주교회가 ‘안일함’에서 깨어나게 됐다는 것이 교회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후 천주교계 민주화운동의 두 핵심은 사제단과 정평위였다. 사제단은 지학순주교가 구속된 지 두달 후인 1974년 9월26일 창립돼 지금까지 민주화운동은 물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그리고 각종 사회운동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활동해왔다. 때에 따라서는 거리에 나서는가 하면 교회와 국가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 국정원 사태는 바로 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하는 중대한 위기사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평위 역시 지학순주교 사건 후인 1975년 12월 주교회의 직속조직으로 재편되면서 사제단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양대 핵심 축을 이루었다. 1970년 8월 창립된 정평위가 수면상태를 벗어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교회법상 사제단이 신부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비공인 조직이라면 정평위는 주교회의에서 설립된 공인조직이자 범세계적 공식기구다. 또 사제단이 순수 성직계층만으로 구성된 반면 정평위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연합조직이다. 따라서 정평위가 주교회의 산하조직으로 재출발, 민주화운동을 벌인 것은 천주교 전체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는 의미다.


국정원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운동 역시 천주교 전체의 공개적 정치참여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이야말로 사제직과 예언직의 의무를 다하는 신부들의 실천행위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회 바깥을 향한 사회적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천주교가 70년대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나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현안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또한 이와 같은 천주교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대중적 설득력과 신뢰를 높이고 있으며 세계교회의 흐름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의에 대한 논란이 없을 수는 없다.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려는 개혁적 물결을 저지하려는 보수적 견해 또한 엄존한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반대하는 이들 역시 상당수에 이른다. 천주교회 내에서도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거나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기는커녕 유신정권과 협력을 모색하는 교구들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정원사태와 관련해 신문광고 등을 통해 천주교의 시국선언 운동을 비판하는 일부 평신도단체 등이 있으며 사제들 간에도 서로 다른 의견이 교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 천주교의 사회참여는 갈수록 공감과 공신력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견의 다름이 아니라 사태의 본질이다.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선거개입이야말로 있어서는 안 될 민주주의 후퇴이자 위기사태다. 우리는 이미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으로 인한 헌정중단과 국가적 비극을 경험한 바 있고 그 후유증 또한 적지 않다. 정보기관의 공작정치를 통해 망국적 지역주의와 색깔론을 자극, 민의를 왜곡한 대표적인 대통령 선거 중의 하나가 1971년의 대선이었음은 역사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1971년 4월27일의 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후 이루어진 첫 대통령 선거였다. 영남출신 박정희의 강력한 경쟁후보는 호남출신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다. 김대중은 선거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정책공약을 내세웠다. 그는 권위적 독재체제를 뒷받침한 경제구조와 제도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대중경제론'을 통해 부유세 도입을 주장했다.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 기능을 축소하겠다고 공약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론을 제시했다. 군의 중립화 및 정예화 약속과 함께 향토예비군 폐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 영향력은 폭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게 반호남 지역주의와 반공·반북이념의 결합이었다. 지금의 국정원이 불법으로 벌여온 심리전과 같은 맥락이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은 선거 판도를 뒤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는 출처불명의 전단이 영남지역에 뿌려졌다. 국회의장이던 이효상은 '신라 임금론'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영남정서를 자극했고 몰표로 나타났다. 그 결과 열세에 몰리던 박정희는 김대중을 불과 94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이겼고 다음해 10월에는 아예 종신 대통령이 되기 위한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2012년 12월의 대통령선거 막바지에서 터진 국정원 여자요원의 댓글사태가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인가 하는 점은 지난 역사를 잠깐 되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태는 여전히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국정원의 직접적인 정치활동이 노골화하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국정원을 싸고돌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검찰의 수사결과 드러난 것들만 해도 국정원의 정치공작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국정원의 댓글달기는 국가조직의 불법적 대국민 심리전이었음이 드러났고, 그 심리전은 국정원장-차장-심리전단장-팀장-팀원의 지휘체계를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왔다.심리전단은 과거 국소속이던 것이 3차장 산하 독립부서로 확대돼 4개의 사이버팀을 운영해왔다. 이들은 총괄기획팀의 기획에 따라 네이버나 다음 등 국내 대형포털, 일베 등 중소포털,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3개의 전담팀을 구성하고 각 팀은 다시 4개 파트로 나누어 12개 파트 70여명에 이르는 팀원들을 두었다. 이들은 매일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 게시글과 댓글을 작성해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수백개의 계정을 통해 리트윗(퍼나르기)프로그램을 활용, 수백만 건을 퍼나르는가 하면 삭제팀원을 두고 흔적을 지워왔다. 이 심리전단은 댓글공작에 외부 민간인까지 동원하고 매월 활동비까지 지급했다.


박근혜정부의 남재준 국정원장은 이와 같은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호도하기 위해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대화록’을 공개하는 어처구니없는 불법을 저지르는가 하면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사건의 공안정국을 통해 사태의 반전을 꾀하고 있다. 대선국면 막바지에서 국정원 여성요원에 대한 ‘인권유린’을 운운하며 선거전을 벌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딴전을 피운다. 그는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대한 야당의 사과요구에 대해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을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며 이명박정권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태는 이 사건의 수사지휘 책임자인 ‘검찰총장 찍어내기’로 이어졌다. 검찰이 국정원을 대선개입 혐의로 기소하자 박근혜정부는 ‘혼외자식’의혹을 이유로 채동욱 검찰총장을 내쫒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이 조폭조직보다 못한 ‘신상털기’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의혹제기 보도로 시작된 채총장 밀어내기를 두고 ‘언론과 권력의 혼외정사’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결국 박근혜정부는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대한 수사를 책임진 검찰총장의 옷을 벗김으로써 검찰에 대한 분명한 신호를 보낸 셈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떼와 같다”고 말했다. 천주교의 시국선언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강우일 주교(주교회의 의장)는 강조한다. 사제단과 정평위, 수도자들과 신자는 물론 시민들이 모두 나서 시국선언을 했지만 박근혜정부는 오불관언이다. 오히려 역사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민주주의 회복은 자꾸 멀어져 간다. 한국 천주교의 시국선언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김광원 저널리즘학연구소 소장 (사목정보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