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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함정

 

연합뉴스

 

 

박근혜의 함정

 

40여 년 전 리처드 닉슨 미국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시 떠올린다. 1972년 6월 시작된 워터게이트 사건은 2년만인 1974년 8월 닉슨의 사임으로 막을 내렸다. 닉슨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며 흥분했던 닉슨의 태도와는 달리 박 대통령은 침묵모드를 유지하며 대리인을 앞세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11일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국가정보원(국정원) 여자요원의 댓글달기가 발각된 이후 시작된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으나 그 해결책은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다. 국정원과 국방부는 물론 국가보훈처와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까지 범정부적으로 지난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는데도 박 대통령은 오불관언이다. 그는 이 불법행위들을 지난 정부의 탓으로, 집권 새누리당은 야당의 비판을 ‘대선불복’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10월 28일 사건 발생 10개월 만에 박근혜 정부 출범이후 처음으로 나온 정홍원 국무총리의 담화문 내용은 박 대통령의 기존입장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단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대통령께서는 처음부터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검찰 수사와 함께 국정조사를 통해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서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셨다”는 게 정 총리의 얘기다. 정 총리는 여기에 박 대통령의 쐐기를 박는 ‘말씀’까지 덧붙이고 있다. “재판과 수사가 진행 중인 이 문제로 더 이상의 혼란이 계속된다면 결코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성 발언을 잊지 않는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덮기 위해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했고, 이석기의원 내란음모 사건발표 역시 그 일환으로 보였다. 국정원 댓글사건을 은폐하려던 전 서울경찰청장의 거짓증언을 폭로한 경찰간부는 징계를 받았다. 국정원 사건을 선거법 위반으로 다루었던 검찰총장이 공작성 추문으로 쫓겨나는가 하면 눈치 없이 수사에 매진하던 검찰 수사팀장은 업무에서 배제됐다. 새로 내정된 검찰총장 후보자는 청와대 비서실장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누가 이 수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박근혜 정부는 이미 아버지 박정희정권 시절부터 익혀온 수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공작정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던 유전자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점차 증폭되고 있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을 정리해보면 그 유전자는 더욱 진화하고 있는 느낌마저 준다. 국정원 뿐 아니라 경찰 검찰 등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우호언론을 앞세워 여론전을 확대하는가 하면 국가안보를 내세운다. 이미 검찰은 박근혜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문제의 핵심은 역시 언론으로 향한다. 보수언론과 방송은 박 대통령의 아우라 만들기에 열심이다.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땡전 뉴스’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방송장악과 언론의 나팔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표본이다. 심지어 1983년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KAL)기 실종 뉴스마저 전 씨의 조기청소 뉴스에 밀렸다는 웃지 못 할 ‘사건’은 언론의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다시 ‘땡박 뉴스’가 거론된다. 지난 10월 20일 KBS가 저녁 9시 뉴스의 머리기사로 보도한 박근혜 대통령의 ‘제2 새마을 운동 제안’이 그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날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 “새마을 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꾼 정신혁명이며 다시 한 번 범국민운동으로 승화시키자”고 말했다. MBC의 뉴스데스크와 SBS의 저녁 8시 뉴스도 제2 새마을 운동의 제안 내용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 유신시대도 모자라 전두환 시대를 닮아가는 언론의 벌거벗은 모습이야말로 시대의 역설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문제가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켜도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외면하는가 하면 이를 여야의 대결국면으로 몰아가며 초점을 흐린다. 이 땅의 주류언론을 자처하며 ‘할 말은 하는 언론’이라고 자부하는 한 신문은 ‘말 안 듣는 검찰총장 찍어내기’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정원의 대선개입 수사방해에 공헌하는 결과를 빚었다.

 

미국의 닉슨정부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기 전에 각종 뒷조사와 도청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닉슨은 공화당의 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을 저지른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행에도 불구, 닉슨은 1972년 11월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에게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사임요인중의 하나는 공작의 실패가 아닌, 장악할 수 없는 언론 때문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직 대리인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언론장악에 따른 여유일 수 있다. 그렇다고 언론장악이 해결책은 아니며 그 오만함이야말로 오히려 함정일 수 있다.

 

김광원 (2013. 10. 30.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