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촛불과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의 차이는?
[뉴스분석] 유모차 부대가 없다? 탈정치 촛불집회 넘어 전면적 정권 퇴진 투쟁으로
유모차 부대도 없었고 미니스커트 부대도 없었다.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는 아저씨들만 가득했다. 체감 온도 영하 10도의 한파. 여느 노동자들 집회와 비교하면 대학생들이 많이 눈에 뜨였지만 최근 철도 민영화를 둘러싼 뜨거운 논란이 무색하게 일반 시민의 참여는 많지 않았다. 이날 집회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다스리는 비장하고 격앙된 분위기였지만 31일 다음 집회를 예고하고 큰 충돌 없이 일찍 끝났다.
철도 민영화 반대 집회는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와는 양상이 다르다. 2008년에는 중학생들이 먼저 촛불을 들고 나섰고 유모차 부대가 합류하면서 판이 커졌다. “내 자식에게 광우병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태운 골프 카트를 몰던 굴욕적인 장면과 겹쳐 거센 분노를 자아냈다. “미친 소 너나 먹어” 이보다 직설적이고 강렬한 선동 구호는 이때까지 없었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는 한계가 분명했다. 최대 70만명이 광장에 쏟아져 나왔지만 명박산성을 넘지는 못했다. 흥겨운 축제 같은 집회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장에는 무력감이 짙게 깔렸다. 6월10일을 고비로 촛불은 열기가 수그러들었고 결국 미국산 쇠고기는 수입됐고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통과됐다.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를 4대강으로 포장해 끝내 밀어붙였고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간판을 바꿔 걸고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1년, 국가정보원을 동원한 부정선거가 드러났고 명백한 범죄의 정황을 덮기 위해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총장의 뒤를 캐고 소신 있는 검사와 경찰을 쫓아낸 사실까지 드러났다. 구중궁궐 청와대는 유신시절 늙은이들로 들어찼고 아니나 다를까 30년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공안 탄압과 북풍 공작으로 끓어오르는 여론을 짓누르고 있다. 이 와중에 여기저기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고 철도 민영화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박근혜 정부는 수서발 KTX 자회사가 민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민간매각 금지를 법제화하자는 야당의 주장을 뭉개고 27일 저녁 서둘러 면허 발급을 강행했다. 철도노조의 파업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국가에 맞서는 큰 싸움이다. 노동 이슈에서 출발했지만 정치 이슈로 비화하고 이제는 정권 퇴진 투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만큼 대중적인 이슈로 확산돼 정권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박근혜 정부가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철도공사의 누적 부채와 고액 연봉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조중동 등의 논리는 합리적인 가치판단 이전에 정서적인 반발과 감정적인 거리감을 불러일으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는 국가기관 대선개입과 청와대 축소·은폐 공작에 쏟아졌던 국민적 반발과 저항을 철도 민영화 논란으로 물타기하는 데 성공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일단 국면 전환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서발 KTX 자회사는 철도의 공공성을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공기업 매각과 구조조정, 공공부문 축소, 감세와 재정지출 후퇴에 이르는 일련의 신자유주의 기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단순히 철도 요금이 오르거나 철도 노동자들 임금이 깎이거나 일자리를 잃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철도 민영화는 박근혜 정부의 남은 4년 동안 벌어질 창조경제 본격 실사판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5년 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 때는 유모차 부대를 비롯해 평범한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오히려 정당이나 단체의 깃발을 들지 못하게 한다거나 운동권 민중가요를 금기시하고 비폭력 평화 시위, 축제 같은 집회를 이어가면서 정치에 무관심한 일반 시민들과 함께 가야야 한다는 지나치게 탈정치적 강박이 광장에 깔려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 수입 조건을 적당히 강화하자 집회 열기가 급격히 수그러들었던 것도 이런 한계에서 비롯했다.
28일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는 노동자들이 저항의 전면에 나섰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많지 않았지만 이번 민주노총 총파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은 공기업 귀족 노동자들의 철밥통 지키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최후의 보루가 될 공공부문을 무너뜨리기 위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맞서는 평범한 시민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모차 부대도 없고 미니스커트 부대도 없지만 안녕들 하냐고 질문을 던지는 젊은 대학생들이 있고 부글부글 분노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분노가 살아있다. 광장의 머리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강력한 것은 싸우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연대의식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은 5년 전 이명박 정부가 부딪혔던 촛불 열풍보다 훨씬 정치적이고 전면적인 저항과 투쟁으로 치닫고 있다.
5년 전 촛불은 결국 한미 FTA를 막지 못했고 4대강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보수 기득권 정권의 집권 연장까지 허용했다. 100만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의 최대 변수는 촛불의 패배가 불러온 그 무력감이었다. 2014년 한국 사회는 움츠려든 촛불의 역동성을 어떻게 좀 더 현실 참여적인 저항의 횃불로 키울 수 있느냐에 따라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촛불은 진화하고 있다. 한때 유모차 부대를 내세우고 깃발을 내리고 뒤로 물러났던 노동운동 진영이 전면에 나서 강도 높은 대정부 투쟁을 선포하고 시민들이 이를 지지하면서 결합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다. 사회적 무력감과 냉소, 대중과의 괴리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게 과제다. 물리적 광장을 넘어 광범위한 연대의식을 회복하는 게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의 성공 관건이다.
이정환 미디어오늘 기자 (2013. 12. 29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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