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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집단기억의 정치적 관리

 

민중의 소리

 

민초는 권력이라는 배 전복시킬 수도 있어

집단적 기억을 정치적으로 관리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 


인간은 원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다만 약할 따름이다. 타잔이나 정글북 같은 얘기에서 보듯 환경에 따라 정체성은 물론 삶의 방식이 결정된다. 대구에 인접해 있지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에서 평생을 보낸 필자의 부친도 다르지 않았다. 젊은 시절, 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간첩으로 몰려 죽을 뻔했다. 1930년대 태어나 제대로 된 학교생활도 못했다.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는 마흔 즈음에 들어온 TV가 전부였다. 궁벽한 농촌에 신문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남달리 성실했지만 책을 읽을 시간은 별로 없었고 동네 어른 몇 분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던 79년 10월26일. 당신은 하늘이 무너진 듯 우셨다. 평생 고향을 떠나 산 적도 없으면서 절대 전라도 친구는 사귀지 말라고 했다. 모든 선거에서는 기호 1번을 찍었고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경찰은 멀리서 봐도 피하셨고 정부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따랐다. 동네 부역에는 빠지지 않았고, 통일벼와 유실수를 제일 먼저 심었으며, 소값 파동 때도 당신을 먼저 탓했다. DJ정부가 출범하는 것을 못 보셨기에 망정이지 나라가 망한다는 걱정에 자식으로서 곤혹스러울 뻔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울역에서, 밀양에서 만나는 해병대 복장의 어르신을 보면 그렇게 살다 가신 부친이 생각난다. 일제 식민지, 분단 전쟁, 유신과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이 땅의 선량한 민초가 갖는 지극히 보편적인 모습이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에 만약을 말해본다. 만약 당신이 TV에 나오는 모든 것이 기획되고, 검열되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만약 당신이 정답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과서조차 의도적인 선택과 배제에 따른 것으로 집단적 기억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알았다면. 만약 당신이 정부 관료와 정치인이 그렇게 똑똑하지도 양심적이지도 당신 같은 민초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만약 당신이 선거철이면 찾아와 돈을 찔러주면서 비굴한 표정으로 표를 구걸하던 바로 그 인물이 당신의 삶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법률과 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빨갱이의 실체가 모호할뿐더러 때로 조작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명절을 맞아 무덤 앞에서나 대면하는 처지에 당신의 대답은 못 듣지만 예전과는 분명 다를 것 같다.

 

74년 박정희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제대로 정립하겠다는 목표로 국사 교과서를 검정에서 국정으로 전환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결정된 긴급조치를 핵심으로 하는 10월 유신을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결단으로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반공드라마, 국토기행문, 서정적 수필 등이 포함되고 반공이념과 민족주의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집단 기억의 관리는 비단 학생만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113 수사본부’ ‘전우’와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선과 악을 편 가르는 동안, 아이들은 ‘똘이장군’ ‘파란해골13호’와 같은 만화영화를 통해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가를 배웠다.

 

정부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었던 종교인, 지식인과 언론인이 영장도 없이 끌려가 고문을 받을 때 일반 국민의 집단적 기억은 이런 방식으로 통제받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도 있지만 목적도 수단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는 것은 유신의 종말에서 잘 드러났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자유에는 피 냄새가 섞여 있다”고 했다. 민초라는 물은 권력이라는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말도 있다.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울고 분노한 관객이 1천만명이 넘었다. 집단적 기억을 정치적으로 관리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다.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14. 2. 5.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