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박근혜의 세상 바꾸기
아카이브(archive)는 원래 기록물을 모아둔 곳을 의미한다. 일종의 기록물 보관소다. 그래서 아카이브는 역사적 기록물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현대적 정보기술 용어로는 원본 재현이 가능한 데이터의 파일을 가리킨다. 조선일보 아카이브는 창간호부터 최근호까지의 웹상에서 지면 그대로 열람이 가능하도록 돼있다. 기록을 이렇게 보관하는 것은 잘한 일이다.
조선닷컴은 1920년 7월1일부터 현재까지 2백60만여 건의 기사검색이 가능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주로 국가기관과 대학도서관, 그리고 기업 등에서 비싼 사용료를 내고 이용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조선일보 아카이브를 아무리 클릭해도 뜨지 않는 자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기사다.
“여보. 나 나갑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장 전두환 장군의 한결같은 아침 출근인사다. 그는 여느 남편들처럼 “다녀오겠다.”는 여운이 깃든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군인이란 나라에 바친 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지만 이 짤막한 아침인사에서도 그의 사생관(死生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서 높이 사야할 점은 아무래도 수도승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과 극기의 자세일 듯하다. 지난 날 권력주위에 머물 수 있었던 사람치고 거의 대개가 부패에 물들었지만 그는 항상 예외였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302의 3 그의 자택에선 요즘 흔한 족자 한 폭, 값나가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고, 팔목에 차고 있는 투박한 미국 특수부대용 시계도 월남 연대장 시절부터 애용하고 있는 싸구려다····<金明珪기자> (1980년 8월23일 3면 전면기사)
조선일보 아카이브에는 아예 1980년 8월23일자 3면이 들어있지 않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부러 이 지면을 아카이브에서 뺐거나 실수로 빠뜨린 경우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로 빠뜨릴 수는 없을 것 같다. 3면 전체를 채운 이 기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육군대장 전역식을 한 날, 특집으로 실린 것으로 보인다. ‘인간 전두환’이란 큰 제목으로 그를 칭송하는 내용과 소제목들이 낯을 뜨겁게 할 정도다. 가족사진과 그의 약력도 함께 수록됐다. 그로부터 4일 후 그는 서울 장충체육관 대통령선거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5.18 광주항쟁이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총칼로 진압된 지 겨우 3개월 만이다.
지난 2011년 12월1일 조선일보사의 종합편성채널(종편) TV조선은 첫방송을 시작하며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새누리당) 대표와의 특별인터뷰를 방영했다. 최희준 에디터와 박은주 문화부장이 진행하는 시사토크쇼 ‘판’에 박 전대표가 출연한 것이다. 최희준 에디터는 허리를 깊이 꺾어 악수를 하고, 박은주 부장은 “박 전 대표를 보면 빛이 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형광등 100개쯤 켜진 것 같다”고 말했다. TV화면에는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주먹만한 자막이 떠올랐다. 아우라는 후광을 의미하는 말이니, 일반적으로 쓰이는 헌사와는 그 차원이 달라 보인다. 헌사의 진화인지 모른다.
현재 취임 2년차에 들어간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4년이나 남았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대통령 선거개입으로 박대통령에 대한 퇴진요구가 종교계 등에서 일고 있지만 그에 대한 여론 지지도는 여전히 탄탄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런 박대통령이 3월3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5회 아시안리더십컨퍼런스에 참석, “존경하는 방상훈 사장님과 내외귀빈 여러분····”이라는 말로 축사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조지 부시 전 미국대통령과 하토야마 전 일본총리 등 세계적 거물들이 모인 자리였다. 이 정도면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에 대한 답사로서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누가 알랴. 전두환에 대한 헌사가 사라지듯, ‘박근혜의 아우라’ 역시 장래를 담보할 수는 없다.
조선일보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직후 신군부 시절부터 밀월을 유지해온 과거의 권력 전두환과 재빠르게 단절을 결행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전 새마을본부 회장이 부패혐의로 구속되자 조선일보는 앞장 서 그를 향해 ‘절대권력의 절대부패’라고 몰아세웠다. 그것이 어디 먼 옛날의 일이던가. 요즘 국정원과 검찰을 비호하는 일부 보수언론의 행태가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까닭이다.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문제는 이제 그들의 뉴스 영역에서 아예 밀려나 있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이 나서 외국의 공문서를 위조해 멀쩡한 시민을 간첩으로 모는 일이 벌어져도 이들은 ‘인적 정보망 훼손’을 운운하며 국정원을 감싼다. 언론이란 탈을 쓴 모습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언론은 현대성과 관련된 수많은 얘기를 공유할 뿐 아니라 집단기억을 위한 창고로 활용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언론은 ‘역사의 최초 기록’으로 서야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이런 물음에 한국의 언론은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인쇄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역사의 최초 기록’에서 자료를 삭제하는 것은 그래도 일말이나마 양심의 찔림이 있는 듯해 보인다. 아예 사실을 비틀고 덧칠하며 윤색까지 하는 ‘세상 바꾸기’가 그렇다고 영원한 ‘세상 뒤집기’는 될 수 없다. 우리 눈앞의 조선일보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광원 저널리즘학연구소 소장 (2014. 3. 5 미디어오늘)
'이슈와 쟁점 > 칼럼/기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편의 콧털을 건드렸나, 1년 만에 날아간 친박 실세 (0) | 2014.03.14 |
---|---|
민족적 자존심을 진짜로 생각한다면 (0) | 2014.03.11 |
프레임의 덫에 걸린 ‘국정원 댓글사건’ (0) | 2014.03.04 |
얼었던 투자∙고용 꿈틀⋯‘경기 회복’ 봄바람 (0) | 2014.02.27 |
간첩조작사건, 국가에게 국민은 없다. (0) | 2014.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