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슈와 쟁점/칼럼/기고

민족적 자존심을 진짜로 생각한다면

 

민족적 자존심을 진짜로 생각한다면

 

일본 문제만 나오면
정치적 이념 다양한
기자들마저 한통속 돼
한국과 일본, 과거 넘어
공존하는 방법 찾아야

 

전공이 언론인지라 부득이 기자를 많이 만난다. 직급도 다양하고, 정치적 이념은 더 다양하고, 글 쓰고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에 닮은 점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들도 유독 일본 문제만 나오면 한통속이 된다. 일본은 과거를 전혀 뉘우치지 않고,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일본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고 믿는다. 언론의 이러한 집단적 태도는 대통령을 비롯해 전문가와 일반 국민에게도 널리 퍼져있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함으로써 일본을 자극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대한 민족적 자존심은 스포츠 분야에 닿으면 절정에 달한다. 일본을 상대로 하는 경기에 나서는 한국 선수들에겐 전사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금메달을 못 따는 것은 괜찮지만 일본의 아사다 마오에게 패하면 온 국민이 침통해한다.

 

일제강점기 36년을 생각할 때 이러한 남다른 자존심은 충분히 이해된다.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통해 형성되는 애국심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부의 단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과거의 헐벗고 굶주린 약소국이 아니다. 지나친 자존심은 자칫 피해의식으로 비칠 수도 있다. 게다가 자존심을 지키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고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국내에 오는 일본 특파원 중에는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대부분 한국을 좋아한다. 웬만한 전문가보다 한국을 더 잘 알다. 그런데 이들이 보기에 최근 일본 국민의 한국에 대한 태도 변화는 걱정스럽다. 전통적으로 한국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던 일반 국민도 이제는 자국을 증오하고, 조롱하는 발언이나 집회를 인터넷 잡지나 블로그 등을 통해 쉽게 접한다.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 사회 전체가 일본을 이렇게까지 싫어한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랐고 더 이상 한국에 미련을 두지 말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변하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경제대국이라는 자존심이 중국에 추월당했고 오랜 경기침체로 정신적 여유도 없어졌다. 동생같이 생각되던 한국이 경쟁자로 성장했다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피해는 현실이다.

 

엔화가 약세로 돌아선 것도 원인의 하나지만 주변에서 일본 관광객은 찾아보기 어렵다. 2013년 가을 이후 일본 기업의 한국에 대한 투자 실적은 급속히 감소했다. 대규모 신규 투자는 기대하기 어렵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어렵게 체결했던 비상시 일본 엔화를 빌려쓸 수 있는 통화스와프 계약도 종료되었다. 한·중·일 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동북아시아 3국은 신 냉전기를 맞고 있다. 한류 열풍도 정점을 지났고 한국을 혐오하는 만화와 시위는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태 전개는 불가피한 것으로 아베 총리를 비롯해 일본 극우 정치인의 역사인식과 발언은 도저히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가 갖는 한계를 고려하면 이 또한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대부분의 일본 관련 뉴스는 영어권 언론을 번역해서 짜깁기한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전후좌우 맥락을 담은 현장에서 발로 취재한 뉴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아베정권에 대한 높은 지지도가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점, 일본 언론에서도 신사참배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 일본 시민사회가 상당히 건강하고 다양하다는 점 등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있지만 독자의 눈치를 보는 언론이 반일정서를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다. 양국의 지도자들 또한 고집을 꺾을 기세는 없다. 한·일 양국이 과거를 넘어, 현실의 차이를 조정하면서 공존과 협력의 미래를 가꿀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김성해 대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14. 3. 5.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