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에 맞아 피흘리는 이한열 학생, 연세대에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영화 <건축학 개론>은 매력이 있다. 돌아보면 누구나 못났는데 유독 나만이 못나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 '쌍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 속에 있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에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돌아가도 달라질 게 없기에, 그리고 진실을 알아도 오히려 더 아플 수 있기에 우리는 망각을 택했다. 그간 잊고 지냈던 쓸쓸함이 노래를 통해 한꺼번에 되살아 났다.
1987년 6월 신촌은 뜨거웠다. 풋내기 대학생의 눈에 보이는 전경버스와 무장한 경찰은 왠지 모를 불편함과 분노를 자아냈다. 민주주의를 학습하기에는 최적의 풍경이었다. 등교를 하기 위해서는 모든 소지품에 대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무장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통과하면서 민주주의가 뭔가를 본능적으로 배웠다. 소위 386세대에 속하는 모든 이들이 겪었던 집단의 기억이었고, 제대로 된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 '습작'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고, 술자리에서 편하게 정치를 얘기하고,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회사에 다니는 동안 그것이 미완성이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국민 성공 시대를 이끌겠다고 약속했던 대통령의 약속은 공염불이 되었다. 전체 가구 중 60%가 빈곤, 질병, 불화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공존을 약속했던 대기업은 어느새 골목 빵집도 장악했다.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고 등록금은 해마다 올랐다. 금강산 관광도 막혔고, 북한과는 다시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50% 이상 올려 달라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하는 광대역 미사일 방어체제에도 가입해야 할 것 같다. 천문학적 규모로 미국 달러를쌓아 놓고 있지만 제2의 외환위기 공포는 잦아지지 않고 있다.
물론 대통령 한 사람의 잘못 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불행에서 가장의 책임이 없어지지 않듯 국가공동체의 고통은 지도자의 고통이어야 한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고 했던 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1997년외환위기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김정현의 <아버지>란 책에서 보듯 이땅의 아버지는 가족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자 했고, 포장마차에서 자책하면서 울었다. 욕먹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산을 올랐다. 2012년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이런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가를 깨우쳐 준다.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했던 미완성 민주주의의 역습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스마트 혁명 시대의 벽보와 유인물이다.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부당한 일을 따지기 위해, 자신이 믿는 신념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보다 더 거대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한 도구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본능적인 수단이었다. 형무소란 곳을 통해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죄값을 치르게 하는 수단인 것처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징벌이다.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때 우울증이 오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 간단한 이치가 MB 각하와 현 정부의 권력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을 비판한 현직 판사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직장에서 쫒겨났다. 국민의 세금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육사 출신의 엘리트 군인은 상관모독죄란 이름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요구하던 한 시민은 급기야 대통령 가족을 협박한 죄로 고발당했다.
뜨거운 태양과 그보다 더 무서웠던 독재정권과 투쟁해 얻어 준 언론의 자유는 어느덧 언론사의 자유로 변질했다. 권력의 단맛을 본 언론은 어느 순간부터 오만한 심판관이 되었다. 정부도 언론의 눈치를 보고, 국민도 언론의 눈치를 본다. 언론은 정치인, 공무원, 학자의 사상을 검열하고, 정상적인 사고와 일탈적인 사고의 범위를 정해주며,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편가른다. 국민은 정치인의 선동에 쉽게 휘둘리며,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이 없고, 그래서 국가와 사회에 무엇인 최선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강변한다.
대화가 없는 가족, 소통이 없는 조직,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위기를 만났다. 먹고, 자고, 입는 것만큼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집안에 문제가 있을 때 가족 구성원은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다. 가족 공동체의 행복과 번영과 비교할 때 가장의 권위는 사소한 문제다. 국가 공동체 역시 본질은 다르지 않다.
민주공동체의 성패는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와 능동적 협력에 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경청되지 않을때 누구나 구경꾼이 된다. 돈이 없다고, 지식이 부족하다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나이가 어리다고,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배재할 때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다. 게다가 세상은 점점 복잡해졌고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가 끝없이 등장하고 있다. 한 줌에 불과한 지도자 그룹이 독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작은 지혜가 융합되어야 하는 집단지성의 시대다. 조건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반세기 전 중국의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알려진 첸리췬은 그의 책 <내 정신의 자서전>을 통해 1957년 반우파 투쟁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모두 일치하여 적에 대항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정당한 권리가 박탈되는 것은 감수해야 했다. 중국의 발전 노선을 탐색하는 큰 일은 마오쩌둥과 같은 지도자의 몫이었고 일반 국민은 그의 지시에 따라 착실하게 일하며 충실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인이라면 오직 하나의 선택만 할 수 있었다. 직장의 통제에 순응하며, 조직이 자신에게 부여한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조직이 내린 어떤 이동 조치나 배분 조치에도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기본적인 생활과 발전의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은 결국 문화혁명의 암흑기를 겪어야 했고 잃어버린 한 세대를 맞아야 했다. 2012년 자칫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오류다. 습작에 그쳤던 민주주의를 완성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동아 7월호, 원고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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