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슈와 쟁점

올림픽 정신과 스포츠 애국주의

 

 

 

2012년 8월 대한민국은 뜨겁다. 40도에 육박하는 한낮의 더위 만큼이나 런던 올림픽에 대한 열기는 높다. 국가별 순위 경쟁에서 한국이 몇 등을 하는지,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지, 각 종목별 우승자는 누구인지 등 다양한 뉴스가 쏟아진다. 그러나 한국이 전체 메달 수에서 상위권을 달리고, 불우한 환경을 딛고 금메달을 딴 선수들의 후일담에 감격하고 또 체조와 수영 등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했다는 보도에도 불구하고 뭔가 모를 불편함이 있다. 월드컵, 세계육상대회, 올림픽 등 국제대회 때 마다 반복되는 것으로 스포츠와 애국주의가 결탁되면서 만들어 내는 부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작용한다. 강대국에 유리하게 국제협약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약소국의 국가이익은 강대국의 타협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팔레스타인과 쿠르드족 등이 겪는 불행은 국가 없는 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을 위해 묵념하고, 박물관과 기념물 등을 통해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고 집단적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공유할 수 있는 종교와 가치 체계를 세우고 교육하는 것은 물론 연극, 영화, 그림, 노래, 유희와 스포츠 등을 통해 "내 나라 내 민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올림픽과 같은 국가 대항전을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국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확인하며, 집단적 기억을 축적하는 것은 이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스포츠 애국주의는 정도를 넘고 있으며 특히 언론의 책임이 크다.

 

프랑스의 쿠베르텡 백작은 올림픽을 제안함으로써 국가간 이해와 교류 부족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국가별 메달 경쟁 보다는 인류 공동체 축제를 통해 평소에는 잘 접하지 못하는 국가의 정치, 경제와 문화 등을 배우고 공감대를 확대하는 것이 본질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국내 언론에서 이러한 목적은 퇴색한 지 오래다. 올림픽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한 스포츠로 이름만 바꾼 전쟁터다. 한국 보다 못 사는 후진국에 패배하면 모욕감을 느끼고 미국 등 선진국에 이기면 긍지를 느낀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는 반드시 이겨야 할 경쟁자로 특히 중국과 일본 등과 경기를 할 때는 맹목적 민족주의가 지배한다. 국제대회 보도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가장 관심이 높은 국가에 속하면서도 국제사회에 대한 이해 수준이나 다른 나라가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대는 부족하다. 한국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맹목적 애국주의로 인해 올림픽에 대한 콘텐츠가 획일화 되는 것도 문제다.

 

국내 언론의 눈과 귀는 항상 한국팀과 상대팀에 집중해 있다. 금메달을 딴 선수가 누구인지, 메달 후보군에 있는 선수의 경쟁자는 어떤 상황인지, 한국의 경쟁국가는 메달을 몇 개나 추가했는지에 대한 뉴스는 넘쳐난다. 그러나 스포츠 외교를 통한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 노력, 각국의 생활 체육 인프라 현황, 스포츠 테크날로지의 발전 성과, 스포츠 마케팅의 현장 등에 대한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페어플레이 정신, 협력과 공존의 경험, 대화와 타협정신 등 언론이 당연히 강조해야 할 보편적 가치도 홀대를 받는다. 역경을 딛고 인간 승리를 한 사례는 자주 소개되지만 그것도 한국 선수만을 대상으로 할 때가 많다. 특정 게임의 승리나 패배를 민족의 우수성과 국가의 경쟁력과 동일시 하는 것 역시 반드시 지적해야 할 문제다.

 

올림픽에 포함된 종목이나 메달을 배정하는 방식은 별로 평등하지 않다. 육상과 수영에는 100개 이상의 메달이 배정되고 양궁, 유도와 사격 등의 비중은 그만큼 높지 않다. 농구, 축구와 수영 등이 모두 키가 크고 힘이 좋은 백인 중심의 스포츠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체조, 수영, 피겨스케이팅 등 그간 백인이 독식하던 무대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을 한 것은 그런 점에서 분명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북유럽의 많은 국가나 다른 선진국에서 보듯이 올림픽 순위와 생활 수준은 별로 상관 관계가 없다. 독재 또는 권위주의 국가의 경우 내부 불만을 억누르고,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올림픽 등을 악용해 온 사례도 많다. 한국 역시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엘리트 체육에 집중 투자했고 그 결과 생활 체육을 위한 사회적 기반은 지금도 아주 취약하다. 게다가 박찬호, 박지성, 김연아, 박세리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선수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단순 직능을 넘어서는 분야에서 국가 경쟁력이 향상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치가, 언론인, 자선사업가면서 또 교육자로 유명한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은 신학과 기술 교육 등에 치우친 미국 대학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공동체에 대한 서비스 정신,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 사고력, 예술과 스포츠 등을 통한 균형 있는 인간성의 추구와 같은 자유교양 교육이 그가 세운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시작되었다. 글로벌 대기업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경우 단순한 직무 능력이나 지능만이 높은 게 아니라 자기 절제력, 친화력, 경청의 자세 및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줄 아는 감성 지성이 높다고 한다. 한국 대학생에 비해 음악, 스포츠, 학술경시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의 평균 성적은 낮지만 미국의 대학생들은 누구나 음악, 미술, 스포츠 등 한 분야 이상에서 프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한다. 예술과 스포츠가 학문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감성지성은 높다. 엘리트 스포츠 정책을 통해 세계 최강의 스포츠 강국으로 변신하고 있는 한국이 마냥 좋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신동아, 8월호 원고 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