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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

왜 아시아는 분열되고 있을까?

 

 

위대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하고자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도 있다. 공통적으로 자신의 본질, 능력, 가치관과 비전의 응집체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정체성의 차이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실제 사례도 있다.

 

미국 뉴욕의 한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졸업 당시 성적이 비슷했던 학생들이 명문 하버드 대학과 뉴욕주립대를 졸업한 이후 얼마나 달라지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교수들도 쉽게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주었을 때 하버드 출신과 달리 주립대 학생들은 쉽게 포기했다. 제3세계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과제에서도 하버드생들은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과연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대학에 다니는 동안 형성된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았다.“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잘난 다른 학생들에게 맡기고 너희는 보조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가르쳤던 주립대와 달리 하버드에서는“너희가 이 문제를 풀지 못하거나 외면하면 지구상에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풀 수 없고 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능력과 그릇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의 정체성도 이처럼 태생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변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가 대항전을 보면 소속감이 생긴다. 공식행사장에서“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부르고“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와 같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개인적 정체성과 달리 집단의 정체성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몇 가지의 상징장치를 통해 만들어지며 이 과정에서 언론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언론은 집단의 기억을 관리한다. 매년 3.1절이나 8.15일 광복절이 되면 언론은 일본과 관련한 많은 뉴스를 내보낸다. 기념행사를 중계하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고통스런 역사의 현장을 다시 방문한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이념 논쟁이 재현되고 북한에 대한 부정적 기사가 많아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미국이 잘못했거나 비판받는 일은 적게 보도하고 좋은 기억을 강화할 수 있는 뉴스는 적극 발굴해서 소개한다. 언론은 또한 누가 대한민국의 적과 동지인가를 규정한다. 1992년 공식수교를 하기 이전까지 중국은 적이었다. 적국인 중국과 교류하거나, 중국을 이롭게 하거나, 중국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든 행위나 생각을 배척했다.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적국으로 명확하게 명시를 한 북한에 대해서는 더 엄격했다. 북한의 지도자는 변태거나 미치광이거나 무능력자가 되어야 했다. 북한의 모든 대외정책은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것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미국은 이와 달리 항상 보호자였고 친구였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조치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부득이 한 것이거나, 우정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요구였다. 미국의 우방이었던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칠레 등은 자연스럽게 우방국이 되었고 중국과 친했던 이란, 시리아와 쿠바 등은 적성국이 되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위를 정하는 것도 언론이다. 경제민주화, 노동운동, 복지정책과 평등주의는 경제성장을 훼손하지 않는 정도에서만 정상의 범주에 포함된다. 선진국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미국과 유럽은 모범과 모방의 기준이 된다. 종교의 자유와는 무관하게 절에 다니거나 교회에 나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이슬람 사원에 출입하거나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색안경을 끼고 본다. 남녀관계, 직장동료관계, 사제관계, 부부관계 등에 있어 무엇이 정상이고 일탈인가에 대한 기준도 제시한다.

 

2012년 여름 대한민국은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몇 년 전과 비교했을 때 갑작스레 친구는 사라지고 원수만 늘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공동으로 치루고 동반자 관계를 다짐했던 일본은 교과서를 왜곡하고, 독도를 탐내고, 군사적 야욕을 드러내는 위협이 되었다. 1992년 공식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우호관계를 다졌던 중국 역시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북한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이어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교만하고 강한 적으로 바뀌고 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남북문화교류, 한민족평양축전 등으로 공존할 수 있는 민족의 반쪽이었던 북한 역시 평화를 위협하고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악한 집단으로 변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종북주의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형성되었던 아시아 공동체 논의와 아시아 정체성은 퇴색하고 한국은 미국과 일본과 연합해 중국을 견제하는 아시아판 나토를 준비하고 있다. 과거의 정체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받고 있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달라졌고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체성도 불가피하게 변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MB 정부의 대외정책이 강경일변도로 전환되었고 가장 강력한 우방인 미국의 입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스마트 미디어 혁명으로 인해 집단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한 대안 미디어가 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집단의 기억을 관리하고, 적과 아군을 규정하며, 정상과 비정상의 범위를 정하는 데 있어 언론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언론이 보다 성숙하고, 진지하고, 길고 넓은 안목으로 무장하고 정치권은 물론 국민 정서로부터도 자유로웠을 경우 요즘과 같은 정체성 혼란은 불필요했다. 친구 간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에 주목하고 나쁜 점도 좋은 쪽으로 고칠 수 있도록 조언을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필요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것은 여전히 언론의 손에 달려 있다 (신동아 원고 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