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시대와 귀족사회에서 중요 결정은 권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많은 중요한 결정에서 일반 국민은 배제된다. 그러나 국민은 언론을 통해 특정 정책에 대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고, 정책의 결정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정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공공지식(public knowledge)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공공정책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노동, 과학, 환경,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발생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이 이 모든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론은 따라서 각종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정보를 가공하고, 편집해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방식으로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국민은 이러한 공공지식을 통해 정책과 관련한 주요 쟁점을 이해하고, 특정 정책을 지지하거나 비판하게 된다. 공공지식은 이처럼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고,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데 꼭 필요하며, 대중이 언제라도 접근할 수 있고 또 편리하게 이용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모두 갖는 개념이다.
21세기에 접어들어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직면한 현안은 더욱 복잡해졌다. 한반도 문제만 하더라도 미국, 중국, 일본과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의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 전략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국발 금융위기 및 그리스와 남유럽 재정위기 등이 순식간에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국제안보질서, 경제질서, 금융질서, 문화와 정보질서 등 공공지식이 필요한 부분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했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국내 금융시장이 대폭으로 개방되고 외국인 투자가 확대되면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파생금융상품, 엔케리(Yen carry), 커플링(coupling) 효과 등 국가이익 보호를 위해 필요해진 지식의 절대량이 증가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등의 협상에서 드러난 것처럼 투자자국가소송제도(Investor-State Dispute, ISD), 래칭조항(ratchet), 네거티브시스템 등 정책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개념도 많아졌다.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등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사이버 주권의 문제, 인터넷 계정관리의 문제, SNS 규제 방안 등 뉴미디어를 둘러싼 정책 영역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야에 대한 공공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인의 전문성 제고와 분석 및 기획기사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국내 언론이 공공지식 측면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근거는 많지 않다.
국내에서 언론인의 전문화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전문기자제도를 도입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외부 전문가와 공동으로 작업하는 네트워크 저널리즘도 확산되고 있다. 줄기세포 사건, 광우병 사태, 한미 FTA 등에서 보듯 언론의 전문성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전문가 모임도 활성화 되고 있다. 그렇지만 공공지식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신문이라는 전통적인 언론매체를 통해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일부 TV를 통해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미국의 중동정책, 글로벌 경제위기, 국제금융질서, 북한 김정은 체제의 등장과 같은 복잡한 사안을 1분에서 1분30초 분량의 TV 뉴스로 이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블로그나 온라인 공동체에서 제공하는 지식은 대중이 접근하기도 어렵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가공되어 있지도 않다. 게다가 국내 신문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다수의 전문성을 가진 언론인이 해고를 당했고, 정년은 50대 초반으로 줄었다. 순환보직제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분야에 3년 이상 근무하는 경우도 많지 않고 전문기자제 역시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전문기자가 있긴 하지만 의학, 군사, 환경, 국제 등 극히 일부에 한정되어 있으며 기획 및 심층기사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재정적 지원도 없는 실정이다.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저널리즘 선진국의 경우 한국과 달리 전문성을 가진 기자들이 많고 이들의 전문성은 다양한 경험과 한 분야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의 결과 가능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과거와 같은 지면제한이나 전파의 한계는 많이 사라졌지만 국내 신문의 닷컴사에서 제공되는 뉴스는 공공지식과는 거리가 멀다. 방문객 규모에 따라 광고수익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이 약한 공적지식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다. 1인 미디어, 시민저널리즘, 트위터 저널리즘이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결과, 정보 홍수의 시대에 대중은 더욱 무식해지고, 여론공학에 휘둘리고, 자신의 관심 분야와 주변적인 사안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 언론의 냄비근성, 진지한 숙의보다는 감정에 휩쓸리는 여론재판, 감정적 민족주의 등은 모두 공공지식 결여와 무관하지 않다. 공공지식의 안정적, 지속적, 체계적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한국 저널리즘이 후퇴했다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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