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 중순 독일 베를린은 매우 추웠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눈도 10㎝ 넘게 쌓여 거리가 온통 살얼음판이었다. 독일과 영국 관계를 연구하던 필자는 당시 베를린 소재 독일 외교협회 객원연구원으로 그곳에 체류 중이었다. 인근에 있던 독일 기독교민주당(기민당) 소속의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을 방문했다. 바로 이 재단의 정문 앞에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와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두 손을 맞잡은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이 부조는 1963년 1월 22일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독일과 프랑스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우호관계를 제도화한 '엘리제 조약(독·불 우호조약)'의 장면을 담았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부터 1·2차 대전까지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댄 이웃이었지만 피 흘린 전쟁을 치렀다. 서로 간의 적대감이 팽배해 있어 양국의 우호협력이 쉽지 않았지만 양국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피해자였던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고 유럽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기 위해 유럽통합에 참여해야 했고 이를 위해선 경제대국인 서독이 필요했다. 나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제사회에서 정상적인 국가로 대접받기 위해서 서독도 프랑스와 협력해 유럽통합에 적극 참여해야 했다. 양국 지도자들은 이런 냉철한 현실적인 국익 인식을 바탕으로 협력을 제도화했다.
이 조약의 가장 큰 특징은 주요 외교 문제에서 양국의 사전 협의를 의무화했다는 점이다. 양국 수반이 최소한 일년에 두 차례 만났고 외무장관과 국방장관들도 수시로 만나 주요 문제를 협의했다. 또 청소년 교류를 의무화해 서로 간의 이해를 증진하고 화해의 초석이 되도록 했다. 조약이 유명무실해지지 않도록 협력을 추동한 것은 양국 지도자들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 때문이었다. 독일은 2차대전 당시 나치의 가장 큰 피해를 겪었던 이웃 폴란드와도 1991년 6월 우호조약을 체결해 협력을 제도화했다. 이 역시 프랑스와의 우호협력 관계가 모델이 됐다.
오는 22일이면 엘리제 조약 50주년을 맞아 양국 정부가 여러 가지 다양한 기념행사를 연다. 22일 베를린에서 양국 수반과 각료들이 참석하는 독·불 각료회의, 이어 양국 의회 합동회의가 열린다. 7월 5일 파리에서는 양국 청소년 교류를 담당하는 독·불청소년기구의 50주년 기념식이 다양한 행사와 함께 개최된다.
그렇다면 동북아시아는 어떤가. 지난달 말 일본에선 자민당의 아베 신조가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2차대전의 일급 전범들이 묻혀 있는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자국 정부의 성적 노예 관여를 부인하는 극우파 정치인이다. 일본의 계속되는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단기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에서 벗어나 일본의 그릇된 민족주의를 제어하기 위해 중국 등 이해를 공유하는 국가들과도 적극 협력해야 한다. 2월 말 출범하는 신임 정부는 독·불 협력을 참고해 면밀한 중장기 전략을 세워 실천해야 한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파이낸셜뉴스 20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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