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21일, 당시 임창열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발표했다. 그 때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자본을 회수해갔고 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나 우리는 사실상 부도 직전에 처했다. 한국전쟁보다 더 무섭고 비극이라 불린 ‘IMF 시대’의 시작이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고 서울역 지하철 역 인근엔 노숙자들이 넘쳐 났다.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던 필자는 경제부에서 중소기업을 맡고 있었다. 중소기업인들을 만나면서 머릿속에서만 이해했던 흑자도산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장부상으론 다른 기업에서 받을 돈이 있고 분명히 흑자인 기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경우 대기업에 물품을 납품하면 몇 달 만기의 어음을 받는다. 이를 원래 금액보다 할인해 현금화하고, 다른 중소기업에 물품을 팔아도 외상 거래를 하곤 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이런 과정에서 한 두 기업이 도산하면 다른 기업도 어려움에 빠져 최악의 경우 부도가 난다. 당시 우리는 IMF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긴축재정과 고금리라는 극약 처방을 수용해야만 했다. 기업들이 은행에서 대출할 때 한 자릿수였던 이자가 두 자릿수로 뛰었다.
이때부터 11년이 지난 2008년 후반기. 다시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유럽과 아시아로도 확산되었다. 1997년 위기와 달리 이번 위기는 우리가 유발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최대의 경제대국인 미국에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국내총생산(GDP)에서 무역(수출과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80%가 넘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각 국의 경기침체는 곧바로 우리 경제의 성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우리 경제는 3% 성장에도 미치지 못했고 올해는 2.5% 내외 성장이 예상된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그동안 진행되어왔던 중산층의 비중 감소를 더 촉진했다. 지난해 1~2월 미국의 정책전문지 ‘포린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실린 글에 따르면 1979~2006년 미 중산층의 세금을 제외한 실질 연소득이 21% 증가했고, 극빈층의 소득 증가는 이 기간에 11%에 그쳤다. 반면에 최상위 1%의 소득은 같은 기간 동안 256% 늘어났다. GDP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 기간에 거의 3배 늘어나 23%를 점유했는데 이는 1928년 이후 최고 비율이다. 학자들은 이처럼 소득 불평등이 커진 것은 세계화 때문에 저임금 일자리가 다른 나라로 이전했고 기술변화 등의 이유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조세율 변경(부자 감세), 이런 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적인 로비를 법제화한 정치자금법 등이라는 게 이 글의 분석이다.
미국과 유사한 자본주의 체제를 지닌 영국의 경우도 소득 불평등이 더 커졌다. 심지어 영미와는 상이한 복지국가 모델을 유지해오고 통일 비용을 극복한 독일도 이 기간에 미국이나 영국보다는 낮은 비율이지만 소득 격차가 커졌다. 우리나라도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의 비율이 점차 하락해 왔다.
포린어페어즈 같은 호에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 같은 통계를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중산층의 쇠퇴에도 생존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중산층은 얼핏 보면 너무 기회주의적인 듯하지만 그래도 어느 사회에서도 중심을 구성한다. 정치적 참여나 이들의 비판적 정신은 바로 정치발전의 지표다. 그런데 사회가 더 경제적으로 풍요해질수록 중산층이 증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게 큰 문제다.
중산층 복원은 어떻게 가능할까?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다. 부자들에게 유리한 조세율을 중산층을 위해 개편하고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도 한 방안이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경산신문 20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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