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가 ‘역사의 최초 기록’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명제는 언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은 무엇보다 사실보도를 그 기본생명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토대를 전제로 우리는 보도내용을 특정한 시대에 일어난 사건과 사람들을 해석하는 역사의 창고로 이용할 수 있다. 이른바 ‘사실에 대한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당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언론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진행 중인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실천적 행위이다. 심지어 옐로저널리즘(선정주의 저널리즘)이 판치던 19세기말의 서구 언론들도 사실보도를 기본원칙으로 내세웠다. 언론이 현재성과 관련된 많은 의제를 공유하고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합의를 이루어가는 데 언론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문제는 언론이 이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문제점이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보수언론의 무차별적 공격은 그 대표적 사례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집요한 헐뜯기는 지나치다 못해 병적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에 느닷없이 등장한 노 전 대통령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중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논란은 그 극치라고 할 만하다.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전직 대통령이 또다시 정쟁의 볼모가 된 데는 보수언론의 나팔수 역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새누리당이 박근혜 후보 당선을 위한 선거전략의 하나로 이용했던 것이 NLL포기 논란이다. 그것이 이번에 국가정보원(국정원)과 경찰의 대선개입이 확인되는 과정에서 물타기 형태로 재등장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에 대한 국정원의 전격적 남북정상 대화록 전문공개와 새누리당의 대화록 사전입수 의혹은 이 사건이 결코 단순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민단체와 교수 및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과 역사학자들까지 나선 국정원 규탄선언과 촛불시위가 잇따르는 이유다.
이 와중에서 보수언론과 방송은 새누리당의 주장을 대대적으로 반영하다 못해 한술 더 뜨는 보도를 해왔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여론은 차분했다. 한국갤럽의 2차에 걸친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결과다. 한국갤럽이 국정원의 대화록 전문 공개 직후인 지난달 26~27일 전국 성인 600여명을 대상으로 NLL논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3%가 NLL포기가 아니라고 답한 반면 포기라고 밝힌 응답자는 24%에 불과했다. 더욱 지난 15~18일에 770여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한 결과는 ‘포기 아니다’는 의견이 55%, ‘포기’라는 견해는 21%였다. 포기가 아니라는 의견이 높아진 것이다.
반면 여야 정치권의 NLL공방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NLL논란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국가기록원의 남북정상 대화록 확인 공방으로 확대되면서부터다. 여야 지도부가 국가기록원의 대화록 열람에 동의를 함으로써 남북정상의 대화록이 또다시 일방적으로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한 국가의 최고정보기관이 국가기밀을 공개하는가 하면 국회가 이를 확인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여야 열람위원들은 며칠간의 검색작업에도 끝내 국가기록원에서 대화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보수언론들이 그 책임을 다시 노 전 대통령에게 돌린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한 신문은 여권의 고위관계자를 인용, “노 전 대통령이 정권 말 문제 소지가 있는 것들을 모두 없앴을 것으로 본다”고 1면 머리기사로 전하기도 했다. 여야는 결국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림으로써 또 다른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그 진상을 파악하는 일은 이제 국가기관의 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국가기록물 사건’을 거론하고 있다. 그가 역사기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사실 그는 2004년 국가기록보존소를 국가기록원으로 바꾼 이후 본격적으로 공공기록물 관리를 위한 법과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7년에는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대통령기록관을 설립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예전 대통령들은 재임중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기록물도 퇴임할 때 폐기하거나 사저로 가지고 나갔다. 가장 중요한 역사기록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집권했지만 3만8,000여 건의 공식문서와 영상기록 말고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으로 3만여 건의 전자기록과 15만 건 정도의 문서기록을 남겼다. 나는 전자기록을 포함해 모두 826만 건의 기록물을 대통령 기록관에 넘겨주었다”고 적고 있다. 대통령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한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할 수 있는 측면이다.
역사를 훔치는 자 누구인가. 언론이 역사의 최초 기록자로 서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의 진상을 보다 면밀하고 철저히 추적해야 한다. 보수언론이야말로 스스로 역사의 지킴이 역할을 강조해왔지 않은가.
김광원 저널리즘학연구소 소장 (미디어오늘 201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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