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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협력하는 인간이 만드는 희망, 경제적 인간은 가라


출처 :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601847.html


협동형 인간 시대


2008년 터진 세계 경제위기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고 있다. 바로 ‘협동형 인간’(상호적 인간: Homo reciprocan)이다. 협동형 인간은 합리적·이성적인 면과 함께 비합리성과 감성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를 이뤄 서로 의지하고 돕는 인간이다.


복지사회와 지역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공유경제가 활성화하는 뒤편에서는 논문, 책, 대중매체의 보도, 강연 등을 통해 새로운 인간형이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김춘수의 <꽃>은 우리 존재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남이 이름을 불러 줄 때 비로소 내가 된다. 사람이 무엇이냐는 것도 고정불변이라기보다 여러 이야기(담론)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해간다.


2004년 나온 최정규 경북대 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나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비롯해 국내외에서는 인간의 상호성을 밝혀주는 책들이 잇따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경제학과 심리학의 경계에 있는 행동경제학이나 진화생물학에서 관련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대학과 문화센터에서도 이런 강좌에 수강자들이 몰린다.


상호적 인간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의 알을 깨고 나왔다. 경제적 인간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근대 학문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경제적 인간은 시장에 적합한 인간인데 이익과 비용을 합리적으로 비교·판단해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이기적 선택)을 한다. 가격이 행동을 결정하는 시장거래에서 인간은 실제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시장이 세상만사를 해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가 득세하면서 인간의 합리성과 이기심이 지나치게 강조된다. 특히 지난 30~40년을 휩쓴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자연적이며 완벽한 제도이기 때문에 그걸 돌아가게 하는 인간도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 소유권을 확실히 하고 정보 유통의 제한을 없애며 정부의 개입과 같은 ‘잡음’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보다는 ‘희망사항’에 불과했지만 추상과 고등수학이란 ‘거탑’ 위에 올라앉은 주류 학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결혼도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합리적 선택 이론, ‘웬만한 정부정책은 국민이 결과를 예측해 반응하기에 효과가 없다’고 얘기하는 합리적 기대 가설, ‘주가 같은 금융시장의 가격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보가 반영된 것이어서 거품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효율적 시장 가설 같은 이론이 경제를 넘어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들었다. 이런 경제학의 본산인 시카고학파는 1969년부터 2000년까지 노벨경제학상의 30%를 휩쓴다. 그 결과는 대공황에 버금간다는 지금의 고통스런 상황이다.


경제적 인간은 이론에서 먼저 반박을 당했다. 행동경제학의 연구는 인간이 완벽한 정보를 갖고 합리적 판단을 하기보다는 제한된 범위에서 주먹구구식으로 판단함을 보여준다. 메뉴판에서 중간 가격을 고르듯 우리의 행동은 준거의존적이다. 광고를 보면 마음이 바뀌듯 정보가 어떻게 ‘프레임’ 되느냐도 중요하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불합리하기에 시장의 거품과 붕괴가 반복되는 것이다.


아울러 한 사람에게 1만원을 주고 옆의 동료와 적절히 나눠 가지도록 하는 ‘최종제안 게임’ 같은 실험을 해보면 경제적 인간은 1원을 줘야 합리적이지만 4000원 정도를 나눠준다. 즉 인간은 상대방을 의식해서 행동하며, 정의가 아니라고 보는 행동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응징한다.


또 진화생물학은 다른 많은 동물처럼 인간이 왜 이기성과 함께 이타적 속성을 진화시켜 왔는지를 설명한다. 마틴 노왁 하버드대 교수는 <초협력자>에서 혈연선택, 직접상호성, 간접상호성 등 5가지 원칙을 들어 장기적으로 이타적 행동이 살아남는 원리를 설명한다.


아울러 게임이론은 우리가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선택함에도 사회적으로는 최적이 아닌 결과가 나오는 딜레마가 발생함을 보여준다. 내 자식 높은 점수 받으라고 과외를 시키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지만 모두가 그러다 보니 아이들만 고생하고 돈은 돈대로 들어간다. 누가 좀 말려줬으면 좋은 그런 상황이다.


합리성·이기심 강조한 신자유주의 

지금의 고통스런 상황 몰고와 

행동경제학, 진화생물학 등 

인간의 상호성에 주목

복지사회, 지식기반 경제서 

협력과 믿음은 

한계 부닥친 한국 경제 키워드


인간사회에서 1+1을 3으로 만드는 방법은 협력이다. 인간의 협력적 본성은 계발돼야 하는데 대화나 토론 같은 소통을 늘리면 발전한다. 서로의 관계를 장기로 가져가고, 집단의 크기를 줄여 친밀성을 높이는 것도 협력의 밀도를 높이는 데 중요하다. 협력의 바탕이 되는 것은 믿음인데, 믿음을 강제하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사회적 자본’이라고 한다.


상호적 인간이 부각되는 것은 단지 도덕적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사회적으로 인간의 그런 속성이 요구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첫째, 경쟁뿐 아니라 협력의 경제적 가치를 알게 됐다. 믿음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잘 갖춰진 나라는 일일이 의심하고 확인하느라 비용이 들지 않아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 또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진 사회는 장기적으로 성장률이 떨어진다. 육아, 간병 등을 사회적으로 ‘공동구매’하는 복지는 이런 격차를 줄여 안정적 성장의 발판이 된다. 그래서 복지를 “퍼주기” 또는 “예산 낭비”라고 눈을 치켜뜨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둘째, 경제가 제조업을 벗어나 지식기반 경제로 변했다. 지식기반 경제의 결정판인 네트워크 경제는 특히 협력과 신뢰로 움직인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능가한 <위키피디아>에서 보듯 지식은 함께하고 나눌 때 가치가 커진다. 애플의 콘텐츠 마켓인 앱스토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디어가 가치의 원천인 네트워크 경제의 혁신은 개방, 공유와 참여를 통해 일어난다.


결국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신뢰의 네트워크를 확산하고 서로 협력하는 ‘상호적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성장의 한계에 부닥친 한국 경제의 과제인 것이다.


이봉현 한겨레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 20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