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연합뉴스
조선일보는 역시 '1등 신문'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서슬퍼런 검찰총장의 음습한 사생활을 들춰내서 그것도 1면 머리기사로 뽑아 올렸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은 채동욱 총장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하면서 정작 총장이나 아이 어머니에게 확인 취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슴 떨릴 정도로 무모하고 정말 무지막지한 자신감이다. 조선일보는 과감하게 베팅을 했고 의도했던 대로 판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조선일보는 아이 어머니의 편지가 공개되고 채 총장이 유전자 검사를 받겠다고 맞받아치자 당황한 듯 그 아이가 혼외자식이 아닐 가능성을 슬쩍 흘리기는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심할 만한 정황이 충분했다거나 여전히 채 총장의 해명을 믿을 수 없다고 몰아세웠다. 여론의 비난이 조선일보를 향하고 채 총장이 물러날 것 같지 않자 급기야 법무부 장관까지 나섰다. 채 총장을 감찰하겠다고 밝힌 뒤 한 시간 만에 채 총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조선일보는 굳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수사를 방해하려 한다는 오해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오해를 해도 할 수 없다, 뭐라고 비난하든 그런 비난을 모두 감수하고서라도 채 총장을 날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혔다. 국정원 검찰 수사가 윗선의 콘트롤을 벗어났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조선일보의 혼외자식 보도는 약점을 들춰내서 여론의 뭇매를 맞게 해서 내쫓은 뒤 검찰을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검토해 볼 수 있다. 첫째, 혼외자식이 맞다면 유전자 검사를 하면 밝혀질 일이다. 결국 채동욱 퇴출은 시간문제일 텐데 굳이 법무부 장관까지 출동해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둘째, 혼외자식이 아니라면 조선일보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이 된다. 채 총장에게 힘이 실릴 것이고 국정원 수사도 콘트롤이 어렵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유전자 검사를 받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채 총장의 자진사퇴가 결국 뭔가 구린 게 있으니까 물러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면 법무부의 어시스트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납작 엎드리기로 작정한 이상 채 총장은 유전자 검사도 받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스럽게 조선일보 보도의 진위 여부도 미궁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채 총장은 검찰의 명예를 지키거나 부당한 수사 외압에 맞서기 보다는 자신을 적당히 희생양으로 포장하는 선에서 물러나는 타협을 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선일보의 강력한 영향력을 다시 확인했다. 올드 미디어의 위기라고 하지만 아직도 1면 헤드라인에 뭘 뽑아 올리느냐에 따라 판을 뒤집고 여론을 흔들고 정치권력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최근 일련의 사건은 조선일보가 마음만 먹으면 검찰총장 하나 날리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라는 무시무시한 교훈을 남겼다. 그게 조선일보가 권력을 이용하는 방식이고 권력이 조선일보와 공존공생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일보의 혼외자식 보도가 조선일보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사실이다. 법무부 장관은 리모컨일 뿐 훨씬 윗선이 개입돼 있고 이 모든 해프닝이 결국 검찰의 국정원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을 대부분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파괴력이 여전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대부분 국민들이 그 힘을 두려워한다기 보다는 냉소하고 조소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진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조선일보의 무리수는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와 이에 기생하는 보수세력의 다급한 위기의식을 드러낸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락해 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언론윤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뉴스가 없으면 만들어내고 이슈가 안 되면 직접 이슈의 중심에 뛰어든다. 개가 사람을 무는 걸로 뉴스가 안 되니 사람이 개를 물겠다고 나선 판이다. 이번 일련의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조선일보의 숨겨진 이빨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채 총장의 혼외아들 의혹 보도가 검찰의 국정원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면 조선일보의 일련의 보도는 폭력을 넘어 사실상 범죄에 가깝다.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휘둘렀고 결국 의도했던 대로 국정원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채 총장을 끌어내렸다. 채 총장의 낙마로 아마도 국정원 수사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오히려 급격히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조선일보의 혼외아들 의혹 보도는 조선일보의 붕괴를 앞당기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은 이제 조선일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권력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오랜 동지였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음만 먹으면 검찰총장도 날릴 수 있는 조선일보, (사실 단칼에 날리지도 못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 못지않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정환 미디어오늘 기자 (미디어오늘 20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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