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605334.html
HERI가 만난 사람 / 이창현 서울연구원장
이창현 서울연구원장 / 한국방송공사 이사 / 시민환경정보센터 소장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한국방송개발원 선임연구원
만 2년이 되어가는 박원순표 서울시정은 요란하지는 않지만 전임자와 확실히 다른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이명박, 오세훈 전 시장이 경쟁력 강화, 기반시설 확충 같은 외형적 성장에 집중했다면 박 시장의 접근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치중한다. 도시는 발달했지만 그 속에 사는 시민은 행복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은 시민이 체감하는 행복을 높이는 것이 목표이다.
세심하고 부드러운 박 시장의 행정에서 핵심은 ‘소통’이다. 박 시장이 소통 전문가인 언론학자를 서울연구원 원장에 기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 듯하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이름을 바꾼 서울연구원은 시정의 비전을 세우고 정책을 개발해 행정을 뒷받침하는 서울시의 싱크탱크다. 이창현 원장을 만나 소통과 도시의 미래에 대해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9월13일 서울시 서초구 서울연구원 원장실에서 했다.
-요즘 소통이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도시와 소통이 무슨 관계인가?
“몸에 피가 통하지 않으면 병이 나듯 도시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갈등이 생겨난다. 그 단적인 예가 용산 사태라고 생각한다. 개발과 보존의 가치를 놓고 지주와 세입자 사이에 소통하고 치유하지 못하다 보니 불(火)로써 갈등이 초래되고 사람이 죽어나간 것이다. 도시에는 갈등 요소가 엄청나게 많고 이를 소통을 통해 해소하지 않으면 큰 고통이 온다. 이제는 소통이 도시의 또다른 간접시설이다. 심리적 간접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길만 잘 닦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말의 소통이 잘 이뤄지는 도시가 좋은 도시다.”
전문가 아닌 시민들이 뽑은 키워드
-소통에 중점을 둔 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우리 연구원에서 2030년 서울의 미래상을 만들어 10월 중에 완성해 발표할 예정이다. 옛날에는 이런 계획을 짤 때는 전문가들끼리 모여서 다 했다. 이번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서로 숙의해서 만들어 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뽑은 핵심 키워드(열쇳말)가 ‘소통하고 배려하는 행복한 서울’이었다. 전문가들은 르네상스나 국제경쟁력을 가운데 두고 서울플랜을 만들지만 시민들은 소통하고 배려하는 행복한 서울을 원했다.
이것만 봐도 지금까지의 시정이 ‘불통’이었고 배려가 적었고 삭막한 자본주의였다는 얘기다. 과거와 다른 것을 원하는 시민들의 말 속에 서울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시가 이런 시민의 목소리를 바로 듣고 시정을 펼치면 한층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런 게 소통을 통해 얻는 수확이다.”
‘작고 부드러운’ 디자인이 박 시장 특징
-서울시는 최근 소통하고 배려하는 도시를 만드는 방법으로 마을 만들기 같은 작은 단위의 공동체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왜 이런 작은 디자인이 중요한가?
“전임 이명박, 오세훈 시장도 시정을 디자인한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과거의 디자인이 거대하고 하드웨어 중심의 디자인이었다면 박 시장의 디자인은 작고 부드러운 게 특징이다. ‘마이크로(micro), 소프트(soft)’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박원순의 디자인은 소프트웨어를 바꾸는 것이고 이를 통해 삶의 질을 바꾸는 휴먼 디자인이다. 전임자가 간판 바꾸고 세빛둥둥섬 만들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만들었다면 박 시장은 마포구 염리동에 ‘소금길’을 만드는 디자인이다. 낙후한 우범지대의 골목길에 ‘이웃의 관심’이란 ‘코드’를 입혀 안전한 마을을 만드니까 분위기도 좋아지고 마을 주민들의 유대가 생겨났다. 이런 작고 부드러운 역량이 삶의 질을 바꾸는 것이다.”
이 원장이 예를 든 염리동 ‘소금길’은 서울시 마을 만들기 사업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다. 염리동은 과거 마포나루에 소금배가 들어올 때 소금창고가 많았던 곳으로, 재개발이 늦춰지면서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가 됐다. 골목은 어둡고 밤이면 상점도 문을 닫아 여성이나 어린이는 마음대로 다니기 어려웠던 우범지대였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해 1.7㎞의 골목길을 ‘소금길’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가로등에 노란색 옷을 입히고 비상벨과 범죄예방용 카메라를 설치했다. 집에서 키우던 화분도 골목으로 꺼내 놓고 계단과 담벼락은 예쁘게 페인트칠했다. ‘소금지킴이집’ 6가구의 대문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언제든 두드리면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 범죄가 눈에 띄게 줄고 골목길에 활기가 생겨 전국의 지자체에서 견학 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창현 원장은 9월 초 서울에서 열린 ‘사회혁신 국제회의 2013’에서 색이 다른 양말과 신발을 신고 등장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원장 뒤에 등장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갑자기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강연을 이어갔다. 사회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해결한 경험을 나누는 자리답게, 혁신은 서로 다른 생각을 어우르고 섞을 때 나온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이야기 계속 만들면 서울은 영원할 것
언론학자인 이창현 원장은 “도시는 미디어”라고 말한다.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 마셜 매클루언은 일찍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으니 이 둘을 연결하면 “도시는 메시지다”는 말이 가능할 것 같다. 실제 이창현 원장은 서울이라는 큰 도시 자체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콘텐츠라고 말한다. 이런 콘텐츠를 발굴해 이야기로 엮어주면(스토리텔링) 그것이 바로 정책이란 것이다.
-도시에도 ‘이야기’(스토리)가 필요하다는 말은 생소한 감이 있다.
“사실 도시는 스토리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뉴욕은 산업도시에서 문화와 예술, 비즈니스의 도시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면 디트로이트는 자동차도시란 신화만 간직한 채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지 못하고 쇠퇴했다. 새로운 시정은 ‘작고 부드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부드러운 것이 사실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것이다. 서울이 산업도시든 문화도시든 미래도시든 얘기를 계속 생산해 내면 서울은 영원할 것이다.”
-왜 이야기가 지금 서울 같은 도시에 중요한가?
“우리는 서구적 근대화에 가장 성공한 나라다. 이게 우리 모델이 아니기에 도시적 정신분열이 있다. 우리의 근원을 모르고 서구적 외양의 아파트만 섰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시민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고 진정한 서울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서울 ‘각석’ 탐방 프로그램 만들 계획
-서울에는 발굴할 이야깃거리가 많은가?
“서울은 한성 백제에서부터 엄청나게 많은 시루떡 같은 문화적 지층이 있는데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발굴하지 않았다. 한 예로 서울 성곽 주변의 바위에는 최고의 문필가들이 좋은 글을 써 놓은 ‘각석’이 70~80개가 널려 있다. 이런 것들이 때로는 아파트 공사 통에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훌륭한 이야깃거리인 이 각석을 전문 해설가와 함께 한바퀴 순례하는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한다. 큰돈 들이지 않고 새로운 서울의 이야기 한가지가 더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외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홍대앞 젊음의 거리든 광장시장의 떡볶이 골목이든 서울은 이야기할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지금 서울시민은 어떻게든지 역사적, 문화적인 것을 갖고 싶어하는데 그걸 제대로 제공해주는 곳이 없었다. 서울연구원이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본다.”
서울은 대한민국 지역자치 실험실
-박 시장의 비전이나 접근법이 이전 시장과 많이 다른데 공무원들이 잘 따라오는가?
“키워드를 선점하는 사람이 시대의 변화를 이끈다. 올바른 키워드를 만들어내면 공무원이 따라온다. 공무원은 상당히 엘리트들이어서 시정의 방향을 얼른 숙지한다. 나는 ‘말이 씨가 된다’는 걸 믿는다. 그래서 어떤 ‘말씨’를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새로운 말씨를 만들면 이게 점점 자라 현실이 된다. 박 시장의 핵심 ‘말씨’는 재활용 도시, 보행도시, 소통도시, 혁신도시 같은 것들이다. 시민의 변화된 욕구를 새로운 ‘말씨’로 얘기하는 것이 가능한 시점에 박원순이 시장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누가 시장이 되든 꾸준히 유지될 것이다. 서울연구원장으로서 내 임무는 좋은 ‘말씨’를 통해 서울시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다.”
이 원장은 “서울은 대한민국의 실험실”이라며 서울에서 성공한 정책이나 접근법이 전국으로 퍼져 국민 행복을 가장 우선하는 새로운 지역자치의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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