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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개업식 간판을 보면서 주인은 만족스러웠지만 주변 반응은 달랐다. 한 주부는 “신선한”이라는 표현 때문에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청년도 가게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다 아는데 “이곳에서”라는 단어는 필요 없다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주인은 두 단어를 빼고 “생선 팝니다”로 바꾸었다.

 이제는 더 고치지 않아도 되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새 간판을 본 한 손님은 가게는 물건을 파는 곳인데 왜 판다는 말이 있는지 우습다고 했다. 또 다른 손님은 생선가게라는 것을 알고 오는데 꼭 “생선”이라고 간판을 내걸어야 할지 되물었다. 결국 주인은 간판의 표현을 모두 지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 가게가 무엇을 하는 곳이지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로 중심을 지키지 않으면 본질을 망각하기 쉽다는 경고다. 2012년 대선보도 논란을 보면서 문득 이 얘기가 떠오른다.



 


 

정책 토론은 사라지고 인물 비평만 난무한다. 자사 이기주의에 몰두한 나머지 특정 정치인에 대한 편파적인 보도가 반복된다. 여론조사의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을뿐더러 후보자 간 순위 다툼만 보도한다. 핵심 사안이 아닌 주변적인 비리만 파헤침으로써 정치 냉소주의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만 조장한다. 2012년 대선보도와 관련해 언론에게 쏟아지고 있는 비판이다.

 한국 언론이 이렇게까지 후퇴했나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사실 이 논란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의 지방선거를 비롯해 그간 치러진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반복되는 얘기다.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되고 국민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주장도 비슷하다.

 매번 선거철만 되면 재연되는 연극처럼 앞으로도 그 내용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대선보도를 비롯해 국내 언론에 대한 비판이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망각했기 때문일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국가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한다. 언론은 이 과정에서 국민이 합리적이고 성숙한 선택을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복잡한 국내외 정책을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공하고, 정치인의 거짓말과 부정행위를 감시하고, 국민의 다양한 관심사가 정치권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언론의 몫이다. 그러나 그간의 대선보도에서 확인된 국내 언론의 행태는 이러한 역할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만약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공정성, 객관성과 전문성과 같은 규범적 가치를 토대로 언론의 보도를 비판하는 대신 왜 언론은 반복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행태를 보이는지, 언론이 자신의 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미리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그리고 언론이 이 책무를 자발적으로 하게 하는 인센티브는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러나 공정하고 성숙한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고 해서 책임지는 언론사도 기자도 없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유리하도록 편집을 하고,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편을 들어도 징계를 받기보다는 영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청와대와 국회에 출입하면서 쌓은 인맥을 아무런 제약없이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언론의 책무는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언론 스스로 정치적 행위자가 된 상황에서 보도의 중립성이나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언론의 잘못을 단순 비판하는 것을 넘어 상응하는 값을 지불하도록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구성원에 대한 적절한 훈육이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한다면 언론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물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원칙이다. 입법부, 행정부와 사법부를 나누어 권력을 분리시킨 것이나 사외이사제나 감사와 같은 장치를 두는 것은 모두 상호견제를 위한 것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언론이 제4부로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권력집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작 언론을 견제할 수단은 없다. 언론의 잘잘못에 대해 국민은 투표를 통해 심판할 수 없다. 시장 독과점 지위를 가진 언론사의 경우 불매운동도 별로 효과가 없다.

 언론에 대한 법적 규제는 자칫 언론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 언론의 책임을 얘기하는 것조차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국내 언론은 이런 구조에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구성원 모두 위에 군림하는 특혜를 누려왔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시민사회가 잘 발달한 곳의 언론은 이런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언론 전문 비평지가 있어 언론의 행태를 낱낱이 기록하고 평가할 때, 언론이 국민의 감시를 받을 때, 언론이 다른 구성원에 요구하는 수준의 투명성을 자신에게도 적용할 때 언론이 범할 수 있는 오류의 상당 부분은 예방된다. 그렇지만 책임을 지우고 예방하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자발성이다.

 

언론인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언론은 전문적인 영역이다. 언론인은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며, 많은 유혹을 만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한다. 다른 전문직 직업과 마찬가지로 법과 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투철한 소명의식, 높은 윤리기준, 공평무사한 태도 등은 외부에서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언론인에 대한 존중, 언론의 역할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언론인이 감당해야 할 희생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 인센티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때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언론이 신명나게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그래서 필수적이다. 책임지우기, 견제하기, 칭찬하기. 2012년에 목격하고 있는 우울한 대선보도 풍경의 본질이다.


(미디어오늘, 9/13일 기고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