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전문성, 공적 자산 그리고 행복한 공동체:
전문기자제도의 진화와 저널리즘의 미래
제갈공명의 역발상
양자강은 중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강이다. 손권과 유비가 손을 잡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오나라의 도독이었던 주유가 석양이 붉게 물든 이 강의 절벽을 두고“적벽”이란 글씨를 써넣었다 해서 적벽대전의 현장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유비의 책사였던 제갈공명은 당시 오나라에 파견되어 도독 주유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둔 주유는 어느 날 공명을 불러 열흘 말미를 드릴 테니 화살 10만개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촉나라는 너무 멀고 오나라 장인들은 일종의 태업을 벌이는 상황에서 열흘 안에 이를 조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주유의 억지였다.
공명은 애초 불가능했던 이 요구를 마다하지 않았고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한가롭게 산책하고 책을 읽었다. 공명을 제거할 명분을 찾던 주유는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공명을 아꼈던 이들은 야반도주를 권하기도 했다.
운명의 날 이른 새벽, 공명은 주유에게 미리 부탁했던 볏짚을 가득 실은 배 20척과 군사 600명을 데리고 조조의 진영으로 향했다. 양자강의 자욱한 안개를 이용한 오나라 군대의 기습이라고 생각했던 조조군은 마구잡이로 활을 쐈고 그 틈을 타 공명은 손쉽게 화살 10만개를 확보했다.
중국 고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얘기로 공명의 역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파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론의 전문성 강화를 목적으로 20년 가까이 시행되어온 전문기자제도를 다시 들춰보면서 문득 공명의 기지를 떠올린다. 목표에 거듭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다른 방안을 고민하지 못하는 데 대한 반성이다.
영화, <적벽대전>에서 주유의 아내로 나온 린즈링
전문기자제도의 어제와 오늘
한국 언론사에서 1990년대 초반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6.29선언을 통해 언론은 정부로부터 독립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인해 문을 닫았던 언론사는 물론 대기업과 종교단체는 앞다퉈 신문사를 설립했다.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에 달하는 고도 성장을 이루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케이블TV와 민영방송이 새로 출범했지만 광고시장은 풍요로운 편이었다.
1994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언했던 김영삼 정부의 정책에 따라 국제사회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언론에 대한 국민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언론은 이제 더 이상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었다. 언론계에 진출하려는 대학생이 늘면서 언론고시라는 말이 생겼고, 언론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처우도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전문기자제도를 먼저 도입한 곳은 신문사였지만 곧 방송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중앙일보>는 1994년 대규모로 전문기자를 채용했고 이들은 과학, 기술, 의학, 환경, 국제경제, 교시공학, 여성, 예술 등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했다. 모든 기자를 단기간에 전문가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없는 현실에서 이들은 일종의 마중물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장애물도 많았다. 언론사 내부에서 나름 전문성을 축적해온 기자들이 봤을 때 외부 전문가는 불편한 경쟁자였다. 언론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일부 외인부대는 스스로 하차하기도 했다. 게다가 출입처에 소속된 기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정보와 편의를 제공하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렇지만 언론의 전문화는 대세였고 이 제도의 도입을 미루었던 언론사들도 속속 전문가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하기 어려운 신문사들 역시 내부에서 전문기자를 직접 양성하는 방법으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러나 1997년의 외환위기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언론은 분명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다. 1950년 분단전쟁이 한반도의 물리적 환경을 붕괴시켰다면 외환위기와 뒤이은 경제위기는 그 밖의 모든 환경에 치유불능의 상흔을 남겼다. 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와 헤어졌다.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중산층은 물론 지역경제와 대학이 무너졌다. 정리해고가 합법화되고 비정규직이 늘면서 직업 안정성은 사라졌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대로 주저앉았고 양질의 일자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줄었다. 기업은 투자를 중단했고 막대한 현금을 쌓아둔 채 현상유지에만 매달렸다. 언론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닥친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언론사는 대규모로 인력을 줄였다. 줄어든 광고수익을 보충하기 위해 뉴스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대신 언론과 무관한 사업에 진출했다. 광고수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 국제뉴스는 물론 분석과 기획기사도 줄였다. 직원에 대한 재교육과 투자를 줄이는 한편으로 광고주와 국민의 입맛을 우선 맞추었다. 권력집단의 비위를 고발하는 대신 그들의 편에 서서 홍보를 했고 국민의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정적 후원자였던 재벌과 금융기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 없이 전파했고 스스로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전락했다. 기자의 명예와 자존심은 날로 추락했고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은 옅어졌다. 청와대와 국회를 드나들면서 구축한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사례가 늘었고 취재 대상이던 기업체의 홍보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큰 흉이 아니었다. 직업의 안정성도 떨어지고, 봉급도 낮아지고, 노동 강도는 높아지는 가운데 전문기자가 설 자리는 없었다. IT 혁명, 포털의 확산, 시민저널리즘의 등장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언론사의 광고수익은 클릭 수에 따라 달라진다. 연예인, 스포츠, 살인과 강간과 같은 자극적 뉴스가 범람하는 공간에서 복잡하거나 무겁거나 고통스러운 뉴스는 외면당한다. 과거 언론을 통해서만 대중을 만날 수 있었던 전문가 집단은 이제 블로그와 대안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직접 소통한다. 트위터, 페이스북과 스마트폰 등을 통해 누구나 정보전달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언론인이 설 자리는 줄었다.
포털과 SNS 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가 전달되고 소비되는 시대를 맞아 1차적 취재보다는 편집이 더 중요해졌다. 인터넷을 통해 무료 뉴스를 무한대로 이용하게 되면서 뉴스콘텐츠의 품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 등 극소수 언론과 달리 고품격의 차별화된 콘텐츠를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콘텐츠 유료화를 추진할 수도 없었다. 콘텐츠 경쟁이 아니라 물량 경쟁에 내몰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고임금이면서 회사의 경영에는 당장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전문기자는 자연스럽게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2012년 현재 전문기자제도는 계륵이다. 언론의 전문성 강화라는 애초의 목적은 퇴색했다. 전문기자가 활동하고 있는 분야 역시 국방, 의료, 환경, 법조, 여행 등으로 도입 초기에 비해 큰 폭으로 줄었고 언론사의 개별 입장에 따라 들쑥날쑥 한다. 일부 신문사의 경우 전문기자와 선임기자의 구분이 없으며 은퇴를 앞둔 기자들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든 경우도 많다. 물론 재정적으로 안정이 된 일부 신문사, 경제지, 통신사와 공중파 TV 및 보도전문채널에서 이 제도는 지속되고 있다.
예컨대 연합뉴스는 예비전문기자, 전문기자와 대기자로 구분하는 제도가 있고, KBS에서도 한때 전문기자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와 같은 종합지와 한국경제와 매일경제 등 경제지에서도 소수의 전문기자가 있다. 그러나 이들 회사 역시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개인적으로 역량을 키운 내부 기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전문기자라는 직위만 준다. 전문기자에 대해 회사가 특별한 지원을 하는 것도 없다. 전문기자 대신 선임기자로 임명하거나 전문기자라는 직위 자체가 없는 곳도 태반이다.
통념이라는 감옥
관성의 법칙은 생각에도 적용된다. 늘 하던 방식대로만 사고할 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다. 전문기자제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접근은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4년 이 제도가 처음 도입된 이래 많은 이들이 이 제도를 평가해 왔다. 외부 전문가 중에서 전문기자로 남아 있는 비율이 얼마인지, 이들의 영입을 통해 뉴스의 품질이 좋아졌는지, 뉴스 생산에 있어 이들의 전문성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살폈다. 이 제도가 시작된 배경이 무엇인지,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 제도의 실패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전문기자에 대한 공감대확산, 언론사주의 배려와 관심, 출입처 제도의 개선, 전문기자의 지면과 활동영역 보장 및 공채중심의 인사제도 개편과 같은 해결책도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간 제기된 질문은“전문기자제도는 어떤 제도인가? 이 제도는 어떤 배경에서 등장했는가? 현재 이 제도는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가? 전문기자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와 같은 통상적인 사고의 범주에 갇혀 있었다.
질문의 주체가 달라지면 관점은 달라진다. 남자가 아닌 여자의 관점에 섰을 때 페미니즘이 가능했다.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의 관점에서 접근한 덕분에 주5일제와 40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 전문기자제도는 애초 언론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사용자의 관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언론인 자신과 공동체의 관점에서는‘공동체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언론의 전문성 강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언론계 종사자에게 있어 전문성 제고는 왜 필요한가, 전문기자로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경영진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전문직 언론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전문기자제도 외의 다른 대안은 없는가’와 같은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현황에 대한 단순 평가와 분석을 넘어 어떻게 하면“언론의 전문성과 공익성 강화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언론사주는 물론 언론인 스스로 자발적이고 이 대열에 참가하도록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다. 언론의 전문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전문성이 향상될 경우 기자 개인에게는 어떤 이익이 주어지고, 전문적인 언론을 통해 공동체는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되는지에 대한 미래 청사진 역시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전문기자제도를 넘어서
전문기자제는 잊힐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언론계의 감초였다. 그렇지만 2012년 다시 평가해도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통찰은 없다. 그간의 성과를 감안했을 때 이 제도를 복원하거나 장애물 제거를 위해 더 노력해야 할 이유도 많지 않다. 적으로부터 화살을 조달한 공명과 같은 지혜가 필요한 시점으로 이 제도 자체가 하나의 수단으로 목적 그 자체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제도는 뉴스콘텐츠의 품질을 높임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했던 경영진의 선택이었다.
언론계 종사자들이 직접 전략을 구상했다면 이 제도와는 다른 제도가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동체 차원에서 접근했을 때도 언론사가 아닌 공동체의 필요가 강조 되었을 거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적 처방은 못되지만 물줄기라도 바꿀 수 있는 다른 전략은 가능한 걸까? 언론의 전문성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2012년 현 시점에서 그 전문성이 여전히 필요한지,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다른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국가 간 경쟁과 협력이 지속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저널리즘은 공론장의 구축과 운영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처럼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나 이 가상의 무대(symbolic stage)에 참여한다. 정치는 물론 공동체 활동과 집단의 정체성 형성이 이 무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정치권과 정부는 이 무대를 통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아젠다를 제시하고 국민의 동의를 구한다. 일반 국민은 이 무대를 통해 권력집단을 감시하며, 공동체의 현안을 공유하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공동체의 판단과 간직되거나 부정해야 할 집단의 기억 역시 이 광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으면서 자유의지에 따라 표현할 자유가 있는 이 공간을 통해 국민은 비로소 주권을 행사하며 공동체는 내부의 갈등과 분열 요소를 미리 예방할 수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또한 이 광장을 통해 국가이익과 공공이익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사건이나 이슈를 알게 되고, 공적인 논의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고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물론 역사상 그 어느 공론장도 완벽하지 않았고 언론의 공론장 관리 능력은 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적 공동체에서 언론이 누리는 특혜와 법적인 보호 등의 장치는 공론장의 관리라는 공적서비스 수행과 관련이 깊다. 한국의 불행했던 역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언론이 특정 집단과 결탁해 공론장을 왜곡할 경우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국민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은 위협을 받았다.
공론장에서 언론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도 언론은 공동체 구성원이 합리적이고 성숙한 판단을 하는데 꼭 필요한 공적지식(public knowledge)을 안정적으로 제공할 의무를 진다. 대통령을 뽑거나 한미FTA를 찬성 또는 반대하거나, 북한에 대한 원조물자를 보낼 때 국민은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하고 제대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전후좌우 맥락을 담고 있으면서, 장점과 단점이 잘 정리되어 있고, 물질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와 같은 정신적 이해관계도 고려한 정보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 공적지식은 사회적 지위, 교육수준, 경제적 여유와 상관없이 모두가 편리하게 공정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언론은 이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공정하며, 진실한”동시에 대중의 눈높이에 맞도록 가공해야 한다. 특정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대중언어 가공능력 및 정보의 효율적이고 적절한 취사선택 등이 공적지식의 제공에 수반되는 전문성이다. 언론인은 이점에서 대중과 소통할 줄 아는 학자(scholar)라고 할 수 있다.
권력집단을 포함해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감시하는 것도 언론의 몫이다. 국방, 예산, 교육, 환경, 노동, 외교, 정치 등 많은 영역은 공동체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다. 관련 분야에 대한 역사성과 정치성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할 경우 자칫 전문가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권력을 빠르게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역사적 교훈이었다.
삼성과 김앤장과 같은 권력집단의 부정과 비리를 일개 개인 또는 아마추어 시민이 파헤칠 능력도, 의지도, 수단도 없다. 검찰, 법원, 경찰, 군대, 종교단체의 일탈을 미리 경고하고, 그 파장을 분석하며,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대응을 이끌어 내는 역할 역시 언론이라는 전문가 집단을 통해서 가능하다. 공중보건, 도로, 상하수도 시설, 전력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잠재적인 위협은 무엇인지, 재난이 닥쳤을 경우 대응책은 제대로 마련되었는지에 대한 환경감시 역시 이 역할의 연장선에 있다.
언론은 또한 정의, 평등, 자유, 평화,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고 확장시킬 의무도 지고 있다. 그리고 고래가 미세한 소리를 통해 진로를 잡고 메뚜기가 더듬이를 통해 주변의 변화를 읽어내는 것처럼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는 많은 경험과 축적된 지식이 필요하다. 언론인은 따라서 일종의 탐정(investigator)이면서 운동경기의 심판(umpire)이 갖는 전문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민주공동체는 일종의 생명체다. 신체의 일부가 병들면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처럼 자살, 질병, 분열, 증오는 공동체를 위협한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많이 교육받고,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또한 자신의 이해관계는 물론 특정 조직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먼저 고려한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일상으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강자의 독단을 경계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조정할 수 있는 공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언론은 따라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한 방식으로 대변하는 한편, 공정한 중재를 통해 공동선을 찾는다. 언론을‘공적인 중재자’(public communicator)로 부르는 까닭이며 이 때 필요한 전문성은 높은 윤리의식과 소명의식 및 전체의 입장을 장기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조율하는 능력이다.
진실을 찾고 공동체의 성숙한 운영을 이끌어 가는데 있어 또 다른 중요한 덕목은 용기와 인내다. 진실을 위해 언론인은 때로 권력기관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흐르는 여론과 맞서야 할 때도 있다. 위험한 현장을 직접 방문해야 하고 자칫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적군과 범죄자를 맞아 군인과 경찰은 때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한다. 언론인 역시 진실을 위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국가이익과 공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언론인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용기, 강인한 정신력, 끈기를 갖추어야 하는 일종의 전사(warrior)다. 언론에 요구되는 이러한 자질과 능력이 학위를 따거나, 특정 출입처에 오래 출입했거나, 천부적으로 타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전문성은 길러지는 것이며, 교육을 통해 강화되는 것이며, 공동체 차원에서 지원해야 할 공적 자산이다. 게다가 글로벌 디지털 혁명을 통해 뉴스생태계가 변했지만 이 공적자산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도 국가 간 경쟁은 엄연히 지속되고 있다. 군사력, 경제력, 정보력과 문화매력에서 우위를 가진 국가는 이를 활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를 만들어 왔다. 제국을 운영했던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 일찍부터 국제적 통신사가 발달했으며, 지금도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보질서가 지속되고 있다.
국제사회에 대한 공적지식은 미국과 영국 등 서방언론이 주로 제공하고 있으며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들 언론이 전해주는 지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프랑스, 러시아, 중국, 베네수엘라와 카타르와 같은 일부 국가들이 최근 24시간 영어뉴스 채널을 설립해 자국이 필요로 하는 공적뉴스를 직접 생산하고, 자국의 관점을 국제사회로 전달하며,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를 가공하고 소비하는 것 역시 국제질서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강대국일수록 다른 국가의 언론을 이용하기 보다는 자국의 특파원을 직접 파견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이익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고 공적지식으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국가공동체에 꼭 필요한 유능한 특파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고 지속적인 투자와 재교육이 필요하다. 물론 인터넷 등을 통해 과거에는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지식의 출처는 중요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가공되어야 하며, 전후맥락에 따라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장악하기 위한 뉴스전쟁이 일상화 되고, 대규모의 홍보전문가(spin doctors)를 고용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 늘어나고, 특정 국가와 기업 또는 단체의 후원을 통한 담론생산이 보편화 된 상태에서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공적지식을 제공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외부에서 공짜로 주어진 공적지식을 통해 지적으로 설득될 경우 국가이익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거나 태도를 갖게 되는 경우도 많다. 리비아와 이라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보편적 인식과 태도가 왜곡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부 서방 국가에 유리하게 재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글로벌 시대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더욱, 전문적 언론을 통한 공적지식의 습득은 더욱 중요해졌다. 디지털 혁명을 통해 현실화된 정보풍요의 역설을 고려할 때도 언론의 전문성은 거부할 수 없다.
탐정 소설이나 범죄 수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진실은 사실이라는 수풀 너머에 숨어있다. 언론의 역할 중 하나는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국민이 언론에 바라는 것은 하지만 사실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 맥락의 전달 및 숨어있는 진실의 발굴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역할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정치인의 정책이 실현가능성이 있는지, 정책의 실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주변 인물이 정부를 이끌어 갈만한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은 아무나 줄 수 없다.
박근혜는 왜 김종인을 택했으며, 안철수는 왜 이헌재와 함께 하는지, 이들이 캠프에 합류한다는 것과 경제정책의 방향성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가진 신뢰할 만한 정보원이 필요하다. 인터넷 공간에 숨어 있으면서 자신이 제공한 지식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익명의 전문가와 언론은 다르다.
여론조작 가능성이 높아지고, 권력이 일부 집단에 집중되고, 공동체의 번영과 구성원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많아졌다는 점에서 언론의 전문적 환경감시 기능 역시 더욱 중요해졌다. 디지털 혁명을 통해 누구나 정보를 생산할 수 있지만 권력형 비리, 대기업의 내부비리, 인권유린과 같은 복잡한 사안은 여전히 주류언론의 탐사보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게다가 탐사보도의 특성상 많은 돈과 시간 및 전문성이 투자되어야 하며 법적인 문제는 물론 신체적 위협도 감수해야 한다.
최근 흥행몰이를 했던 영화 <부러진 화살> <도가니> <두개의 문> 등은 언론이 이 역할을 못하면 영화와 책 등이 대신한다는 것을 보여준 경우다. 국내 언론은 특히 MB 정부에 접어들어 환경감시의 상당부분을 포기했으며 국민의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언론의 전문성이 뉴스콘텐츠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도와 공동체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공정한 중재자 및 심판으로서의 언론 전문성 역시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불신과 반목은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게임의 공정성을 믿지 못할 때, 심판이 중립성을 잃을 때, 반칙과 편법이 기승을 부릴 때 그 게임은 지속될 수 없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국내 언론은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게임에 직접 참여했다. 공정한 중재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전문성은 외면을 받았으며 한국 사회는“각자도생”(각자 알아서 살 도리를 찾는)“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황으로 내몰렸다. 조중동으로 알려진 보수언론은 정부, 여당, 재벌과 검찰로 구성된 권력카르텔에 가담했고 한겨레와 경향 등 일부 야당지는 그 반대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이 중재역할을 포기한 가운데 약육강식이 진행되었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이익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좌절감과 분노에 내몰린 이들은 자살, 성폭행,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한국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는 일상적인 위험사회로 변했다. 물론 2012년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가 반드시 언론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재자 및 심판자로서의 언론 전문성이 제대로 작동했을 경우 문제의 상당 부분은 줄어들 수 있었다. 전사로서의 언론 전문성도 여전히 유효하다.
언론인은 다른 전문가 집단에 비해 많은 특권을 누린다. 일반 국민과 달리 권력자와 유력인사를 만나고, 교류하고, 각종 편의를 제공받는다. 청와대, 국회, 정당을 출입할 경우에는 서민이 상상할 수 없는 정치적 자본(political capital)을 얻을 수 있다. 정치인이 되거나, 청와대, 기업 및 대학의 홍보팀으로 옮아가는데 이 자산이 큰 몫을 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을 비롯해 삼성언론재단, LG상암재단 등 각종 단체가 후원하는 프로그램도 많다. TV 출연이나 지면을 통해 쉽게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이를 이용해 외신대변인, KT 상무, 대통령 후보 등의 파격적인 특혜를 누리기도 한다.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또는 손해배상 등에서 일반인과는 다른 적용을 받으며, 공익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책임을 면제받는다. 전문직으로서 이 직업이 감당해야 할 특별한 위험을 감안한 사회적 배려다.
과거에 비해 언론인이 현장에서 부닥치는 위험은 크게 줄지 않았다. 인터넷 등을 통해 사이버 테러와 감시를 당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순발력, 판단력, 적응력, 용기와 인내가 더욱 필요한 시기다. 그러나 국내 언론인에서 이러한 전사로서의 전문성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언론은 재벌과 정부의 당근과 채찍에 순치되었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 등에서 보는 것처럼 현장에 직접 나가 있는 종군기자도 거의 없다. 출입처를 벗어나 현장에서 직접 취재를 하는 경우도 드물고 따돌림 당할 것을 각오하고 소수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드물다. 반일, 반중, 반북과 같은 집단적 사고를 앞에 두고도 용기 있게 발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군중심리에 편승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대중을 거슬러 올곧은 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언론의 전문성은 공적 자산이다. 공적 자산의 붕괴는 공동체의 손실로 이어진다. 공적 자산의 확충, 관리 및 개선의 책임은 또한 공동체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전문기자제도는 언론사의 경쟁력 강화라는 좁은 안목에서 추진되었다. 언론사가 주체였기 때문에 이 제도의 운영과 폐지는 개별 언론사가 결정했다. 언론인은 이 제도의 입안과 집행 및 유보에 별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 제도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이 제도는 언론의 전문성 강화라는 목표와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외부전문가의 경우 학자로서의 전문성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탐정으로서, 중재자로서, 심판으로서, 전사로서의 전문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에서도 이들의 전문성 수준은 높지 않았다. 내부에서 충원된 경우, 기존의 관행에서 탈피하기 어려웠고 전문성의 덕목을 특별히 훈련받을 기회도 없었다. 전문직으로 활동하기에는 업무의 자율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언론사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개별 회사의 이익관계에서 자유롭지도 않았고 언론인의 특권도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에만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언론의 전문성 강화라는 목표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와 언론인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게 된다.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은 좌절한다. 좋은 정치인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인도 많다. 목표를 명확하게 아는 것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실천 전략을 짜는 것과 목표를 이룬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좋은 전략일수록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인다. 전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실천 가능성이며, 모방할 수 있는 실제 모델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프로 기자의 일상에서 배우는 역발상
언론계 경력 20년째를 맞은 H씨는 현재 일본계 신문사의 서울 지국장이다. 한국인이면서 드물게 지국장을 맡고 있는데 중국 특파원을 거쳐 서울에서만 10년째 근무 중이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특히 일어는 수준급으로 이코노미스트 일본판에 정기적으로 투고를 한다.
국내 IT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로 특히 태양광 산업 등에서는 가장 식견이 높은 편에 속한다.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등에 출입하지만 특별한 출입처에 속해 있지는 않다. 한국의 정보통신에 관한 글을 많이 쓰지만 필요한 경우 정치 등 다른 분야도 다룬다. 매일 기사를 쓰지는 않는다. 평균 하루 한건 정도의 기사를 작성한다. 매월 도쿄를 방문하는데 주로 회사 측에서 마련한 독자와의 간담회 또는 특강을 위해서다.
관련 분야에 있는 일본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경우 방문지를 조율하고, 국내 주요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일행과 동행한다. 정년은 65세로 정해져 있지만 본인이 희망할 경우 그 이상도 일할 수 있다. 임금 수준 역시 국내 대기업 부장급으로 생활에는 지장이 없고 교수나 공무원 등으로 굳이 이직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한다. 국내에서 학부를 졸업한 이후 석사는 일본에서 마쳤다.
일본계 신문에 다니는 H국장이 이상적인 모델은 아닐 수 있다. H국장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함의는 그럼에도 풍부하다. 공적지식 측면에서 봤을 때 H국장은 다른 그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을 갖고 있다. 국내 IT 업계에 대한 그의 전문지식은 학위로 평가할 수 없다.
국내에서만 10년째 취재한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IT업계 동향, 쟁점, 관련 법안, 역사적 변화 과정 및 주요 이해당사지에 대한 정보에 있어 전문가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전공 관련 학위와 무관하게 전문성을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국내의 몇 안 되는 전문기자와 닮았다. 전문성 강화에 있어 지적 호기심, 인내 및 꾸준한 투자와 같은 개인적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회사의 인사 및 인재관리 정책도 중요하다.
한국 언론사와 달리 외국 언론사는 본인이 원하는 경우 동일 분야를 담당하도록 한다. 이 회사 역시 10년 이상 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근무하는 동안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해 준다. 강연회와 독자와의 만남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H국장의 한국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 독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배우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모두에게 이익이다.
이코노미스트 등에 정기 투고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으로 본인의 판단에 따라 학술대회, 박람회장, 전시회, 관련 행사 등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직원의 몸값을 높임으로써 회사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또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전문성 향상에 투자하도록 유도한다. 전문기자제도만 도입한 채 정작 기자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지원이나 동기부여에는 무관심한 한국과는 다르다. 공동체 차원의 전략도 있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지식인과 전문인은 각별한 대우를 받는다. H국장이 1회 특강으로 받는 사례비는 국내의 3배 수준이다. 만찬 등을 통해 H국장과 같은 언론인을 직접 만나기 위해 독자들은 비싼 식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기자는 더 이상 지면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대면접촉, 강연회, 현장 동행을 통해 독자는 자신의 정보원에 대한 신뢰를 쌓는다. H국장 입장에서도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비판해 주고, 지면에서 못 다한 얘기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은 큰 힘이 된다. 자신을 믿어주고 존중하는 독자를 위해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관계를 둘러싼 환경을 감시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사실을 종합하고, 필요한 전략을 제안한다. 기자는 독자의 필요를 채워주고, 독자는 그에 대한 보상을 아끼지 않고, 공동체와 언론이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저널리즘 친화적인 문화다.
저널리즘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과 사라짐이다. 불경에 나오는“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도 레종데트르(존재의 이유)를 찾으라는 의미다. 우주에서 나만이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없고는 우주도 없다는 말이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세상을 제대로 가꾸고 아끼라는 말이다.
한국 저널리즘은 위태롭다. 언론과 국민 사이에는 섬이 있다. 언론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국민은 언론에 무관심하다. 국민은 언론을 신뢰하지 않고 언론은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다. 언론사와 기자 개인의 관점에서는 모르지만 공동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언론의 레종데트르는 없다. 언론의 전문성 부족이 그 한 원인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언론이 공적지식, 환경감시, 중재자와 전사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데 언론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레종데트르는 발견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그 누군가도 처음에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공동체가 바라는 언론은 무엇인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언론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문성이 왜 중요한가를 고민할 때다. 전문기자제도에 대한 평가를 통해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통찰이다. (한국여기자협회 투고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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