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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

아시아공동체를 기다린다


19세기 말부터 약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방세계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른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방세계는(특히 그중에서도 미국) '문명'을 대표했고 서구화는 곧 '진보'와 '발전'을 의미했다. 그로 인해,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미국 배우기는 당연시 되었고 냉전을 거치면서 한·미 양국의 관계는 특수한 지위로 격상되었다.

이 시기 동안 미국 유학과 미국적 지식의 습득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필수코스가 되었고, 미국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미국 지식인과 언론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고, 미국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재단했고, 나아가 미국에게 이로운 것은 한국에도 이로운 것으로 믿었다. 한국의 내부적
노력에 의해 상당 부분 뒷받침되긴 했지만 이러한 판단은 그간 대체로 옳았으며, 한국이 가지는 '긍지'의 많은 부분은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즉 미국과의 특수 관계로 인해 한국은 미국에 대해 지속적인 무역흑자를 누렸고, 안보 비용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공동된 이해관계는 탈냉전 이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특히 지난 1997년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두드러졌다. 다시 말해, 한국의 지속적인 미국 의존은 이제 '부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으며,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다른 지역(특히 아시아)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미국과 소련이 첨예한 이념 대립을 지속했던 냉전 시기 동안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미국, 일본과 한국을 포함하는 해양세력과 소련, 중국과 북한을 포함하는 대륙세력 간의 '균형'을 통해 유지되어 왔다. 또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를 우려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존재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냉전의 붕괴와 1991년의 걸프전 이후 본격화된 미국의 일방통행식 대외정책에 대한 불신은 점차 증가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이에 1990년 미국을 배제한 아시아 안보협의체를 주장했고, 한국도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된다. 해빙의 분위기 속에서 1998년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을 추진했으며,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도 2000년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미국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하는 미국의 관점으로 볼 때 이러한 변화는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부시 행정부는 이에 2001년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선언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다시 확인하는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자연스레 한국과 미국의 입장 차이는 더욱 확대되었고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론'과 '동북아 균형자론' 등은 미국의 국가이익과 뚜렷하게 배치되었다.

 
미국과 한국의 이해 충돌은 비단 안보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안보문제에 있어 미국의 전략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는 한국, 북한과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1997년 가을 몰아닥친 아시아 외환위기는 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을 극대화 시킨 계기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아시아 위기가 발발하기 이전 이 지역 국가들의 통화가 '평가절상' 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슈퍼 301조와 같은 자국의 통상법을 동원해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 개방을 강제했다.

미국의 이러한 압력은 보호주의 장벽 완화와 자본시장 개방에 집중되었고 이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되는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아시아 위기 당시 미국은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태국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고,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한 구조개혁만을 고집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정부는 또 달러체제의 유지를 위해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통화기금(Asia Monetary Fund)과 같은 지역 간 협력 체제를 무력화 시켰고, 아시아 국가들은 이에 1997년 12월 미국을 배제한 ASEAN+3 협력체를 출범시키게 된다. 1998년 미야자와 선언(Miyazawa Initiative)과 2000년 치앙마이 선언(Chiang Mai Initiative) 등을 통해 가속화 된 아시아 국가들 간의 금융협력은
2005년, 장기적인 측면에서 아시아단일통화를 지향하는 아시안 벨라지오 그룹(Asian Bellagio Group)으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과 일본, 중국, 아세안 재무 관리들의 회합으로서 유럽의 화폐통합을 이끌었던 유럽 국가들의 벨라지오 그룹에서 따온 말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IMF에 있어 아시아 국가들의 발언권을 확대시켜 주는 한편, 미국이 포함되는 아시아태평양통화기금(Asia Pacific Monetary Fund, APMF)의 설립을 모색하고 있다(Bergste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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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간 무역협상의 지지부진과 유럽연합과 같은 지역주의의 등장 역시 아시아 국가들 간의 협력을 촉진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글로벌 시장의 형성과 자유무역의 활성화를 통해 미국의 경제력을 회복하고자 한 미국 정부의 노력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유럽은 독자적으로 유럽공동체를 출범시켰고, 이는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의 지역주의 강화로 이어졌다.

미국 역시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북대서양자유무역지대(NAFTA)를 출범시키게 된다. 그러나 멕시코 칸쿤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다자간 무역협상은 거듭 결렬되었다. 중국과 ASEAN은 이런 배경에서 자유무역협정에 합의했으며 뒤이어 일본과 아세안도 자유무역협정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 줄곧 아시아 국가들만의 경제블럭이 등장하는 것을 경계했고, 2005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에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협정(Asia pacific Free Trade Agreement, APFTA)을 제안하게 된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 년에 불과하다. 그간 한국은 대부분의 결정을 미국과 상의했고 군사 및 경제적 의존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아닌 다른 지역에 눈을 돌릴 이유도 없었다. 또 한국을 식민화 했던 일본이 여전히 군국주의적 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동북공정 등을 통해 지역패권의 길을 모색하는 중국이 반드시 미국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평등하기 보다는 의존적이었고,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고 한국을 지원할 것이라는 환상은 이미 외환위기 당시에 깨졌다. 뿐만 아니라, 2008년의 글로벌 위기에서 보듯 지금은 미국 스스로가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시아 국가들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궁극적으로 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은 이를 통해 미국과 보다 평등한 관계를 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연'이 아닌 '주연'이 되는 새로운 '게임'을 만들 수 있다. 예컨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IMF에서 한국은 겨우 1%에 불과한 투표권을 가지며 그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만을 누린다. 그렇지만 미국이 배제된 상태에서 2009년 5월 아세안+3 국가들 간에 합의된 ‘아시아공동펀드’에서 한국의 분담금은 16%며, 이에 따른 권리를 갖게 된다.
 

 
태평양으로 가로 막혀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과 아시아는 지리적으로 하나로 묶여 있다. 아시아 지역은 또 한국과 유사한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체험을 갖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서 한류 열풍이 뜨거운 것도 문화적 친밀성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 가는 한국 학생들의 규모는 해마다 꾸준히 늘었고, 이제 거리에서 흔하게 중국이나 베트남 또는 아시아권 학생들을 만난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민자의 규모가 100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다문화가정이 언론을 장식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앞서 지적한 것처럼 아시아공동체를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정치, 경제 및 군사적 이익은 상당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 확인된 것처럼 제2, 제3의 금융위기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길은 아시아 국가들 간의 단합에 달려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집단적 대응의 필요성으로 인해 2009년 5월에는 위에서 거론한 ‘아시아공동펀드’가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97년 당시 위기를 계기로 부각된 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동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더구나 아시아 국가들 간의 지나친 결속이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 있는 상황에서 외부적 간섭도 예상된다.

그렇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다시 맞은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또는 감성적 민족주의에 휘둘리기 쉬운 국민정서로 인해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국가이익을 추구하기 어려운 정부의 지도력만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왜 아시아는 유럽처럼 공동행동을 취할 수 없을까? 그것이 아시아의 태생적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아시아의 특수성 때문일까? 이 연구가 진행되는 2009년 현재 시점에서 여기에 대한 적절한 해답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 간의 지지부진한 협력과 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은 언론에 의해 조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 언론만 하더라도 미국에 대한 관심의 10%도 아시아에 쏟지 못했다. 국제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미국 언론을 통해 보고 있으며, 당연히 미국의 관심사가 아닌 사항이나 미국의 국가이익과 배치되는 사안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시아 위기 당시만 하더라도 말레이시아나 일본의 목소리는 전혀 전달되지 못했고, 그 결과 미국의 관점으로만 당시 위기를 이해했다. 북한이나 이란의 핵 문제,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의 문제의식, 일본의 거듭된 국제통화체제 개편 논의도 아시아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했다.

서구의 시각이 아닌 아시아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 것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국제정보질서가 서방 중심으로 짜여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서방 언론사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다. 싱가포르의 CNA(Channel News Asia)나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지원한 ANN(Asia News Network)등의 노력도 아시아의 목소리를 반영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