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일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전혀 내 의지와는 무관하지도 않다는 것을 경험할 때 마다 되뇌는 문구다.
미국의 온라인도용방지법안(Stop Onlin Piracy Act, SOPA)과 지적재산권보호법(Protect IP Act, PIPA)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브이 포 밴데타>에 나오는 가면...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2011년 10월 26일, 저작권 보호를 받는 지적재산과 짝퉁상품의 온라인 유통을 막기 위해 미국 사법당국의 권한을 대폭 확장하는 신규 법안이 제출되었다. 미국 법원의 영장을 받을 경우 문제의 웹 사이트는 광고와 지불이 정지되고, 검색엔진과 인터넷서비스업체는 이 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차단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미국 법원이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을 경우 전 세계 어떤 웹사이트도 폐쇄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단 한건이라도 저작권을 위반했다는 것이 확인될 경우 미국인이 소유하지도 않고 미국에서 운영되고 있지도 않는 한국의 네이버, 국회 도서관, 사이월드 등이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사라진다. 물론 이의신청은 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은 미국 법원이고 이 경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법안은 미국영화협회, 음반협회, 제약회사, 미디어기업, 상무부 등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반대자들은 이 법안이 인터넷에 대한 검열로 인해 표현의 자유 및 내부 고발자가 위축되고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한 혁신이 방해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2년 1월 18일 미국 법무부와 FBI는 호주에서 운영되고 있던 세계 최대의 파일 공유업체인 메가업로드닷컴을 폐쇄하고 킴닷컴 등 간부 7명을 전격 기소했다. 그러나 미국 하원의 법안 통과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온라인을 통한 저항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위키피디아, 구글, 페이스북을 포함해 7,000여개의 웹사이트들이 파업을 벌였고, 뉴욕에서는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렸다. 미국 의회는 결국 이 법안을 무기한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논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제적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는 미국 법무부, FBI, CIA 및 법안을 지지했던 기업들을 공격해 서버를 다운시켰다.
2월 28일. 국제형사기구(Interpol)는 유럽과 남미지역 15개 도시에서 어나니머스 용의자 25명을 체포했고, 이 단체는 그 보복으로‘CIA의 그림자’로 불리는 사설정보회사 스태랫포의 이메일 500만 건을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했다. 법안은 임시 보류되었지만 미국 사법당국에 의한 해외 사이트 폐쇄는 이어졌다. 지난 3월 2일 미국 국가보안국(Homeland Security)은 온라인 도박장 운영과 돈세탁 혐의로 캐나다의 억만장자 캘빈 아이러(Calvin Ayre)를 기소했고, 그가 운영하던 Bogdan.com을 폐쇄했다.
국내 언론에서 이 문제는 온라인 저작권을 둘러싼 국제적 논란 정도로 전해진다. "네티즌의 힘, 美 의원 18명 온라인보호법 지지 철회,"(연합, 12/1/20) "불법다운로드 메가업로드 설립자 화려한 생활"(연합, 12/1/23),"지재권보호법 반대, 위키피디아 off"(서울, 12/0/1/19) 등의 뉴스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쯤 되면 "미국은 어떻게 전 세계의 웹 사이트를 자기 마음대로 폐쇄할 수 있을까? 법적 근거는 두고라도 기술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비밀은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ICANN)와 핵심 도메인을 관리하는 베리사인(Verisign)이라는 회사가 모두 미국에 있고, 미국 상무부의 관리와 감독을 받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과 적대적이었던 북한은 그래서 2007년에야 국가도메인을 부여받을 수 있었고, 리비아와 소말리아 등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국가의 도메인은 한때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순수 기술적 지원을 표방하지만 이들 ICANN과 VeriSign은 국제기구도 아니고 의사결정 과정도 별로 투명하지 않다. 저작권 위반을 핑계로 미국이 불편해 하는 정보나 적대적 세력의 웹 사이트를 일방적으로 폐쇄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러시아, 중국, 제3세계 국가들이 UN 산하의 국제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을 통해 인터넷 관리의 국제화를 주장하는 한편, 미국은 "UN이 인터넷을 점령하려고 위협하고 있다"고 반발하는 이유다. 그러나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터넷을 넘어 SNS 검열에 앞장섬으로서 오히려 미국을 간접적으로 돕기까지 한다.
2011년 1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모바일 앰 심의 전담팀을 발족한다고 발표했다. 국제 평화질서 위반, 헌정질서 위반, 범죄 기타 법령 위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위반 등이 있는지를 심의해 해당 게시물의 삭제, 이용 해지 및 접속 차단 등의 시정요구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가 이러한 검열을 회피할 수 있는 기술을 전 세계에 전파할 것이라고 밝힌 가운데 정부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게다가 저작권 침해를 넘어 훨씬 광범위하게 정보를 검열하는 한국이 미국 법원의 폐쇄 결정에 반박할 수 있는 논리도 빈약하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 不見山)이요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이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이익에 현혹되어 장차 다가올 위협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정부 입장에서 불편한 소리를 잠재우고 싶은 욕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그러나 인터넷의 자율과 검열을 두고 전 세계가 한치 앞을 못 내다볼 전쟁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굳이 정보통제에 앞장설 이유는 없지 않을까? 굳이 하고 싶다면 사이버 주권이라도 좀 확실하게 챙긴 다음에 추진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이다
(신동아 4월호 미디어비평에 실린 글입니다)
그 비밀은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ICANN)와 핵심 도메인을 관리하는 베리사인(Verisign)이라는 회사가 모두 미국에 있고, 미국 상무부의 관리와 감독을 받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과 적대적이었던 북한은 그래서 2007년에야 국가도메인을 부여받을 수 있었고, 리비아와 소말리아 등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국가의 도메인은 한때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순수 기술적 지원을 표방하지만 이들 ICANN과 VeriSign은 국제기구도 아니고 의사결정 과정도 별로 투명하지 않다. 저작권 위반을 핑계로 미국이 불편해 하는 정보나 적대적 세력의 웹 사이트를 일방적으로 폐쇄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러시아, 중국, 제3세계 국가들이 UN 산하의 국제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을 통해 인터넷 관리의 국제화를 주장하는 한편, 미국은 "UN이 인터넷을 점령하려고 위협하고 있다"고 반발하는 이유다. 그러나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터넷을 넘어 SNS 검열에 앞장섬으로서 오히려 미국을 간접적으로 돕기까지 한다.
2011년 1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모바일 앰 심의 전담팀을 발족한다고 발표했다. 국제 평화질서 위반, 헌정질서 위반, 범죄 기타 법령 위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위반 등이 있는지를 심의해 해당 게시물의 삭제, 이용 해지 및 접속 차단 등의 시정요구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가 이러한 검열을 회피할 수 있는 기술을 전 세계에 전파할 것이라고 밝힌 가운데 정부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게다가 저작권 침해를 넘어 훨씬 광범위하게 정보를 검열하는 한국이 미국 법원의 폐쇄 결정에 반박할 수 있는 논리도 빈약하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 不見山)이요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이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이익에 현혹되어 장차 다가올 위협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정부 입장에서 불편한 소리를 잠재우고 싶은 욕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그러나 인터넷의 자율과 검열을 두고 전 세계가 한치 앞을 못 내다볼 전쟁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굳이 정보통제에 앞장설 이유는 없지 않을까? 굳이 하고 싶다면 사이버 주권이라도 좀 확실하게 챙긴 다음에 추진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이다
(신동아 4월호 미디어비평에 실린 글입니다)
'이슈와 쟁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신문, 죽어야 산다 (1) | 2012.03.23 |
---|---|
종편은 한국언론의 구원이 될 수 있을까? (0) | 2012.03.22 |
아시아공동체를 기다린다 (0) | 2012.03.06 |
중동 민주화와 뉴스 전쟁... (3) | 2012.03.04 |
'나는 언론이다' 경연대회를 기다리며, (0) | 2012.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