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인권전담의 국가기구다. 입법·사법·행정 3부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누구의 간섭이나 지휘도 받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정해진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며 그 역할 또한 준사법적이고 준국제적이다.’
인권위의 기본적 역할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나라 안팎이 북새통이던 8월13일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재임명됐다. 이명박 정부 6개월을 남기고 강행된 불통인사의 전형이다. 문제는 반복돼온 불통인사가 아닌 그 내용이다. 현 위원장이 지난 2009년 제5대 위원장에 재직하면서 시작된 ‘식물인권위’가 그 생명마저 다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현 위원장 연임에 반대해 온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이 대통령의 재임명을 ‘인권위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규정했다. 전국 300여개 단체로 이루어진 ‘현병철 연임반대와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세우기 전국 긴급행동’은 성명을 통해 “세계적으로 추앙받던 국가인권기구를 망가뜨린 이명박 정부는 반인권 정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며 “이 대통령이 사실상 독립기구로서의 인권위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의 인권위에 대한 태도는 출범 이전부터 적대적이었다. 대통령인수위가 나서 독립기구인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하려다 실패했다. 인권위와 시민사회의 반발이 완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사를 통한 인권위 무력화였다. 이명박 정부가 방송장악을 위해 YTN부터 낙하산 인물을 내려 보낸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인권위는 김대중 정부시절인 2001년 11월 출범했다. 초대 김창국 위원장은 군사정부 시절 시국사건을 맡은 인권변호사였다. 그는 대통령과 독립적으로 법이 정한 인권위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2003년 노무현정부 때 이라크파병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 페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재임기간 3개월에 불과했던 2대 최영도 위원장 역시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3대 조영황 위원장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수사한 특별검사였다. 사형제 폐지의견을 내놓는 한편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4대 안경환 위원장 역시 법학자로 참여연대 집행·운영위원장을 지냈다. 특히 안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촛불집회 진압과정에 대한 인권침해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와 인도주의적 대북식량 지원을 권고하는 등 인권위의 기본활동을 밀고 나갔다.
결국 안 위원장은 임기보다 4개월 앞서 2009년 7월 사임했고 5대 현병철 위원장이 이은 뒤 ‘식물위원회’에서 다시 ‘박제위원회’를 이끌게 된 셈이다. 그는 인권관련 경력이 전혀 없다. 인권문외한이라는 비판에 ‘차라리 인권을 모르는 게 장점’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가 인권위원장으로 지내온 지난 3년 동안의 행적은 그야말로 블랙코미디다. 그는 2009년 7월 인권위원장에 임명된 직후 가진 언론인터뷰에서 “인권현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2009년 12월 용산참사에 대한 입장표명 회의를 강제로 폐회하며 “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2010년 7월 사법연수원생들과의 만남에서는 우리 다문화 사회를 거론하며 “깜둥이도 같이 살고···”라는 아프리카인 비하 용어를 썼다. 이는 인권위 직원들이 현 위원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한 일간지 광고에 문제발언들을 발췌, 실었다는 점에서 더욱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 위원장이 재직하며 보여준 인권의 퇴행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는 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의 우려에서도 나타난다. 국제엠네스티는 그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위원장 연임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권위의 독립성과 신뢰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현 위원장이 “인권위는 행정부 소속”이라고 발언한 내용을 적시하기도 했다. 국제엠네스티는 또 용산참사와 MBC PD수첩 수사 등에 대한 인권위의 침묵을 비판했다. 현 위원장은 또 민간인 사찰문제 등을 청와대와 조율하는가 하면 장애인 인권침해 혐의로 인권위에 진정되기도 했다.
현 위원장이 인사청문회에서 지적받은 내용들 역시 인권위원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의 단골메뉴인 위장전입과 논문표절은 물론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 및 업무추진비 남용 등에 이르기까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인권위원장의 기본적 덕목도 갖추지 못했음이 증명된 것이다. 오죽해야 시민단체가 이번 사태를 국가인권위에 대한 ‘사망선고’로 받아들이고 있겠는가. 국가인권기구는 한 국가의 양심을 대변한다. 이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은 이제 국민의 선거심판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김광원 칼럼 (내일신문 201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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