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종주국, 영국의 위기
완벽한 국가는 없지만 부러운 국가는 있다. 한 때 지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고 지금도 미국과 더불어 국제사회를 이끌어 가는 영국이다. 2012년 기준 국민총생산(GNP) 규모는 세계 6위로 국민 1인당 GNP는 4만 불에 육박한다. 일찍이 1952년에 원폭실험에 성공했고, 원자력 잠수함과 항공모함을 가진 세계 5대 군사 강대국이다. 교육과 문화 등에서도 영국의 입지는 놀랍다. 명문대학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물론 런던정경대학 등이 있고 BBC 방송, 로이터 통신과 파이낸설 타임스 등 글로벌 언론을 보유하고 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토마스 무어,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워즈워드와 조지 바이런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문인이 즐비하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가 선포된 이래 꾸준히 구축해 온 민주주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의 존 밀턴은 1644년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를 통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진리의 편이 반드시 승리하고 생존한다”는 ‘사상의 자유경쟁’(marketplace of ideas)을 처음 주장했다. 전제군주제가 종말을 고하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된 계기였던 1688년의 명예혁명이 일어난 곳도 영국이었다.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금지를 금지한다”는 조항과 “선거의 자유, 의회의 발언의 자유, 국민 청원권을 보장한다”고 밝힌 1689년의 권리장전은 이 혁명을 통해 정립되었다.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는 1789년 프랑스의 인권선언과 “의회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는 1791년 미국의 권리장전은 모두 이 선언에 빚지고 있다.
민주주의 종주국 영국의 진가는 20세기에 들어서도 크게 퇴색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으로 이끌어 최고의 전시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윈스턴 처칠 수상은 1945년 선거에서 낙선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리더십과 평화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리더십은 다르다는 것이 영국 국민의 판단이었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가장 오랫동안 총리직을 수행했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에 대한 국민의 평가도 엄격했다. 표면적으로 영국 경제는 회복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총리에 대한 국민 신임도는 가장 낮았고 노동파업 등을 통해 정부의 일방통행은 견제를 받았다. 1997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등장했던 토니 블레어 총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 국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알려진 이라크 반전데모를 이끌었고 불법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낙선시켰다. 성숙한 시민, 깨어 있는 언론, 잘 정비된 정치 및 사법제도를 갖춘 영국은 그러나 2013년 현재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를 맞았다.
유명인, 정치인, 기업인은 물론 일반 국민들조차 불법도청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의 전화, 이메일과 음성 사서함의 내용은 언론사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사설탐정을 통해 언론사로 전달되고 이들은 이 정보를 이용해 특종을 터뜨리거나 특혜를 위한 거래에 이용한다. 일선 경찰도 업무상 취득한 정보를 이용해 언론사와 금전적 뒷거래를 한다. 경찰 수뇌부는 한발 더 나아가 불법도청으로 인한 명예훼손과 프라이버시 침해를 외면하고 심지어 관련사건을 은폐하는데 앞장선다. 매번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위임받아야 하는 국회의원 역시 언론사를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언론의 눈치를 살피고 언론을 위해 정치적, 사법적 면죄부를 제공하는 데 있어 정부 역시 뒤지지 않는다. 총리가 되고자 하는 정치인은 언론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언론사 사주가 초청하는 만찬에 참석한다. 언론이 원하거나 또는 원하지 않는 정책에 대한 교감은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신문사와 잡지사 등 회원사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면서 법적 권한도 없는 언론불만처리위원회(Press Complains Commission) 역시 국민보다는 언론 편이다. 극소수 언론사에 의한 독과점이 형성된 상황에서 언론계 내부의 자율적인 감시와 견제도 기대하기 어렵다.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제국에 휘청거리고 있는 영국의 풍경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의 등장: 머독 제국의 탄생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Absolute power decays absolutely).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선생과 학생 간에도, 사장과 종업원 간에도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 이유다. 행정부, 입법부와 사법부를 분리하고 권력 엘리트의 유착을 막기 위해 언론이라는 제4부를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제4부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언론은 정작 그 누구로부터도 견제 받지 않는다. 선출직 공무원이나 정치인과 달리 언론은 국민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 시청률과 구독률과 같은 시장을 통한 자연스런 규율도 독과점을 형성한 언론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로, 통신망과 보건시설을 외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언론에 대한 외부적 견제 역시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 보장을 위해 권장할 수 없다.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법률, 교육 분야에 부과되는 전문성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분야지만 공인된 자격증이나 자율적 윤리규정도 없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획득한 정보는 그 자체로 소득원이면서 권력의 원천으로 활용되지만 이에 대한 통제는 전적으로 언론계 내부의 양심과 자율에 맡겨야 한다. 저널리즘이 아닌 뉴스비즈니스에 눈을 뜬 루퍼트 머독이 악용했던 치명적인 약점이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뉴스코포레이션은 1923년 호주에서 설립된 뉴스리미티드의 지주회사로 출발했다. 2012년 현재 연간 매출액은 330억불로 48,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 북미,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세계 전역에서 흩어져 있으며 영화, 방송, 잡지, 신문, 인터넷, 위성방송, IPTV 등 미디어 전 분야를 아우른다. 대표적인 자회사로는 ‘20세기 폭스사, 폭스뉴스, 월스트리트저널, 스카이TV, 뉴스코어통신’ 등이 있다. 1985년 머독은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1996년 출범한 24시간 뉴스채널 폭스뉴스와 1995년부터 발간된 위클리 스탠다드를 통해 그의 영향력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CNN의 경쟁자로 출발했던 폭스뉴스는 2001년 9/11과 2003년 이라크 전쟁 등을 거치면서 급성장했고 현재 미국에서만 1억 가구 이상이 시청한다. 위클리 스탠다드 역시 부시 행정부 이후의 보수주의 정책을 대변하는 잡지로 성장했으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머독의 영향력이 확대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월스트리트저널 인수와 폭스비즈니스뉴스의 출범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은 2007년 머독의 뉴스코포레이션에 인수되었으며 당시 인수에 반대했던 폴 스티그 편집국장은 그 이후 비영리언론사 프로퍼브리카를 창간했다.
해킹게이트의 진원지였던 뉴스오버더월드는 뉴스코포레이션의 영국 계열사인 뉴스인터네셔널에 속해 있다. 영국 타블로이드판 신문 시장의 선두 주자인 '더선'과 일간지 '더타임스‘와 일요판 ‘선데이타임스’도 이 회사의 자회사들이다. 그 밖에, 머독은 위성방송업체인 BskyB의 지분 39%를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의 신문을 이용해 오프콤(Ofcom)의 정책 결정에 개입해 왔다. 영국의 타블로이드판 신문은 섹스, 스포츠와 유명인 스캔들을 다루는 대중지로 더선과 뉴스월드의 발행부수는 각각 340만부와 260만부 알려진다. 뉴스월드 한 회사에서만 1년에 약 10억 불 이상의 순이익이 남는다. 대규모 발행부수를 토대로 이들 타블로이드 신문은 보수당과 노동당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국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누린다. 실제 1997년 임기를 마친 존 메이저 총리를 비롯해, 토니 블레어(1997년~2007년), 고든 브라운(2008년~2010년)과 데이비드 카메론(2010년~현재) 총리는 모두 머독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머독에게 정치적 영향력과 막대한 수익을 안겨 주었던 뉴스월드가 불법도청의 진원지가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악마의 유혹: 레베카 브룩스의 위험한 도박
축록자 불견산(逐鹿者 不見山). 확금자 불견인(攫金者 不見人). 사슴을 쫒는 자는 산이 험하고 깊은 것을 알지 못하고 황금에 눈이 먼 자는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른다는 말이다. 영국 최연소 전국지 편집국장과 최초의 여성 편집국장 레베카 브룩스에 너무 잘 맞는 얘기다. 브룩스의 첫 출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처음 입사했던 대중지 ‘더포스트’는 발간 5주 만에 폐간되고 말았다. 1989년 브룩스는 뉴스월드의 비서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요판 잡지의 인물기사 지면을 담당했던 그녀는 1994년 다이애나비의 연인으로 알려진 제임스 휴이트를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물론 특별실을 예약하고 방 구석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함으로써 특종을 이끌어낸 당시의 경험이 얼마나 브룩스의 고속 승진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불과 4년 후 그녀는 자매지면서 영국 최대의 타블로이드 신문이었던 ‘더선’의 편집부국장으로 승진했고 2년 뒤 2000년에는 뉴스월드의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0년 6월. 당시 여덟 살이었던 사라 페인이 할아버지 농장에서 행방불명 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인근에 살고 있던 아동성폭행 전과범 로이 휘팅이 범인으로 밝혀졌고 성폭행 전과자에 대한 특별 관리 문제로 여론은 들끓었다. 브룩스는 여기에 주목했고 성폭력 전과자를 대상으로 한 ‘낙인찍기와 창피주기’(Naming & Shaming) 캠페인을 주도했다. 희생자 사라양의 부모님과 함께 아동 성폭행 전과가 있는 사람이 이사를 올 경우 이웃 주민이 알 수 있도록 하는 일명 사라법(Sarah's Law)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뉴스월드의 발행부수는 치솟았고 경쟁지였던 더미러와 데일리메일의 매출은 급감했다. 뉴스월드에서 일하는 익명의 기자가 불법도청 의혹을 제기했지만 영국경찰청은 무관심했다. 그녀의 부하 직원이었던 앤디 콜슨 편집부국장이 사설탐정 조나단 리에게 불법도청의 대가로 사례비를 지불해 왔다는 2002년 9월의 ‘가디언지’의 의혹제기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편집국장으로서 탁월한 경영 성과를 보여준 브룩스에 대한 머독의 신뢰는 더욱 확고해졌다.
2003년 더선의 편집국장으로 승진한 브룩스는 한때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었던 프랭크 브루노의 정신질환과 관련한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내 보냈다. 정신질환 자선단체 세인(Sane)의 자료를 토대로 한 일련의 유명인 관련 정신질환 기사가 연속으로 실렸다. 브룩스의 뒤를 이어 뉴스월드의 편집국장으로 승진한 콜슨과 브룩스는 잇따른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해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다. ‘문화, 미디어와 스포츠’ 상임위원회 질의에서 브룩스는 “과거 한 때 정보비 명목으로 금전적 거래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고, 콜슨은 “모든 사례는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답했다. 당시 청문회에서 이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크리스 브라이언트 의원은 그 이후 ‘더선’의 악의적 보도에 시달려야 했다.
2006년 6월 28일 머독은 보수당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카메론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고든 브라운이 이끌었던 노동당은 2010년 5월 보수당에 정권을 넘겨주었고 카메론은 총리로 선출되었다. 머독이 퇴임을 앞둔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뉴스코포레이션의 2인자 자리를 제안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머독의 미디어 제국은 그러나 2006년 8월 왕실에 대한 불법도청 수사를 계기로 또 다른 위기를 맞았다. 뉴스월드의 왕실 담당 기자였던 클리브 굿맨과 사설탐정 글렌 물케어는 2007년 1월 각각 징역 4개월과 6개월을 구형받았다. 당시 이들의 상관으로 있던 콜슨은 사임했고 곧이어 카메론 보수당 리더의 홍보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신문사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카메론에게 있어 그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2008년 여름 머독은 자가용 비행기를 보내 카메론의 자신의 휴양지로 초대함으로써 향후에 있을 정치적 연대를 확인해 주었다.
진실 투쟁: 공모자들과 새로운 고발자들
2007년 1월 잠깐 열렸던 판도라의 상자는 다시 땅 속 깊이 묻혔다. 왕실이 특별히 요청한 사건 외에 런던경시청은 다른 어떤 불법도청 사건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해킹게이트에 관한 기사는 그러나 언론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었다. 2009년 7월 가디언은 추가적인 불법도청 사례를 폭로했고 뉴스코포레이션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2009년 9월 프라이비트아이 역시 불법도청이 뉴스인터내셔널 산하 신문사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루퍼트 머독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폴 스피븐슨 경찰청장은 마침내 2009년 8월 치안감 존 예이츠를 단장으로 하는 재조사 팀을 꾸렸지만 8시간의 단독 조사를 끝으로 추가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곧 이어 열린 의회 청문회를 통해 예이츠는 “해당 사건 외에 다른 사건을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고 답변했고 뉴스인터내셔널의 법무팀장 톰 크론 역시 동일한 답변을 제시했다. 경찰청의 재조사가 예정되어 있던 2009년 9월부터 1년 동안 앤디 콜슨의 뒤를 이어 뉴스월드의 편집국장이 된 네일 윌리스로부터 폴 청장이 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드러나지 않았다. 의회 청문회의 겉도는 조사와 경찰청의 은폐노력으로 묻힐 줄 알았던 진실은 2010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0년 2월 가디언은 전직 뉴스월드 편집국장이면서 당시 카메론 보수당 지도자의 홍보책임자로 일하고 있던 앤디 콜슨을 상대로 조나단 리를 고용한 이유를 공개적으로 질문했다. 뒤이어 4월 옵저버지 또한 루퍼트 머독이 고든 브라운 수상에게 불법도청 관련 청문회를 거부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고 폭로했다. 2010년 5월 총리에 당선된 카메론은 콜슨을 국정 홍보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그의 연봉은 14만 파운드로 별정직 공무원 중 최고였다. 이미 2009년 뉴스인터네셔널의 대표이사로 승진한 브룩스와 카메론 정부의 실력자로 부상한 콜슨의 앞날은 그러나 별로 밝지 못했다. 2010년 9월 1일, 뉴욕타임스는 콜슨 밑에서 불법도청에 가담했던 내부 고발자 선 호어의 인터뷰를 게재했고 뒤이어 2011년 1월 26일 런던 경찰청은 해킹게이트를 전면 재조사하는 ‘작전명 위팅’(Operation Weeting)에 착수했다. 불법도청 피해자 중에서 일부 유명 인사를 대상으로 뉴스월드가 보상금을 지불하고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결코 열릴 것 같지 않았던 해킹게이트는 마침내 2011년 여름 밀리 다우어 사건을 계기로 전면에 드러났다.
2002년 3월 당시 13세였던 다우어는 귀가 도중 납치된 다음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런던경찰청은 2011년 6월 23일 범인으로 레비 벨필드를 기소했다. 수사 과정에서 다우어의 음성사서함이 뉴스월드 기자에 의해 불법 도청된 사실이 발견되었으며 가디언은 이를 7월4일 공개했다. 7월 8일 경찰은 2007년 구속되었던 왕실전문 기자 굿맨을 다시 체포했고 분노한 대중은 뉴스월드에 대한 광고불매 운동에 나섰다. 뉴스월드에 광고를 싣는 광고책임자의 이메일이 구글에 공개되면서 네티즌의 항의가 줄을 이었다. 불법도청의 피해자를 중심으로 세워진 ‘해커드오프’(Hacked Off)는 블로그를 통해 광고정책을 바꾸지 않는 기업의 명단을 실시간으로 공개했다. 포드자동차, 르노자동차, 코카콜라, 바디샵, 미쯔비시, 할리팩스 등 20개 이상의 광고주가 즉각 광고를 철회했고 T모빌, 오랜지, 프락터 & 갬블, 퍼스트 초이스 등이 광고정책을 재고하겠다고 공표했다. 광고주 압박은 곧이어 머독의 다른 신문사로 이어졌고 머독은 급기야 7월 10일 168년 전통의 뉴스월드 폐간을 선언했다.
불법도청, 이메일과 컴퓨터 해킹 등은 브룩스가 편집국장으로 재임했던 2000년 10월 3일부터 2006년 8월 9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브룩스는 이 기간 동안 뉴스월드의 편집국장(2000년~2003년)과 더선의 편집국장(2003년~2009년)으로 일했고 콜슨은 그녀를 대신해 뉴스월드의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당시 이들 신문사의 모기업이었던 뉴스인터내셔널 대표이사는 네슬리 힌튼이었고 톰 크론은 법무 책임자였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불법도청과 법집행 방해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머독은 물론 브룩스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카메론 총리는 7월 13일 레비슨경(Lord Leveson)을 특별검사로 하는 공개청문회를 지시했다. 언론계 전반에 걸친 불법취재 관행은 물론 언론의 자율규제, 언론과 정치 및 언론과 경찰에 관한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 이 청문회의 목적이었다. 완강하게 버티던 브룩스 역시 7월 15일 사임을 발표했는데 그녀에 대한 체포영장은 사흘 후 발부되었다. 7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뉴스인터내셔널 소속 신문에는 루퍼트 머독이 친필로 사인한 아래와 같은 전면 광고가 실렸다.
뉴스오브더월드는 다른 사람들이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사업에 종
사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 자신에게 그것을 적용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저희는 불법전화 도청과 관련한 불미스런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합니다. 이번 일로 상처를 받으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관련사건을 좀 더 빨리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후회를 합니다. 사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희 사업은 자유롭고 투명한 언론은 사회의 건강한 동력이라는 신념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신념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더 구체적인 절차를 밟을 것이며 피해자분들이 겪은 상처를 치유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말씀에도 더욱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제국의 황혼: 레비슨 보고서와 경찰의 후속 조치
루퍼트 머독과 아들 제임스 머독은 몇 차례에 걸친 의회의 출석 요청을 거부했다. 분노한 의회는 영장을 발부했고 2011년 7월 23일 마침내 청문회가 열렸다. 불법도청과 관련한 사항을 알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머독은 “뉴스코포레이션에서 뉴스인터내셔널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부하 직원들이 한마디도 언급해 주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전 세계 언론은 머독의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젊은 아내 웬디 뎅이 청문회에서 몸을 날려 오물투척을 막았다는 영웅담에만 열중했다. 뉴스월드와 더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는 사실과 뉴스코포레이션 소속 자회사 전체에 그의 편집방침이 전달된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았다. 2010년 뉴욕타임스, BBC와 프로퍼브리카 등에서 해킹게이트를 문제 삼았을 때 월스트리트 사설을 통해 이를 강력 비난했다는 사실도 언급되지 않았다.
해킹게이트가 열린 이후 영국 사회의 대응은 크게 레비슨 청문회와 불법도청과 관련한 부패경찰 수사를 포함한 후속 조사 등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청문회가 실시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6,000건 이상의 추가 피해자가 확인되었고 더선의 불법뇌물 증여 문제도 드러났다. 2012년 11월 29일 레비슨 청문회는 2,000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는 언론사 자율로 설립해 운영해 왔던 언론불만처리위원회(Press Complaints Commission)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는 문제, 정보보호법의 개정, 프라이버시 보호를 담당할 특별정보청장(Information Commissioner) 신설, 언론과 정치인 및 언론과 경찰의 관계에 대한 견제 및 감시 방안 등이 담겨 있다.
2012년 3월 가석방되었던 브룩스는 다시 구속되었으며 그녀의 남편, 운전기사, 경호원과 비서도 함께 체포되었다. 의회 ‘문화, 미디어 및 스포츠’ 상임위에서도 5월 1일 “루퍼트 머독은 불법도청을 의도적으로 간과했고, 국제적 기업을 운영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2009년 재조사를 덮었던 스티븐슨 총장은 공모 혐의로 구속되었고 예이츠 치안감은 불명예 퇴직했다. ‘작전명 위팅’은 그 이후 언론사 등으로부터 불법으로 뇌물을 받은 비리 경찰을 조사하기 위한 ‘작전명 엘베덴’과 뉴스월드에 의한 불법 컴퓨터 해킹을 조사하기 위한 ‘작전명 툴레타’ 등으로 확대되었다. 루퍼트 머독 부자 역시 2013년 가을에 열릴 정식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 사회는 2013년 3월 현재 레비슨 보고서를 전면적으로 곧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입장과 언론과 관련한 규제에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서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언론 독과점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또 언론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 장치가 작동했다면 해킹게이트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론중재, 봄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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