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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쟁점/칼럼/기고

언론복합체에 휘청대는 국제사회: 글로벌 사회의 민주주의 구출 작전

언론복합체라는 이름의 유령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반드시 민간인이 대통령이 되라는 법은 없다. 뜻밖일지 모르지만 미국의 대통령 44명 중 무려 12명이 전직 장군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을 독립시킨 공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에브러험 링컨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후 1685년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율리시스 그란트 장군도 예외가 아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를 광적인 반공주의로 몰고 갔던 조지 멕카시 상원위원을 물러나게 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5성 장군 출신이었다. 1961년 대통령직 고별 연설을 통해 그는 특수한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한 민주주의 악용 가능성을 경고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군수업체, 의회, 로비스트와 관료 등이 결탁해 국민의 안보 불안감을 높이고 군사적 충돌을 유도함으로써 돈과 권력을 얻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라는 용어가 그때 처음 알려졌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식견을 갖춘 국민만이 그들로부터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가 훼손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했던 그의 경고는 1965년 베트남 전쟁으로 현실화 되고 말았다. 정부와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언론의 집요한 비판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보였던 이 복합체는 재무부-월가-복합체(Wall Street Treasury Complex)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미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은 자신들이 10년 전 아시아에 요구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했다. 고금리 대신 금리를 낮추고, 재정적자를 확대했으며, 부실기업의 청산 및 해외매각 대신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금융위기라는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당시의 처방에는 뭔가 다른 요소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 배후로 신흥 금융복합체에 주목했다. IMF 구조개혁 프로그램에 불순함이 있었다는 주장은 컬롬비아대의 자그디시 바그와티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IMF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잘 알고 있었던 조셉 스티글리츠는 급기야 1998년 세계은행(World Bank) 보고서를 통해 이 문제를 공론화 했다. 전직 시티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루빈이 최고의사 결정자였던 재무부장관이었고 IMF 부총재였던 스탠리 피셔 역시 1998년 시티은행으로 옮아갔다는 것 역시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당시 위기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한국과 태국 등에서는 상당수의 우량기업이 외국계 자본으로 넘어갔다. 월가를 비롯한 글로벌 금융자본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고 그 비용은 국제사회의 보통 사람이 감당해야 했다. 과도한 자본이동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상화 되면서 이 복합체의 영향력도 후퇴했다. 글로벌 사회는 그러나 2103년 언론복합체(media-political complex)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해 있다.


언론복합체의 득세와 민주주의 위기


2011년 7월 영국 국민은 분노했다.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던 ‘뉴스오브더월드‘(이하 뉴스월드)의 불법도청 전모가 마침내 밝혀졌다. 그간 일부 행실이 좋지 못한 기자들에 의한 일탈 행위로 발뺌했던 이 사건은 머독 소유 회사 전반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점도 밝혀졌다. 일명 해킹게이트의 주역으로 알려진 레베카 브룩스를 비롯해 앤디 콜슨, 네슬리 힌튼과 톰 크론 등 주요 임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2000년 문제가 처음 불거진 이후 무려 13년 만이었다. 그간 가디언, 뉴욕타임스, BBC 등 많은 언론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영국 경찰은 증거가 드러난 사건을 제외한 다른 혐의는 모두 덮었다. 2009년 재조사가 시행되었지만 조사 시작 8시간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종결되고 말았다. 머독 소유의 뉴스인터내셔널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는 빗발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역시 이 문제를 외면했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뉴스 코포레이션에서 머독이 직접 세운 언론사는 거의 없다. 인수와 합병을 통한 시장 독과점 지위의 확보 및 이를 이용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가 머독의 가장 큰 전략이었다.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갈라져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지원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머독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중지 ‘더선’과 ‘뉴스월드’를 인수했다. 대중지 시장에서 70%를 차지한 머독은 영국의 정치 지형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매번 선거가 있을 때 마다 양당의 당수를 초대했고 정치적 협상을 통해 후원 세력을 선정했다. 존 메이저 총리는 머독의 ‘유럽가입’ 철회 요청을 거부한 뒤 실각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머독 방문 이후 그가 소유한 뉴스 인터내셔널 소속 신문은 일제히 노동당을 지지했고 그는 수상에 취임했다. 2010년 보수당의 데이비드 카메론 총리가 집권하는 과정에도 머독은 깊숙이 개입했다. 문제의 진원지였던 뉴스월드의 편집국장이었던 앤디 콜슨은 카메론의 홍보책임자였고 나중에 홍보수석 비서관으로 승진했다. 경찰 역시 머독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9년 재조사가 진행될 당시 폴 스피븐슨 경찰청장은 머독으로부터 다양한 편의를 제공받았으며 그의 직원이었던 네일 윌리스가 운영하던 회사에 경찰 홍보를 맡기기도 했다. 2011년 7월 해킹게이트가 완전히 열린 다음에야 이러한 추한 거래가 밝혀졌고 정치권과 경찰도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 의회는 서둘러 루퍼트 머독을 비롯해 관련 인물을 불러 청문회를 실시했다. 2012년 5월 “머독은 의도적으로 불법 사실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미디어 기업을 맡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의견서가 채택되었다. 경찰은 또 불법도청 사건을 재수사하는 한편, 언론사로부터 돈을 받고 정보를 불법 유출한 비리 경찰에 대한 수사와 컴퓨터 해킹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시작했다. 루퍼트 머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카메론 수상은 7월 13일 ’레비슨 청문회를 지시했고, 이듬해 11월 29일 2,000쪽에 달하는 ‘레비슨 보고서’가 공표되었다. 언론의 자율규제 기구였던 ‘언론불만처리위원회’(Press Complaints Commission)에 대한 개편을 포함해 언론과 경찰 및 언론과 정치의 불법 유착관계를 근절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언론복합체의 폐해는 그러나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13년 3월 현재 미국 국민의 60% 이상은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은 실수였다고 말한다. 부시행정부가 전쟁의 구실로 내걸었던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계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왓슨연구소(Watson Institute) 자료에 따르면 전쟁비용은 벌써 3조 달러를 넘어섰고 무려 4,300명에 달하는 미군이 사망했다. 최소 13만 명 이상의 무고한 이라크 민간인이 사망했고 백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반전 시위를 이끌어 냈던 이 전쟁이 가능했던 원인 중의 하나는 언론복합체였다.


9·11 테러를 당한 이후 미국은 테러의 실질적인 위협을 알았고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요커와 뉴리퍼브릭 등 비교적 진보적 입장의 언론사들도 이라크 전쟁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성조기를 배경으로 전쟁의 필요성을 연일 홍보했던 폭스뉴스와 MSNBC, CBS 등 보수적인 방송과 백악관의 필독서 위클리 스탠다드는 그 중에서도 1등 공신이었다. 폭스뉴스는 1996년에 위클리 스탠다드 1995년에 각각 머독에 의해 설립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추진했던 보수 엘리트 ‘네오콘’은 이 두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대량살상무기 의혹과 알카에다 관련설을 퍼뜨렸다. 클린턴 행정부의 의료개혁을 저지했던 공화당의 윌리엄 크리스톨은 위클리 스탠다드의 편집장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어빙 크리스톨은 네오콘의 이론적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대북 강경론자로 알려진 국무부 차관보 존 볼튼을 비롯해 이란-콘트라 반군의 주역이었던 엘리어트 아브라함과 등도 정기적인 필진의 한 명이었다. 대표적인 언론복합체로 성장한 뉴스코포레이션은 1998년 미국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인수했다. 영국의 해킹게이트가 열린 직후였던 2011년 7월 18일 WSJ은 BBC와 가디언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함으로써 머독 구하기에 동참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 소유하고 있는 MSNBC, CNBC와 NBC도 빼 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군수업체 중의 하나인 GE는 이라크 전쟁 최대 수혜 기업 중의 하나였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이들 언론복합체는 펜타곤과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미국 국민들 중 48%는 지금도 사담후세인과 알카에다의 관련설을 믿는 것으로 알려진다(David, B. New York Times, 08/04/20).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역시 언론복합체의 전형이다.


2012년 10월 이탈리아 검찰은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탈세협의로 기소했다. 원조교재와 부정부패를 비롯해 그와 관련된 법적소송만 해도 20개가 넘는다. 그가 소유한 미디어샛은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 회사다. 자회사로 Canale5, Italia 1, Rete 4 등 3개의 민영방송국과 2개의 신문 및 복수의 위성 디지털 방송을 소유하고 있다. 1994년 베를루스코니는 자회사인 ‘퍼브리딸리아’라는 홍보회사를 통해 정치계에 입문했다. 미국식 선거캠페인을 이탈리아에 처음 도입한 그는 자신에 관한 성공스토리를 연속 홍보하는 한편으로 경영전문성을 토대로 정치 혁신을 이루어 내겠다고 공약했다. 미디어의 대대적 홍보전 덕분에 그가 세운 ‘포자 이딸리아“ 정당은 원내 제1당으로 부상했다. 1994년 이후 그는 3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다.


2001년 그는 두 번째로 수상에 취임했다. 2004년에는 공영방송 <라이>를 장악하기 위해 ‘가스파리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이탈리아 방송 시장의 95%를 독점했다. 무려 300만 이상이 집결한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는 전혀 방송되지 않았다. 방송은 그 대신 온갖 종류의 쇼 프로그램과 오락물로 채워졌다. 그는 또 자신을 위한 면책 법안을 통과시키는 한편, 범죄소멸 시효도 절반으로 줄였다. 2011년 6월 유럽 재정위기가 이탈리아로 확산되면서 그는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리비아 가다피로부터 불법선거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섹스파이 등의 파문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이코미스트지가 그를 지목해 “한 국가를 망가뜨린 남자”라는 기사를 내보낸 것도 이 때였다(2011/6/11). 재임 기간 동안 이탈리아 언론의 자유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공영방송의 품격은 회복불능으로 추락했다. 퇴임 직후의 국민투표를 통해 그가 옹호했던 원자력발전소 설치와 상수도 민영화 방안은 폐지되었다. 그에 대한 면책권도 거부되었다. 그러나 2013년 치러진 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자유 이탈리아당”은 다수당으로 부상했다.

 

언론복합체 견제장치와 그 한계


자유민주주의에서 언론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의 간섭도 언론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한다. 의사와 변호사처럼 특별한 훈련을 통해 자격증을 발급받고 부당행위가 있으면 자격을 박탈하는 견제장치도 없다. 다양한 언론이 서로 경쟁할 경우 소비자의 선택을 통해 일종의 ‘시장훈육’(market discipline)을 할 수 있지만 독과점이 형성되어 있다면 효과가 없다. 도로시설이나 에너지설비처럼 이미 공공재로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또는 품질이 낮아진다고 해서 TV를 보지 않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에 ‘언론평의회’나 ‘옴부즈만’ 또는 ‘윤리강령’ 등과 같은 자율규제를 선호한다.


언론평의회(News Councils)는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과 네덜란드 등 서유럽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제도다. 인쇄매체를 비롯해 전자매체도 다루지만 영국과 스웨덴은 신문과 잡지만 규제 대상에 포함한다. 언론의 오보나 사실왜곡 또는 보도에 불만이 있는 개인은 누구나 이를 통해 불만을 제시할 수 있고 평의회는 회의를 통해 분쟁 당사자를 중재한다. 중재 내용으로는 반론권 보장 또는 오류에 대한 재공시 등이 있다. 북유럽 국가와 달리 영국에서 언론평의회는 비교적 늦게 출범했다. 당시 영국은 언론의 상업주의 경쟁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했는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와 프라이버시 침해 등에 대한 우려가 높았다. 이를 계기로 왕립신문위원회가 열렸고 여기서 나온 제안으로 1953년 평의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영국의 언론 상황은 그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0년 ‘캘커트 보고서’는 이에 언론을 견제하는 한편, 국민에 대한 인권 침해를 보다 효과적으로 방지할 목적으로 ‘언론불만처리위원회’(PCC)를 제안했다. 명칭은 다르지만 역할은 거의 유사한 조직으로는 벨기에의 ‘규율 및 중재 평의회’와 스웨덴의 ‘신문옴부즈맨’ 제도 등이 있다. 공통적으로 신문윤리강령이나 직업기준 위반 및 권리남용을 심의하는 기관으로써 언론사와 피해자 간 분쟁을 조정한다. 언론계 자율조직이기 때문에 언론인, 편집인, 언론협회가 추천하는 인물로 구성되며 법적인 강제력은 없다. 미국은 이와 달리 평의회가 별로 정착되지 않았다.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특히 경계했던 미국은 언론사 내부에 설치된 시민편집인이나 옴부즈만 등을 선호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거치면서 대기업화 된 언론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인권 침해 사례도 늘었다. 1973년 전국언론평의회(National Press Council)가 출범한 배경이었다. 그렇지만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영향력 있는 신문사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 평의회는 설립 10년 만에 문을 닫았다. 언론평의회는 2013년 현재 워싱턴 주에서만 있으며 언론사 자율로 TAO(투명성, 책무성, 공개성)를 강화하자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언론사 자율규제 방안으로 선호되는 또 다른 방안은 ‘윤리강령’(Code of Ethics)의 채택이다.


“전문 직업인의 양심은 언론인 신뢰의 기본이다.” ‘전문직 언론인 모임’(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m)이 1996년 발표한 윤리강령의 슬로건이다. 이 모임에서 밝힌 강령에는 “모든 가능한 정보원을 활용해 정보의 정확성을 높이고 의도적 왜곡은 결코 용납하지 말라, 의혹의 대상이 된 보도주체에게 최대한 반론권을 보장하라, 맥락에서 벗어난 과정이나 축소를 하지 말라, 가능한 정보원을 공개하라” 등이 담겨 있다. 대표적인 싱크탱크 퓨센터 역시 “공정하고, 정확하고, 정직하고, 책임지고, 독립적이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진실은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와 같은 윤리적 기준을 밝히고 있다. 언론인 윤리강령은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지만 2008년의 ‘윤리적 저널리즘 선도과제’(Ethical Journalism Initiative)와 같은 비교적 최근의 움직임도 있다. 국제저널리스트연맹이 주고하고 있는 이 캠페인은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모든 종류의 차별에 저항하고 최고의 수준의 전문적 저널리즘 기준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거 윤리를 언론계 내부의 문제로만 인식한 것과 달리 여기에서는 “공동체의 연대를 통해 언론인 윤리기준을 높이는 견제 시스템” 구축이라든가 “단체교섭을 통해 언론인 양심조항을 인정하도록 하는” 문제와 “의사결정 과정에서 보다 대표성을 가지도록 언론평의회를 개혁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언론에 대한 전통적인 외부 견제 장치로는 반독점 규제 법안도 있다.


프랑스의 ‘신문의 법적 체제 개혁을 위한 법률’(1986년)은 신문기업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주요 일간지를 대상으로 반독점 규칙을 부과한 제도다. 영국의 공정거래법(Fair Trading Act, 1973)과 경쟁법(Competition Act, 1998) 역시 공정경쟁과 소비자 보호를 위한 조치였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시민단체 주도로 미디어의 편견을 감시하는 기구도 있다. 미국의 페어(FAIR), 미디어감시(Media Watch), 자유언론(Free Press), 미디어연구센터(Media Research Center)와 정확한 언론(Accuracy in Media)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언론복합체의 등장과 더불어 미디어글로벌워치(Media Watch Global)와 같은 초국가적인 단체도 설립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비판적인 인사를 중심으로 2003년 설립된 이 단체는 제4부의 권력으로 성장한 언론을 견제하기 위한 시민사회 중심의 제5부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민주주의 복원을 위한 전략


언론복합체의 등장은 전 세계적인 기업집중 및 독과점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탈규제, 기업경쟁력 강화 및 국민경제 살리기 등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등이 시작되고 그간 국가의 보호를 받았던 미디어 분야에서 무한 경쟁이 진행된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의 ‘텔레커뮤니케이션법’(1996년)과 영국의 커뮤니케이션법(2003년) 등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고 미디어 기업에 대한 반독점 규정을 대폭 완화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집중과 독과점의 폐해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약한 경쟁자가 축출되고, 혁신은 사라지고, 가격은 인상된다는 점은 동일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간다는 점이 문제였다.


영국에서 루퍼트 머독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위성방송 SKY를 위해 공영방송 BBC에 대한 정책 변화를 압박했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역시 자신의 상업방송을 위해 공영방송 RAI를 무력화 시켰다. 미국의 연방커뮤니케이션위원회(FCC)가 2007년 교차소유의 제한을 대폭 완화한 것 역시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월트디즈니, 뉴스코포레이션, 타임워너, 비아콤과 씨비에스 등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았다.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소수 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였다. 특정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언론사가 없어지면서 경영진의 권력은 커졌지만 저널리스트의 노동환경은 악화되었다. 불법도청과 경찰관 매수와 같은 관행에 머독 소속 회사의 전 직원이 동원된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이탈리아 방송에서 보듯 탈정치적인 콘텐츠가 방송을 장악하면서 민주적 여론형성은 물론 문화 전반의 품위가 추락하기도 한다. 폭스 효과(Fox Effect)란 말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수적인 언론매체를 접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투표성향은 보수화 되고 궁극적으로 특정 정치집단에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언론사 자율의 규제기구는 그 효용이 다하고 있다. 영국의 PCC는 지금 현재 잠정적으로 폐쇄된 상태로 언론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보다 적극적인 규제가 논의 중에 있다. 한때 규제완화에 앞장섰던 미국의 FCC와 영국의 오프콤에서도 최근 미디어 집중과 독과점에 대한 폐해를 인정하고 있다. 여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언론평의회를 대신해 뉴스트러스트(News Trust), 미디아버그(Mediabugs)와 오보정정연맹(Report an Error Alliance) 등과 같은 인터넷 기반의 단체도 등장했다.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신문과 방송의 겸업을 허용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방송과 통신의 융합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한국 사회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신문과 방송, 4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