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문제제기: 왜 동아시아는 분열되고 있는가?
동아시아에 불신과 대립이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영토분쟁과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두려운 패권국으로 인식된다. 국제사회에서 평화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대표했던 일본 역시 군국주의 부활을 꿈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과 국제사회의 제재라는 악순환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한국, 일본과 중국이 서로를 불신하고 북한의 위협이 증가하면서 미국의 역할은 오히려 증가했다.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어느 때 보다 더 굳건해졌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모처럼 싹 틔웠던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는 빛을 잃고 있다. 역내 공동체에 대한 회의와 무관심은 그러나 현실적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
중국과 일본의 충돌 및 한반도의 일상적 안보위기는 세계 경제의 공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아시아에 있어 치명적인 문제다. 역내 해외투자가 급속히 약화될 수 있으며 금융위기가 재발할 가능성도 높다. 배타적 민족주의로 인해 확산일로에 있는 인적교류와 무역교류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전 세계 달러의 절반(4조 2,351억불)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달러화의 지속적인 하락 비용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모순도 발생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및 각국의 핵무장으로 인해 신냉전이 올 수도 있다. 역내 분열이 심화될 경우 해외자원 확보에 있어 불필요한 경쟁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협상력이 약화되는 문제도 우려된다. 분열과 대립으로 인해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적대적 여론은 개선될 조짐이 없다.
화해와 공존을 시도했던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일본의 하토야마 정부 등은 선거에서 패했다. 일본에 대해, 한국에 대해, 중국에 대해 또 북한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가졌던 정치인과 지식인은 모두 배척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 냉전이 끝난 이후 거의 사라졌던 친북과 종북이라는‘마녀사냥’이 다시 살아났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혐한(嫌韓)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대규모 반일시위가 벌어지고 일본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도 생겨났다.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분쟁과 동북공정 등으로 인해 중국은 두려운 패권국으로 의심받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했을 때와 너무도 다른 지적 분위기(intellectual milieu)로 인해 각국에서 극우파가 득세한다.
센카쿠열도, 남쿠릴열도, 남중국해와 독도 등 최근 주목받고 있는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어 왔던 문제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본격 제기되었던 1998년 에도 존재했던 문제로 단기간에 해소되지 않을 뿐더러 공동 관리를 통해 평화적으로 활용하는 국가도 많다. 중국과 한국 등에서 비판하고 있는 일본 정부가 사과를 하지 않았다거나 진정성이 없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일본 천황을 비롯해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무라야마 총리는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일본인은 물론 아시아 국민에게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는 점을 인정했고 불운한 역사에 희생되었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1998년 오부치 총리, 2005년의 고이즈미 총리와 2010년의 하토야마 총리 역시 동일한 입장을 표명했다.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더 이상의 사과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외면받거나 부정되고 있다. 한반도 핵 위기의 주범으로 비판받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가 있다.
1994년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한의 핵개발이 상당 기간 늦춰졌다는 사실과 미국과 한국 정부의 적대적 정책이 북한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Becker, 2013).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 역시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개입이 아니라‘국민 정체성’을 둘러싼 자연스런 논란이라는 점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민간 학자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역사적 관점의 차이를 좁히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며 한일 및 중일 간 이미 역사공동연구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아는 국민도 별로 없다. 게다가 아키오 타카하라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분쟁의 상당 부분은“잘못된 정보, 오해, 심리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Takahara, in Mori 2006). 2013년 3월 현재 동아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따라서 공통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며 편향적인 지식과 감정적 여론몰이에 의한 사회적 구성물이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 각국의 언론이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공동체를 실현시키는데 있어 필요한 담론전략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 공통의 이해관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연구를 위해 먼저 제기한 질문이다. 1990년 냉전 해체 이후 동아시아 각국을 둘러싼 외교·안보질서, 금융·경제질서 및 지식·정보질서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 다음, 역내 국가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적대적 여론, 불신과 오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을 분석사례로 선정했다. 한국의 여론 지형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 등 정치적 입장을 서로 달리하는 3개의 종합지를 선택해 관련 사설을 모두 분석했다.
연구문제로는 동북공정과 독도분쟁과 관련한 담론이 등장하고 확산되는 배경과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 담론은 어떤 준거담론과 파생담론 및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제기했다. 이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핵심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관련 담론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향후 공동체 실현을 위해 동아시아 지식사회가 참고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에 대한 함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II. 동아시아 공동체의 부상과 이해관계 지형의 변화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형태의 제국에 가까웠다. 영국,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서구 세력의 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동아시아는 지역적 연대감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특히 동아시아 공동체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청나라와 러시아 등을 차례로 굴복시킨 다음 일본은 대륙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조선을 택했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통합을 위한 첫 걸음을 시작했다.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그 이후 1930년대의 동아협동체, 1940년의 대동아공영권 등으로 발전했다(한상일, 2004).
일본의 패망 이후 동아시아 구상은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서 지역연대의 필요성은 별로 높지 않았다. 냉전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방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비동맹국가(NAM) 운동이 제기되었지만 지역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중국은 국공내란, 한반도 전쟁과 문화혁명 등을 거치면서 과거의 지위를 상실했다. 1972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로 잠깐 복귀했던 중국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맞아 다시 고립되었다. 패전을 맞은 일본 역시 과거의 패권주의 정책을 포기했다. 그러나 1990년 냉전이 붕괴되면서 동아시아 지형은 과거에 없었던 지각변동을 겪는다.
국가안보는 냉전 동안 아시아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은 안보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소한 갈등은 뒤로 했다. 1990년 냉전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변하기 시작했다. 쌍둥이 적자와 달러화의 지속적인 하락을 맞아 미국은 더 이상의 무역적자를 방관할 수 없었다. 미국이 우위에 있는 금융서비스, 문화상품 및 지적재산권 등에 대한 자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세계무역기구(WTO) 가 출범했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의 군사동맹국을 대상으로 그간의 편의를 축소했다. 무역수지 흑자를 위해 환율인하를 요구하는 한편으로 추가적인 시장개방과 군비분담을 요구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그간 비동맹운동(Non Alliance Movement)을 이끌었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의 발언권도 확대되었다. 1992년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동아시아권을 하나로 묶는 경제공동체 구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그러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역내 국가의 미국에 대한 불편함을 통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지형 변화는 미국달러 중심의 국제금융질서에 대한 개혁 문제를 비롯해 안보질서와 지식질서 등 전반에 걸쳐 확인되기 시작했다.
1) 외교·안보 지형의 변화
냉전이 지속되는 동안 동아시아의 물리적 안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과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세력 간의 균형을 통해 지속되었다. 인도네시아, 일본, 태국, 필리핀, 한국 등은 그 대가로 미국에 일정한 비율의 방위비를 분담하거나 자국의 영토 내에 미군 기지를 허용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대가로 때로 민주주의를 희생하기도 했고(인도네시아), 국제원조를 대신하기도 했고(일본), 국지전에 군대를 직접 파견(한국) 하기도 했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라는 안정망으로 인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군비를 상당부분 줄일 수 있었고, 그 만큼을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냉전이 지속되는 동안 미국 정부는 또 이들 동아시아 국가의 수출 시장으로 기능했고, 반대급부로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했다. 상대적으로 앞서 경제발전에 매진했던 남미에 비해 뒤쳐져 있던 아시아는 이를 발판으로 1980년 남미 외채위기 이후 도약할 수 있었다. 한국을 비롯해 싱가포르, 홍콩, 대만과 같은 신흥공업국이 등장했고 아세안 국가들도 수출 중심의 경제모델을 적극 채택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 기간 동안 안보에 있어 '보호자'의 역할을 맡았다.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고통스런 식민지를 공통적으로 경험한 동남아 국가들 입장에서 미국은 유럽 강대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이라는 역내 패권국의 위협을 막아주는 방파제였다. 미국은 또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방지하고, 역내 불량국가들을 견제하고,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는 선의의 중재자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냉전이 붕괴된 1990년대 초반 이후 동아시아 안보지형은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그간 지역안보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소련은 해체되었고, 등소평의 리더십을 통해 중국도 점차 개방되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와 일본도 잇달아 동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한 안보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정부도 전통적인 보호자 역할에서 벗어나 자국의 이익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간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던 경제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기존의 특혜를 수정하고자 했다. 추가적인 시장 개방, 자본자유화,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 금지(또는 국내기업에 대한 특혜 중지)와 같은 구체적인 압력과 회유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역할론에 대한 회의가 확대된 데는 1991년의 제1차 걸프전쟁도 큰 기여를 했다.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일방적인 무력행사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었고 지역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데 따른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도 미국은 오랫동안 균형자 역할을 했다. 구소련의 확산을 막고, 독일의 부상을 억제하고 또 유럽 국가들 간의 군사경쟁도 억제했다. 그러나 유럽 역시 미국의 독주를 불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안보질서에 대한 구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이 통일된 독일의 재무장과 군사대국화를 경계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은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이었다(왕윤종, 2002). 독일 역시 재무장을 피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번영을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미국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이 아닌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과의 연합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유럽연합과 유로존을 이끌어낸 유럽 국가들의 주된 동기 중의 하나가 과거의 군사 분쟁에 대한 혐오였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하마다, 2008). 미국과 영국이 특별 동맹국의 관계를 맺은 상황에서 이들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도 독자적인 유럽 방위군의 창설에 있었다. 유럽의 이러한 구상은 1999년 단일통화 유로화가 성공적으로 출범한 이후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를 통해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었고, 그 갈등은 2003년 제2차 걸프전쟁을 통해 더욱 뚜렷해졌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독일과 프랑스를 향해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는 '구유럽' (Old Europe)이라고 비난했고, 독일의 정치인들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히틀러에 비유하기도 했다.
유럽의 고민과 동아시아의 고민은 많이 닮았다. 특히 냉전이 끝나고 1990년대 이후 아시아 안보질서가 급변하면서 고민은 깊어갔다. 구소련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무너진 후 미국의 독주를 막을 국가는 없었다. 1991년 미국은 걸프전을 감행했다. 명목은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불법 침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지난 10년 이상 이라크를 뒤에서 후원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은 한반도에서도 재현되었다. 1994년 일촉즉발로 내몰렸던 한반도 평화는 제네바 협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다. 북한은 핵 활동에 대한 동결을 선언하고 미국과 한국 등은 그 대가로 경수로 지원 및 중유를 보급한다는 타협안이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정책이 단순한 대량무기 억제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 역시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다. 중국은 이미 잠정적인 미국의 경쟁자로 부상했고 미국 입장에서 오키나와는 중국을 봉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미국과 달리 동아시아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이나 테러리즘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는다. 실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의 위협에 따른 방어적 전략이고 중국, 러시아와 일부 독립국가연합이 참가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도 미국에 대한 공동대응의 성격이 강했다. 전 세계 군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의 국방비에 비교했을 때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국방비 증가도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평화헌법을 기초로 정규 군대가 없는 일본의 입장에서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무장은 심각한 위협이다. 또 일본의 지배를 공통적으로 경험한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 미국의 공백으로 인한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는 우려의 대상이다. 그러나 유럽과 동일한 공식이 동아시아에서도 적용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이 프랑스와 독일과 같은 합의에 도달할 경우 중국과 일본을 집단안보의 틀 속에서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군비경쟁도 억제할 수 있다. 중국의 부상이 역내 국가간 경쟁을 초래할 수는 있지만 과거와 달리“우호적이고 협력적이며 상호․호혜적인 경쟁이 가능하며 결과적으로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쳉비친, 2008). 미국의 전략은 그러나 동아시아 집단안보 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 세계 경제의 1/3 이상을 차지하면서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던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냉전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동서대결은 마무리 되었지만 중국의 급속한 성장은 미국의 리더십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lobal Posture Review)을 밝히고 중국을 잠정적 경쟁자로 선언한 이유였다. 테러 이후 대량살상무기의 국제적 유통에 대한 우려도 미국의 전략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북한과 이란 등 미국이 불량국가로 선언한 국가에 대한 봉쇄는 불가피했다. 동아시아 국가 간 해묵은 민족주의 갈등, 영토분쟁 및 상호불신에 따른 충돌의 가능성 역시 고려해야 했다. 2003년 제2차 걸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 PSI)과 미사일방어계획(Missile Defense, MD)을 추진했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이전 등에 대해 사전 억제조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구상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중국에서 대규모 반일시위가 발생하고 센카쿠 열도 및 독도 등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재현되면서 일본과 한국의 대외정책은 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적대정책에 항의해 북한은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단행한데 이어 2009년 제2차 핵실험을 했다. 한반도 안보 상황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 급속히 악화되었다. 금강산 민간인 사망 사건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냉각기에 들어섰고 급기야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공격이 이어졌다.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을 약속했던 일본의 하토야마 수상은 결국 공약을 접었고 그 여파로 사임했다. 그가 지지했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 역시 된서리를 맞았다. 뒤이어 등장한 아베 정권은 보다 강력한 미일동맹으로 회귀했다. 2013년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했고 동아시아의 평화 유지에 있어 미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2010년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이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미국,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이 다시 구축되는 동안 중국, 러시아와 이란 등은 상하이협력기구를 통해 새로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2) 경제·금융 지형의 변화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무지와 순진함은 1997년의 아시아 위기를 통해 깨지기 시작했다. 한때‘동아시아의 기적’으로까지 일컬어지던 아시아경제모델은 한 순간에 ‘패거리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전락했다((Bhagwati, 2000; Feldstein, 1998; Krugman, 2000; Wade, 2004). 신국제정보질서 (NIIO)에서 제기되었던 정보의 일방적인 흐름과 개도국에 대한 부정적 보도는 어김없이 반복되었다(이찬근, 1998; 조영철, 2009).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체제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라는 아시아의 항변은 서방언론이라는 장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유럽과 달리 자구책을 갖지 못했던 동아시아는 국제통화기금(IMF)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Hall, 2003; Radelet & Sachs, 1998).
껍질을 깨는 아픔으로 동아시아는 거듭나는 기회를 맞았다. 1997년 12월 아세안과 한중일 3국은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동아시아공동체는 비로소 꿈이 아닌 현실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글로벌 통화위기가 아시아를 넘어 브라질과 러시아로 확장되고, IMF를 거부한 말레이시아가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동아시아의 연대도 탄력을 받았다(Kaplan & Rodrik, 2001). 미국에 대한 반감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결집하게 했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공통된 이해지형'을 처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느슨한 연합체였던 아세안은 더 긴밀하게 협력했고 가깝고도 멀었던 한중일 3국도 공존과 협력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Bergstein, 1998).
그러나 동아시아 공동체의 비전을 추진하기에는 각국이 처한 이해관계도 달랐고, 미국의 간섭도 줄지 않았다. 유럽연합과 같은 형태의 단일통화 방안이 아시아에서 실현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한중일 간에는 해묵은 민족주의 갈등이 재현되었고, 역내 협력도 경제와 문화교류가 확대되는 수준에 머물렀다(이근, 2006).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도움으로 유지되는 상황에 처했고 급기야 2005년에는 아세안+3 정상회의가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미국이 진원지가 된 2008년 금융위기는 이렇듯 무력해진 동아시아가 다시금 서로의 필요성을 깨닫는 계기였다. 불가능해 보였던 다자간 통화스왑 협정(Chiang Mai Initiative Multi-lateralisation, CMIM)이 극적으로 체결되었고 대안적 통화질서에 대한 논의도 재개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국제무역질서와 통화질서의 수립과 변경에 일찍부터 참가했다. 미국과 유럽이 IMF와 WB의 총재직을 독점할 때 일본은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총재를 당연직으로 맡았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국제질서에 무관심 했거나 구조적으로 배제된 상태였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참가했던 국제질서는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개최된 각종 무역협상 (Round)이었고, 자국의 입장을 방어하는데 주력했다. UN을 중심으로 1970년대 신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 논의가 일부 진행되긴 했지만 남미와 달리 동아시아는 착실한 경제성장을 해 왔다. 중심국에 의한 주변국 경제의 착취구조라는 종속이론은 동아시아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일본에 이어 한국, 홍콩, 싱가포르와 대만이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했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의 경제수준도 꾸준히 상승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처리하면서 미국과 IMF는 많은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했다. 외환위기가 발발하기 이전 미국 정부는 역내 국가들로 하여금 과도하게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도록 압박했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역내 국가들의 통화가치를 절상하도록 유도했고, 자국의 금융산업을 위해 자본자유화를 주도했다(Gilpin & Gilpin, 2001;Wade, 2004). 1994년 멕시코 페소화 폭락을 통해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인식했으면서도, 태국의 위기를 너무 안이하게 처리했다. 미국은 멕시코 위기 때와 달리 태국 정부의 직접 지원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는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 IMF식 긴축프로그램을 강요했다. 일본 정부가 제안한 아시아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을 무력화 시켰고, IMF 프로그램을 통해 자국의 실리를 우선 챙겼다. 글로벌 투기자본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자본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의견도 묵살했다(Bhagwati, 2000; Stiglitz, 2002). 미국에 대한 동아시아 국가의 신뢰는 한 순간에 무너졌고 그 이후 반복된 통화위기를 통해 미국의 리더십은 더욱 훼손되어 갔다. 위기를 당한 국가는 물론 중국과 일본도 집단적 금융안보의 필요성을 느꼈고, 미국과 유럽 주도의 국제통화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급속히 확산되었다(김기석, 2005).
동아시아 국가들은 우선 아시아태평양협력기구(APEC)를 대신할 새로운 기구로 1997년 12월 아세안+3(APT)을 출범시켰다. 1998년에는 금융위기에 처한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동기금의 마련과 역내 국가들 간의 통화스왑에 관한 미야자와 선언(Miyazawa Initiative)을 수용했다. 뒤이어 2000년에는 통화스왑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한 치앙마이선언 (Chiang Mai Initiative)에 합의했고, 2003년에는 아시아채권시장이 공식 출범했다. 집단적으로 금융위기에 대처하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은 2005년 아시안 벨라지오 그룹과 2006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주도의 아시아 단일 통화 논의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또 멕시코 칸쿤과 도하 카다르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 실패함에 따라 역내 자유무역협정에도 적극 나섰다. 2002년 중국과 아세안은 포괄적 경제협력 구상에 합의했고, 한국과 일본도 자유무역협정을 위한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중국과 아세안은 2004년 자유무역협정에 최종적으로 합의했고, 2007년에는 일본과 아세안도 동일한 합의에 도달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전략은 경제와 금융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998년 러시아와 브라질로 외환위기가 파급된 직후부터 미국은 국제통화체제의 개편을 주도했다. 한편으로 미국 재무부는 외환위기에 처한 개도국을 중심으로 G-22 재무장관 회담을 주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입장이 반영되는 국제통화체제 개편안 마련에 착수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대외관계위 (CFR)는 1999년 '국제금융체제의 미래' (The Future of the International Financial Architecture) 보고서를 발표했고, 미국 의회 역시 2000년 이와 관련된 멜츠보고서 (Meltzer Commission Report)를 제출했다. 또한 미국은 지역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or Asia Pacific)을 제안했고, IMF로부터 독립된 아시아통화기금의 설립을 반대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출범한 주요 20개국 정상회담인 G-20 역시 미국의 이러한 대외정책과 맞닿아 있다.
일찍이 미국은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가 제안한 동아시아경제협력기구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를 정상회담으로 승격시킨 바 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영향권에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포함된 APEC과 G7은 아시아 위기 동안 아무런 역할도 못했고, 아세안+3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범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맞아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럽과 같은 집단적 금융안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과 국제통화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미국 정부는 이에 1999년 설립된 G-20을 정상급 회담으로 승격시키고, 금융안전망 구축, IMF 지분개혁, 보호주의 방지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유도하고 있다. 자본자유화를 늦추고 개별 국가의 금융보호주의를 인정하는 문제, 미국과 유럽이 독점하는 IMF와 WB의 총재직에 대한 문제, 자본자유화에 대한 속도조절, 국제신용평가회사 및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 등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는 힘들었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을 통해 아시아 국가에 대한 IMF 의결권 증가와 같은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미국 주도의 의사결정구도 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2010년 유럽 재정위기로 확산되면서 유럽의 발언권도 줄었고 G20에 대한 관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 간 경제협력은 2008년 한중일 정상회의 합의와 중국 및 일본의 아세안 FTA 체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치앙마이다자간합의를 통해 IMF와 상의하지 않아도 되는 역내 국가간 통화스왑 규모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2012년 독도분쟁의 후유증으로 한국과 일본의 통화스왑 규모는 다시 이전 상태로 회귀했다. 한중일 3국 간 FTA 협상이 진행 중에 있지만 그 진행속도는 적대적 여론에 의해 늦춰지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틈새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2005년 6월 뉴질랜드, 싱가포르, 칠레, 브루나이 등 4개국이 추진했던‘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은 이제 새로운 다자간 협상창구로 부상했다. 2010년 미국, 호주, 페루, 베트남, 말레이시아가 TPP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으며 한국을 비롯해 캐나다, 일본, 필리핀, 대만 등도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2013년 일본은 정식으로 이 기구 참여를 선언했다. 이와 달리 중국은 2012년 미국이 배제된 ‘아시아지역경제협의체’(ASEAN's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를 출범시켰다. 미국, 중국과 일본 간 주도권 경쟁이 금융을 넘어 경제협력 분야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3) 지식·정보 지형의 변화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동아시아의 지식을 주도했던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철학, 사상, 과학문명이 자연스럽게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한번 이식된 지식체계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제도가 구축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지식의 주도권은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넘어갔다.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와 심지어 유럽 국가들에서도 미국 학자들이 쓴 경제학, 정치학, 철학 및 언론학 서적을 공부한다. 브루킹스(Brookings Institute), 랜드사 (Rand Corporation), 헤리티지재단 (Heritage Foundation)과 같은 싱크탱크와 하버드대, 버클리대, 프리스턴대 등에서 생산된 국제안보와 관련한 방대한 연구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물론 제3세계 빈곤 문제에 관한 방대한 연구 작업도 IMF와 WB, 월가 금융기관 소속의 연구소, 피터슨국제경제위 (Peterson Institute of International Economics)에 소속된 경제학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Parmar, 2004). 2008년의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도 언론을 통해 등장하는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출신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자국의 대외정책과 글로벌 금융기관의 입장을 대변했다.
미국과 유럽에 대한 동아시아의 지적 의존도 및 지식 시장에서의 취약한 경쟁력은 지난 1997년 위기에서도 뚜렷이 드러났다. 196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 경제를 주도해온 미국 버클리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들은 물론 시카고대와 하버드대를 졸업한 압도적인 아시아 경제학자들에게 있어 동아시아의 몰락은 아시아모델의 실패였다. 글로벌 투기자본과 자본자유화의 문제를 지적했던 월덴 벨로(필리핀), 모하메드 마하티르(말레이시아), 에이스케 사카키바라(일본), 이찬근(한국)의 주장도 제프리 삭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자그디시 바그와티, 로버트 먼델 등 미국과 유럽에 거주하는 학자들이 동조했을 때 비로소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Kim, 2005). 금융위기의 원인과 구조개혁 방향에 대한 연구의 대부분은 미국 소재 대학과 싱크탱크에서 나왔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경제학자들은 그 연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다. 당시 위기가 아시아를 거쳐 러시아와 브라질로 확대되고, 2001년에는 급기야 IMF의 모범생이라고 알려진 아르헨티나가 위기를 맞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이후에도 미국과 유럽의 지식 주도권은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향후 개혁방안에 대한 많은 청사진들이 결정되고 있다.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이러한 지식 주도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트고 있다. 한국은 2003년 동아시아포럼(East Asia Forum)을 제안했고, 같은 해 중국 베이징에서는 동아시아싱크탱크네트워크 (Network of East Asian Think-Tanks, NEAT)가 출범했다. 일본 역시 2004년 동아시아공동체위원회(Council on East Asian Community, CEAC)를 설립함으로써 이 대열에 참가했다. 동아시아의 싱크탱크는 여전히 느슨한 형태의 네트워크에 머물고 있으며, 2007년에 합의된 아세안과 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의 진로도 불투명하다.
경제, 정치, 사상 분야에 있어 미국과 유럽의 우위 또는 동아시아의 의존성은 국제정보질서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지난 1970년대 비동맹국가를 포함한 개도국들은 보다 '공정하고 균형적'인(fair and balanced) 정보의 흐름을 요구하는 신국제정보질서 (New International Information Order) 운동을 제기한 바 있다. AP(미국), Reuters(영국)과 AFP(프랑스) 등 국제적 통신사들이 생산한 정보가 제3세계로 일방적으로 유입되고, 이들 통신사를 통해 제3세계의 부정적인 모습만이 국제사회로 전달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즉 미국과 유럽의 관점을 담은 정보가 일방적으로 전달됨에 따라 자국 정치권에 대한 제3세계 국민들의 불신은 커지고, 일방적으로 유입된 서구 문화에 따라 자국문화가 침식당하고, 정작 제3세계의 입장과 이미지는 왜곡된 채 국제사회로 전달된다는 지적이었다. 유엔경제사회위원회(UNESCO)가 주도했던 이 운동은 그렇지만 미국, 영국과 싱가포르의 반대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7년 통화위기에 직면했을 때 아시아는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매체를 갖지 못했다. 그 결과, 당시 위기에 대한 대안적인 관점과 목소리는 국제사회는 물론 동아시아 자국 국민에게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미국과 IMF의 관점을 주로 대변한 서방언론이 국제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상황을 경험했다(Hall, 2003). 미국과 영국이 국제사회의 여론을 장악하는데 대한 문제의식은 그 이후 2001년 9/11 공격, 200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 2003년의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해서도 거듭 드러났다. 남미에서는 텔레수르 (Telesur)가 2005년 출범했고, 아랍의 알자지라 (Al Jazeera)는 2006년부터 24시간 영어방송을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아시아의 문제를 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도"하고자 하는 시도는 꾸준히 시도되었다. 1999년에는 독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후원으로 아시아 뉴스 네트워크 (ANN)가 태국 방콕에 들어섰고, 2000년에는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하는 CNA(Channel News for Asia)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아시아의 의제와 관점'을 국제사회에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국가 간 협력은 부진하고, 중국의 24시간 영어채널인 CITV와 일본의 NHK 월드, 한국의 KBS 월드 등에서 보듯 개별 국가 차원의 노력만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2006년부터 논란이 되기 시작한 인터넷 공동관리의 문제는 물론 2008년의 금융위기와 2010년의 구글과 중국 정부의 분쟁 등에 있어 '아시아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IMF 위기설에 다시 휩쓸린 한국 정부가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 등을 직접 방문해 경제상황을 홍보한 것 역시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III. 분석사례, 연구문제 및 연구방법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는 2013년 현재 후퇴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미국과 더욱 강력한 동맹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중국은 아세안과 러시아 등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1998년 등장했던 아세안 +3(한중일)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3국이 서로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미국과 북한의 대립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다시 전쟁의 위기감이 감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동아시아의 균형자 역할을 자임했던 한국은 이 과정에서 갈등의 불씨를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 간에는 동북공정이 새로운 암초로 등장했다. 일본과는 해묵은 독도문제로 충돌하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는 19세기 유럽에서 출발했다. 금속활자 발명에 따른 지식의 보급과 종이신문을 통한 경험의 공유 등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베네딕트 앤더슨(1983)은 인도네시아의 경험을 토대로“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동북공정이 시작된 것 역시 이러한 국가정체성 형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만주족에 의해 청나라는 세워졌다. 뒤 이어 등장한 중화인민공화국(China)은 무려 55개에 달하는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는 과제를 떠 앉았다. 신장 위구르 민족이나 티벳 민족이 여전히 독립운동을 하는 상황에서 국가정체성 문제는 한가한 논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북한의 탈주민이 늘어가고 한국과 조선족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이들을 중국에 묶어둘 필요도 있었다(윤휘탁, 2006).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이런 배경에서 2002년 등장한 것으로 중국 동북부 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국책연구 사업을 말한다. 국내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던 이 사업은 2003년 여름 <신동아>에 실린“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을 계기로 처음 등장했다. 동북공정은 그 이후 2004년 6월 국내 언론의 보도를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중국의 지도자 후진타오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사업비만 해도 무려 3조원에 이른다는 정확하지 못한 보도 역시 이 논쟁에 불을 붙였다. 2004년 8월. 당시 노무현 정부와 중국은 고구려사 문제와 관련해“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지 않고 학술 연구에 맡기며, 역사교과서 등에‘한국 정부의 관심을 고려한다’는 합의를 발표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친중국 정책을 반대했던 일부 언론은 중국 정부의 의도적 개입설과 중국의 패권주의를 결부시키며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부각시켰다. 2004년 이후 쟁점이 된 동북공정과 달리 독도분쟁의 뿌리는 이보다 더 깊다.
한국명 독도는 일본에서 다케시마섬으로 불린다. 독도가 처음 분쟁의 대상이 된 때는 1952년으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설정해 일본의 반발을 샀다. 천연가스 등 일부 매장자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독도는 1962년 한일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당시 일본의 아주국장은“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역시“농담으로도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는 방안이 검토된 적도 있지만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협약에서 이 문제는“양국 간의 외교 노력 또는 제3국에 의한 조정”으로 정리되었다. 한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가운데 조용한 외교를 통해 해결되어 왔던 독도는 그 이후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을 통해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구역으로 합의되었다.
독도분쟁은 그러나 2003년 일본 시네마현 의회가 다케시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시네마현은 2월 22일을‘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일본 정부는 지방의회의 일에 중앙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포명했고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한·일 우호 기조를 잊지 말고 신중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조용한 외교를 원했던 한국 정부와 달리 국내에서는 일부 정치인, 시민단체와 언론을 중심으로 이를 강하게 비판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독도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데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2006년 4월 25일“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로 시작하는‘독도독트린’을 발표했다.
독도분쟁으로 인해 한일관계는 다시 냉각되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 외교를 추구했다. 2008년 7월 홋카이도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독도 문제에 대해 좀 더 기다려 달라’는 요청을 했으며 그 이후 독도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2012년 8월 이명박 정부는 한일군사보호협정에 대한 국민적인 비판에 직면했고 8월 국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낮은 지지율로 고심하고 있던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정부는 이 문제를 적극 부각시키는 한편,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독도분쟁은 양국 간 통화스와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2012년 10월 일본은 통화스왑 협정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2. 연구문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아시아의 이해관계 지형은 변하고 있다. 공동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데 따르는 비용에 비해 훨씬 크다.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는 그러나 국내에서 동북공정과 독도문제 등으로 인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한중일이 모두 관련된 이 사안에 대한 높은 관심과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로 인해 새로운 적대감도 형성되고 있다. 이 연구는 이런 배경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문제를 제기했다.
연구문제 1: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에 대한 담론이 등장한 배경과 목적은 무엇인가?
연구문제 2: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에 대한 담론은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가?
3. 연구방법
신문에서 사설은 논설위원이 매일 아침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특정 회사의 기사 선정, 편집 및 취재 인력의 배치 등은 사설과 일치한다. 사설을 분석한다는 것은 따라서 해당 언론사의 기사 전반을 살펴보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신문은 다양한 매체 중에서 일종의‘여론지도자’(opinion leader) 역할을 한다. 중산층 이상의 국민이 선호하며 정책결정자, 정치인, 지식인 및 엘리트 계층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신문은 보수지, 진보지와 중도지 등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에 대한 국내의 담론 지형을 살펴보기 위해 <동아일보> <한국일보> 및 <한겨레신문>을 이념 지형을 대표할 수 있는 신문을 택한 이유다.
동북공정에 대한 샘플은 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2004년부터 현재(2013년 3월 15일)를 기준으로 선정했다. 독도분쟁과 관련한 기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독도 독트린’을 발표하고 한일간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2008년부터 지금까지를 기준으로 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제공하고 있는 카인즈(kinds) 사설모음을 이용했으며 최종 분석된 샘플은 다음의 <표1>과 같다.
<표1> 분석샘플
구분 | 동아일보 | 한겨레신문 | 한국일보 | 합계 |
동북공정 | 31 | 19 | 22 | 72 |
독도분쟁 | 27 | 30 | 25 | 82 |
합계 | 58 | 49 | 47 | 154 |
IV. 분석결과 및 해석
1.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을 둘러싼 담론의 정치성
담론은 허위의식이 아니다. 과학적 진리와 같은 효과를 가지는 논리의 덩어리로 집단의 의견, 인식, 태도 및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담론은 유기체가 생명유지를 위해 소비하는 영양분과 같은 것으로 담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작동하는 질서는 없다. 예를 들어, 교통질서만 하더라도 안전벨트를 매거나 급출발을 하지 않거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법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통관련 담론을 통한 상식체계를 통해서다. 담론은 또한 진공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특정한 담론이 활성화 되거나 외면되는 데 있어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식체계, 상식체계, 신념체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담론을 나무에 비유할 경우 이러한 외부적 조건은 토양과 기후에 해당한다. 가령,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당시와 남북이 치열한 심리전을 치르고 있는 2013년의 상황은 북한에 대한 담론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유교담론이 확산되고 해방 이후 반공담론이 확산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담론은 특정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며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담론을 나무로 가정할 경우 정치적 목적은 씨앗의 종류에 해당한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는 속담처럼 이 씨앗에 따라 나무의 속성은 물론 꽃과 열매의 종류도 달라진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을 때와 해방 이후 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권력집단이 주도가 되어 심는 씨앗의 종류는 달랐다. 일본 또는 미국 중심의 지도력(hegemony)을 발휘하는데 있어 담론이 갖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안할 때 지배질서를 비판하거나 대안질서를 주장하는 담론은 억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권력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과거부터 꾸준히 축적되어온 기존 담론은 한꺼번에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는 격렬한 담론 경쟁이 불가피하다. 조선의 경우 지배계급의 적극적인 유교 담론 전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불교담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주요 사찰 중의 하나인 원각사나 낙산사 등은 모두 15세기 중반 세조 때 신축 또는 증축되었다.
모든 국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 교과서를 갖고 있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취사선택과 해석은 권력질서와 무관하지도 않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한국과 북한도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한다. 1999년 유로존을 탄생시킨 유렵 역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많았지만 공동작업을 통해 지금과 같은‘유럽인’이라는 집단 정체성을 이끌어냈다. 중국의 동북공정 또한 그‘본질’에 있어‘한국현대사학회’의 현대사 재해석 논란이나 일본의‘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담론작업과 다르지 않다.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논쟁은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표출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움직임은 패권주의 또는 군국주의 전략이라고 보는 것은 따라서 공정하지 않다. 관련 담론은 또한 언론을 포함한 담론 생산자가 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대변하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분석을 통해 동북공정과 독도분쟁 담론의 씨앗에 해당하는‘정치적 이해관계’가 확인되었다.
평범한 또는 별로 관계가 없는 국가의 역사연구 작업에 대해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동북공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따라서 중국의‘패권주의’부상 때문이며, 중국위협론과 맞닿아 있다. 2003년 미국이 처음 제기한 이래 국내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중국 위협론은 또한“동아시아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기존질서”(status quo)와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주도하는“대안질서”(alternative order)의 충돌이 담론을 통해 반영되고 있다. 현존하는 이해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했던 신문은 <동아일보>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해 그 속내가 드러난다.
중국이 한국을 동등한 외교 파트너로, 당당한 주권국으로 대하고 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응이다. ‘큰 나라고 인구가 많아서 그렇다’라는 말 속에는 패권주의의 그림자까지 숨어 있다. 큰 나라가 하는 일에 작은 나라는 시비를 걸지 말라는 논리라면 국제사회의 룰이나 외교는 설 땅이 없어진다(04/8/9)
중국은 무조건 북을 돕는 ‘북의 후견인’도, 우리와 손잡고 일본을 견제해 줄 ‘남의 동조자’도 아니다. ‘중화(中華) 민족주의’ 깃발 아래 동북아의 패권(覇權)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도광양회(韜光養晦·어둠 속에서 힘을 기름)’라는 말 속에 숨기고 있는 또 하나의 강대국일 뿐이다. 그 패권주의가 역사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06/9/6)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겨레>와 <한국일보> 역시 기존질서의 ‘구심력’에 얽매여 있다. 그들에게 있어 동북공정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이며 과거 중국이 누렸던 ‘권력’을 복원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이해된다. 그 예로, <한겨레>는 “고구려사 왜곡을 멈추지 않는다면 한-중 관계가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가 중국의 의도를 의심”을 살 뿐만 아니라 “이런 무리한 작업이 국제사회에서 탐욕스런 모습만 부각시키고 고립을 자초해, 결과적으로 소탐대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04/8/6 & 12/6/8). <한국일보>에서도 중국의 숨은 의도와 패권위협은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즉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반도 통일 이후의 조선족 통제 등을 겨냥한 정치적 포석이며 고구려 유적을 새로운 계기로 중국의 패권주의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04/8/4)로 “칭기즈칸도 중화민족의 영웅이고, 티베트(서남공정)는 원래부터 중국사였고, 위구르(서북공정)도 그렇고, 한국사도 그렇다(동북공정)는 주장을 선전하는 프로젝트들은 심하게 말해 문화 패권주의이고 점잖게 말해 신중화주의라고 밖에 할 수 없다”(06/9/6)고 단정한다.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이 비난을 받는 것 역시 “일찌감치 패권(覇權)국가를 준비해 온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면서 ‘중국이 한국경제의 미래’라며 착시(錯視)현상”을 부추겼고 “친중탈미(親中脫美)를 노골화” 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06/9/8). 독도분쟁에 있어서도 ‘헤게모니 질서의 유지와 변화’는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패권질서에 있어 일본은 중국에 비해 훨씬 더 믿음직한 동맹이다. 독도분쟁은 따라서 이러한 동맹관계를 깰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점에서 우선 비판을 받는다. 그 예로, <동아일보>는 “일본은 한일 관계를 넓은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공유하는 한국과의 협력을 바탕삼아 중국의 팽창과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로 한국을 계속 자극한다면 한국은 미래지향적 한일 협력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껴안기 어려워진다.”(11/3/3)라고 주장한다. <한겨레> 또한 “일본 보수우파들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그들 선대의 이런 침략 만행을 정당화하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이런 자세는 동아시아에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그걸 막아준 게 미-일 동맹이요 한-미-일 공조였다. 하지만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할 경우 일본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12/4/7)는 논리로 이 문제를 바라본다.
동북공정 담론에서 <동아일보>가 노무현 정부를 비판한 것은 역사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유화책으로 인해 한미동맹이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였다. 독도분쟁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발견된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비판하면서 <한겨레>는 “독도 문제를 비롯한 한-일 간 역사 문제는 매우 중요하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도 없고 한-일 관계의 전부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서로 절제와 냉정이 필요하다. 정부는 돌발적이거나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12/8/11)고 지적한다. 다음에 나오는 <한국일보>의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야당 대선후보 시절의 경직되고 편향된 대북 및 한미ㆍ한일관계 인식을 집권 후 아무런 조정 과정 없이 실용으로만 포장해 적용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대북정책이 조금만 더 유연해졌더라면 남북 차원에서 금강산 사건의 진상 규명 및 해결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 수정 소동도 없었을 것이다. 이전 정부 시절의 한미,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규정하고 관계 복원을 서두르다 쇠고기 졸속협상을 자초했고 일본으로부터는 독도문제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08/7/30)
역사논란이나 영토분쟁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 동북공정이나 독도분쟁을 둘러싼 담론이 생성되고 확산된 것은 따라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표면적으로 봤을 때 이들 담론에서 국가이익은 항상 거론된다. 그러나 패권질서와 국가이익이 동일시 된 상황에서 대안적 질서는 제대로 검토되지 않는다. 집단안보체제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신질서에 동의할 경우 역사논란이나 영토분쟁 등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 동북공정 및 독도분쟁 담론의 구조
담론은 순수한 창작물과는 거리가 멀다. 주어진 질서에 따라‘희소자원’의 분배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담론은 이 질서를 지키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진실인 것처럼 인식되는 논리 덩어리다. 그러므로 다음의 <표2>에서 보듯 중국과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 한국정부에 대한 평가 및 파생담론은 준거담론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 준거담론의 경계선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이 실제 어떤 행동을 하고 의도를 갖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면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해도 의심을 받는다. 반대로 기존질서를 옹호할 경우 아무리 부정적인 정책이라도 비판 없이 수용된다.
담론층위 | 세부 분류 | ||
준거담론 | 패권질서 | 점진적 이행 | 신질서 |
對 중․일 태도 | 적대적 | 비판적 지지 | 협력적 |
파생담론 | 패권위협 | 패권의혹 | 국내정치 |
진정성 & 전략적 연대 | |||
신문사 | 동아일보 | 한국일보 | 한겨레 |
준거담론은 크게 패권질서, 점진적 이행 및 신질서로 구분된다. 패권질서는 미국이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재의 동아시아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질서는 패권질서에 따른 손실이 이익을 넘어서고 있으며 유럽과 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점진적 이행은 또 중국과 일본의 의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당분간은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되 한중일 3국의 협력을 확대하자는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중국과 일본 정부에 대한 논조 또는 보도태도는 준거담론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신질서를 옹호하면서 양국 정부에 적대적인 경우는 많지 않다. 한국정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준거담론은 영향력을 미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동북공정은 특히 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부각된 담론이다.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균형자론 등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에 대해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지는 특히 비판적이었다. 주변국 정부에 대한 태도와 한국 정부에 대한 평가 등은 파생담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담론을 중심으로 내부에 포함된 주장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패권위협, 패권의혹, 국내정치, 진정성 및 전략적 연대. 파생담론은 크게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패권위협은 중국과 일본의 의도가 군사대국화(또는 패권국가)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관점이다. <동아일보>의 다음과 같은 진술문이 여기에 해당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는 단순한 과거사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달 부국강병(富國强兵) 정책을 천명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동북아질서를 새로 구축하기 위한 패권주의를 숨기지 않고 있다. 한국이 중장기적 해결을 위해 노력만 하다가는 중국의 변방으로 주저앉을 우려가 없지 않다.(동아, 04/8/16).
일본 시마네 현 주민 중에서도 ‘다케시마의 날’ 제정 같은 ‘독도 훔치기’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는 독도의 위치조차 제대로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제 땅인 양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침략의식과 지배의식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09/12/26)
‘점진적 이행’ 또는 ‘신질서’에 규정을 받는 <한겨레>와 <한국일보>에서는 그러나 패권경계라는 보다 부드러운 주장이 많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군국주의 과거에 대해서 철저한 무반성으로 일관하는 그는 놀랍게도 ‘하나의 아시아’를 주장한다. 문제는 그의 아시아는 상호 존중하는 공존의 아시아가 아니라 “선구자 일본”의 일방적 주도 아래 있는 아시아라는 데 있다. 부국강병을 통해 일본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아시아를 주도할 힘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제국주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연상시킨다(한겨레, 8/9/23).
우리는 현재의 독도ㆍ역사 갈등이 한일 양국관계를 1965년 국교정상화 이전으로 후퇴시킨 듯한 겉모습을 걱정한다. 반면 두터운 유대와 교류 기반에 흔들림이 없는 국민 다수의 자세가 든든하다. 양국 정부가 그런 국민의 뜻을 받들어 진정 모드에 접어들지 않는 한 뒷수습이 쉽지 않은 거친 실수만 연발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한국일보, 12/8/25)
공동체라는 신질서에 대해 동의는 하면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관점은 ‘점진적 이행’ 담론과 결합되어 있다. ‘국내정치’ 담론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은 본질적으로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반드시 패권주의 또는 군국주의 부활과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물론 중앙정부가 전술적 실수를 한 부분은 여기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그렇지만 국가정체성은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고 명백히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구하되 우리 스스로 국사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 관점은 <한국일보>에서 가장 뚜렷했으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치고 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나라는 드물다.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도 역사과목을 정규교과 과목으로 채택하는 등 역사를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 역사에서 과거를 배우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나치게 ‘우리 것’에 빠지는 편협한 국수주의와는 다른 것이다(05/3/30)
국민국가에서 자국의 역사는 국민적 정체성과 긍지의 원천이자, 통합의 구심점이다. 중국과 일본이 각각 중ㆍ고교 독립과목과 필수과목으로 자국 역사교육에 특히 애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지적하며 진작부터 절대 다수의 국민과 함께 한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11/4/23)
준거담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진정성’과 ‘전략적 연대’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국내 신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 중에서 ‘진정성’ 담론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관련이 깊다. 한반도는 중국에 대해 오랫동안 사대주의와 느슨한 형태의 종속 관계를 유지했고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원죄가 있다. 동북공정과 독도문제가 중앙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빚어진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별개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이 담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먼저 중국에 대한 ‘진정성’ 담론은 “중국 문화부가 발행하는 월간지 9월호에도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임을 주장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잡지는 중문판, 영문판으로 제작돼 전 세계 180여개국에 배포되는 관영 홍보책자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사 왜곡 해외 홍보전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04/9/18) 또는 “중국 언론은 지난번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과의 5개항 합의, 이번 후 주석 메시지와 노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들 중국 언론이 중국 정부의 주요 외교정책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후 주석 메시지가 단지 ‘한국 무마용’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04/8/30) 등으로 드러난다. 다음에 나오는 두 사례에서도 이 담론의 주요 주장을 잘 엿볼 수 있다.
정부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항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쪽은 “두 나라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알려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왜곡을 바로잡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태도다(한겨레, 04/7/16)
중국은 2년 전 고구려사 문제로 말썽이 일자 양국 우호 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5대 양해 사항')까지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서로 다른 문명과 다른 발전 경로를 인정하면서 경쟁과 공존이 함께 하는 국제사회를 건설하겠다(조화세계론)'는 중국의 외교 방침을 어떻게 믿겠는가?“ (한국일보, 06/9/6)
그러나 진정성 담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상은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해 전쟁 피해를 당한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사과는 드물지 않았다. 표현과 대상은 달랐지만 1995년 무라야마 총리, 1998년 오부치 총리, 2001년 고이즈미 총리, 2010년 하토야마 총리 모두 공개적으로 일본의 과오에 대해 사과했다. ‘진정성’ 담론은 그러나 일본의 반복되는 사과가 진심이 아니며 일본은 독도분쟁, 위안부문제와 역사교과서 등을 통해 거듭 약속을 어기고 있다고 본다. 정부의 공식 사과만이 아니라 정치인과 민간인 모두가 사과를 해야 진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의 사례들은 이 담론을 잘 보여준다.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은 고사하고 한국의 고유 영토까지 넘보는 일본이 한국과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일본이 지금이라도 불행한 역사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독도와 관련한 억지주장을 철회해야만 한일 관계가 정상화할 수 있다(동아일보, 12/8/11)
하지만 일본 정부의 반성 뒤엔 이를 부인하는 일부 각료와 정치인의 발언이 나왔고, 그때마다 ‘겉과 속이 다른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그래도 일본 정부는 한결 같이 담화의 내용을 유지한다고 설명해왔다. 이런 일본이 드디어 ‘속죄’의 가면을 벗고, 뻔뻔함의 속살을 본격 드러내고 있다(한겨레, 12/9/28)
그러나 최근 독도문제로 촉발된 외교 갈등에서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드러낸 퇴행적 역사인식에 비추어 왜 지금까지 역사의 상처가 다 아물지 못했는지가 확연하다. 그 동안 일본 정부가 밝힌 '사죄와 반성'이 자발적으로 표시된 진의(眞意)가 아니라 한국측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허위' 내지 '비(非) 진의'일 가능성이 커졌다(한국일보, 12/8/9).
진정성 담론과 마찬가지로 전략적 연대 역시 한국 신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패권유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 담론은 현상유지를 위해 사용되고‘신질서’에서는 미국과 중국 등에 대한 실용적 접근을 의미한다. 가령, <한국일보>는“중국의 정치ㆍ경제적 팽창과 영향력 확대는 우리의 희망과 의사와는 상관없는 현실”이며 한국의 전략은 “양자택일이나 원교근공식의 수준 낮은 사고방식”이 아닌 “창조적인 새 지평”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07/8/24). <한겨레>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중국이 이 지역에서 생산적 협력자 노릇을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나서야 한다. 국가 생존 전략 차원에서 한-중 관계를 점검하고 재정립할 때다”(12/8/24) 역시 이 관점을 담고 있다. 다음의 보기에서 알 수 있듯 이유는 다르지만 협력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일본에 대해서도 자주 발견된다.
한일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북아 대표국가로서 경제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그리고 안보 측면에서 협력하고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이익이 많다. 역사 및 영토 문제에서 갈등이 존재한다고 해도 경제 분야에서는 타협과 협력이 가능하다. (동아일보, 12/10/5)
과거 갈등의 온전한 피해자였던 이 지역의 대다수 민중은 당연히 평화 정착을 통한 번영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한-중-일 3국 지도자는 일시적 인기를 위해 배타적 민족주의에 편승하지 말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한 갈등 해소에 적극 나서기 바란다. 필요하다면 긴급 정상회의라도 열어야 한다(한겨레, 12/8/17)
한국의 경제난 극복에 일본의 협력이 절실하지만, 과도한 중국ㆍ동남아 진출을 반성하고 있는 일본에게도 한국 진출은 유력한 대안이다. 양국 관계가 상호이익에 대한 확신에 터잡아 더욱 성숙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한국일보, 09/1/13)
물론 외견상 이 담론은 동일한 주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패권유지를 준거담론으로 하는 <동아일보>에서 한일 또는 한중 협력은‘미국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겨레>의 경우 주역은 동아시아로 미국은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다. 동북공정과 독도분쟁 담론에서 이들 다양한 파생담론은 준거담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높여주는 보완재로 기능을 한다. 진정성의 부족, 국내정치적 목적, 패권주의 위협에서 공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결론은 따라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있다.
V. 마무리 및 함의
1. 마무리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역사적 산물이다. 1930년대 등장했던 동아시아 구상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퇴색했다. 냉전이 진행되던 동안 동아시아 국가는 미국의 리더십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지역주의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1990년 중반 이후 유럽연합, 북미와 남미 등에서 경제협력체가 형성되면서 동아시아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를 휩쓴 외환위기와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 및 아시아 지도자의 굴욕을 계기로 동아시아는 실체로서 다가왔다. 1998년 아세안 +3가 결성된 이후 금융협력에서 출발했던 지역공동체는 그 이후 경제협력, 문화협력과 에너지협력, 안보협력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역내 화약고였던 한반도에도 해빙기가 찾아왔고 과거의 상처와 민족주의 대립은 잦아졌다. 그럼에도 2013년 3월 그간의 성과는 간 곳이 없다.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했고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중국과 일본 간에는 해묵은 영토분쟁이 다시 불거졌고 한국은 중국은 물론 일본과도 충돌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이 미국의 리더십을 더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중국은 러시아와 더불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냉전으로 일시 사라졌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팽팽한 대결구도가 다시 살아났고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초래된 원인은 무엇일까? 동아시아 공동체는 하나의 이상향으로 유럽 모델은 도저히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 국내외 다양한 요인 중에서 이 연구는 적대적 지적 분위기 형성에 주목했으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한국의 언론을 분석했다. 국민 여론과 태도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언론은 이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고 향후 공동체에 대한 '공감과 동의'(Hearts & Minds)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도 언론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연구를 위해 국내 여론 시장에서 일종의 여론지도층을 형성하는 종합지의 사설을 분석했다. 국민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해 보수지, 중도지와 진보지를 각각 골랐으며 <동아일보> <한국일보> <한겨레>를 선택했다. 역내 공동체에 대한 태도와 인식 및 여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을 분석사례로 선정했고 모두 154개의 사설에 대한 담론 분석을 실시했다. 연구문제로는 이들 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정치적 목적은 무엇인지 및 담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로 정했다.
분석 결과, 동북공정과 독도담론은 패권질서의 유지 혹은 공동체 신질서 모색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중심의 현 질서를 옹호하는 관점은 보수지였던 <동아일보>에서 두드러졌고 <한겨레>신문은 신질서 모색에 가까웠다. 그러나 패권유지 담론에 비해 신질서 모색 담론은 설득력과 주장에서 방어적일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했다. 패권질서에 대한 찬반 입장은 또한 중국과 일본정부에 대한 태도, 한국정부에 대한 평가 및 파생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미동맹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패권유지’담론은 중국과 일본을 심각한 위협으로 단정하는‘패권위협’담론에 의해 논리적으로 지지되고 있었다. 반면 ‘점진적 접근’과 ‘신질서 모색’준거담론에서 동북공정과 독도분쟁은‘패권’에 대한 우려 또는 국내 정치용 사안으로 인식되었다. 국내언론은 또한 공통적으로‘진정성’과 ‘전략적 연대’담론을 제시하고 있었고 현 질서에 대한 찬반 여부에 따라 그 내용은 차이가 있었다.
2. 함의: 공동체를 위한 담론전략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평가와 행위에 있어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항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동북공정과 독도분쟁 담론에 있어 패권질서는 담론의 다른 요소들에도 개입했다.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호 또는 강화하기 위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이해관계 지형이 변하지 않는 이상 담론의 성격은 여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2013년 한국 상황에서‘신질서 모색’담론은 어떻게 가능하며 또 패권질서라는 지배적 담론에 저항할 수 있을까? 담론의 해체라는 작업을 통해 그 실마리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으로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은 파생담론에 주목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진정성을 보여주는 방안,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방안, 역사논란 및 영토분쟁에 대한 조용한 외교 등이 제안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담론분석에서는 그러나 이들 파생담론은 준거담론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준거담론은 또 패권질서의 유지 또는 변화라는 정치적 목적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만약 담론을 나무로 보는 비유가 틀리지 않다면 이러한 정치적 목적은 씨앗에 해당하고 여기서 자라는 나무는 궁극적으로 이 씨앗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파생담론이 다양한 논리와 주장을 담고 있으면서도 결론에서는 기존 질서의 옹호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담론전략은 따라서 지배적인 질서가 강제하지 않는 다른 씨앗을 뿌리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집단안보’와 같은 대안적인 준거담론을 제시하고 패권질서의 폐해, 집단안보의 장점과 실현 가능성, 유럽의 사례 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전략이다.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패권질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점을 감안할 때 신질서의 수혜자 및 담론 생산자간‘합종연횡’도 절실하다. 패권질서에 봉사하는 담론이 압도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연대는 불가피하다.
담론전략에 있어 또 고민해야 할 지점은 패권위협, 패권경계와 진정성과 같은 파생담론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 위협론이 하나의 담론으로 패권질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때 중국을 불순하게 봐야 할 이유는 무수히 많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일본과의 영토분쟁, 시리아에 대한 대외정책, 아프리카 국가를 대상으로 한 자원외교도 모두 패권주의를 증명하기 위한 파생담론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국내 언론에서는 실제 이런 관점에서 중국의 대외정책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이 군국주의 부활 또는 우경화와 관련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다. 게다가 이러한 파생담론은 자연스럽게 특정한 이미지와 여론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공동체를 위한 두 번째 담론전략은 따라서‘신질서 모색’을 지지할 수 있는 다양한 파생담론을 발굴하고 확산하는 작업이다. 긍정적 재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작업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개선되고 우호적 여론을 통해‘신질서’담론에 유리한 지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패권질서에 규정받고 있는 기존의 파생담론에 대한 대응전략도 필요하다.
진정성 담론이 살아있는 동안 한국의‘공감과 동의’를 확보하는 데 있어 중국과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일부 언론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처럼 일본 수상이 무릎을 꿇는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를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 사회의 몫이다. 진정성이 없다고 항변하는 한 이를 바꿀 방법은 없다. 유일한 해답은 국내 언론에서‘진정성’담론을 대신해‘일관성’ 또는 ‘책임감’담론을 적극 전파하는 데 있다.“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처럼 일본이나 중국 정부의 말 바꾸기를 비판하는 대신“일관성”있는 행위를 주문하는 것이 이해당사자 쌍방에 더 유리하다.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평가기준이 모호한 진정성보다는 일관성을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탈정치라는 담론을 통해‘국내정치’라는 담론을 무력화 시키는 것도 한 방편이다.
역사논란은 국가 간 경쟁이 지속되는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관점의 일치는 그 자체로 이상이다. 동북공정 담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문제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중앙정부의 의도적 개입 때문이었다. 역사논란은 학계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야 하는 것으로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탈정치’담론은 따라서 패권위협이라는 준거담론에 규정받지 않을 수 있다.
김성해 대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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