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미국 싱크탱크의 한 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사람은 국제 정세를 논하던 중 "미국이 페르시아만에서 항해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으면 중국이 대신 해줄 수 있을까"라는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필자는 이 견해를 다분히 미국 중심적인 사고라 여겼다. 그러나 미국에서 진행 중인 셰일가스 '혁명'과 이것이 지정학에 끼치는 영향을 찬찬히 음미해보니 질문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셰일가스 바람이 불어닥친 미국은 2020년에 에너지 자급 국가가 될 전망이다. 그때쯤이면 미국은 이제 더 이상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할 필요가 없게 된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지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중국의 원유 수입량(원유와 정제품 포함)이 미국을 앞지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지난해 12월 중국의 순 원유 수입량은 하루에 612만 배럴, 미국은 598만 배럴을 각각 기록했다. 일부 계절적인 요인은 있지만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여 전문가들은 이르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중국이 세계 최대의 원유 수입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해마다 최저 8%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원유가 많이 필요하고 아프리카와 미얀마 등 세계 각지에서 자원 사냥을 해왔다. 반면에 미국은 셰일가스 개발이 지속되면서 점차 원유 수입을 줄여 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미국 연구원이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끄집어 냈다.
미국은 주로 중동에서 원유를 수입해 왔기에 지난 수십년간 페르시아만 인근에 대형 항공모함을 띄워 이 지역 항해의 자유를 보장해 왔다. 이 정책은 우리처럼 원유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들엔 하나의 공공재였다. 우리는 항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셰일가스 혁명이 이런 지정학적인 구도를 천천히 바꿔 놓을 듯하다. 중동에서 원유를 전혀 수입하지 않는데 미국이 언제까지 중동 지역에 정책 우선순위를 두고 이곳에서 항해의 자유를 보장할까.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급부상해 온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2011년 '아시아로의 귀환'을 선언하고 군사적.경제적.외교적 귀환을 실행해 왔다. 이런 귀환이 가능해진 것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결과 함께 셰일가스 요인이 있다. 미국 내에서도 원유 한 방울 수입하지 않는 중동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가 점차 거세질 것이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남중국해를 국익의 한 지역이라고 규정해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해상 운송량의 3분의 1이 이 바다를 지나고 있고 이 지역엔 우리와 일본 등 미국의 아시아 우방국들이 포진해 있다.
우리는 이런 거대한 지정학적인 변화에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나?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에너지나 자원외교의 중요성이 거론돼 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아프리카 등 주요 자원 보유국들과 얼마나 전략적 관계를 강화해 왔고 진행 중인 지정학적인 틀의 변화에 대처하고 있나?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파이낸셜뉴스 20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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