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커뮤니케이션학 연구자들>
정치학자도, 경제학자도, 사회학자도, 심리학자와 교육학자도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적 선구자들 역시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전공자였다. 커뮤니케이션은 십자로의 학문 또는 기생하는 학문으로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는 이유다. 그러나 국가경쟁력과 경제발전 및 자아실현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교육과 관련한 이해당사자가 늘어나고, 교육과 관련한 각종 기관과 조직이 팽창하면서 교육학이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매체의 성장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학도 독립 학문으로 성장했다. 대중매체가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이와 관련한 현상, 이슈와 쟁점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사회적 필요성이 증가했다. 2008년 광우병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 장애인에 대한 성폭행 문제를 고발한 도가니, 2012년의 중동의 민주화 혁명 등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등장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는 많은 현안에서 매스미디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매스미디어는 때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정적 여론을 만들기도 하고, 사소했던 문제를 국제사회 전체의 공동 관심사로 부각시키기도 하고,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일본을 싫어할까? 단순히 우리가 일본 식민지를 겪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일본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부정적이기 때문일까? 또 우리가 아랍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나 지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가 아는 언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은 동일한 잣대로 비교되고 있을까? 왜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스캔들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매스미디어는 무슨 역할을 할까? 내친김에 몇 가지만 더 질문해보자. 만약 조선일보가 특정 집안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일 경우에도 지금과 같은 보도가 나올까? 만약 중국이나 러시아가 미국의 CNN이나 영국의 BBC와 같은 글로벌 미디어를 가지고 있다면 국제사회의 중요한 사건이나 현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금과 동일할까? 왜 신문과 방송에서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 대한 얘기는 사소한 것까지 보도되면서 청년실업이나 노동자의 파업은 거의 보도되지 않을까? 우리가 날마다 보는 매스미디어에서 가난하고, 힘들고, 못 배운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잘나고 힘 있는 사람들의 얘기만 등장하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 정치학도 경제학도 사회학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여론조작이나 사회통제의 우려로 인해 비판커뮤니케이션이 발전하고, 국제사회의 정보 불평등을 다루는 문화제국주의 연구가 등장한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학이 반드시 이렇게 무거운 주제만 다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새로운 삶의 청사진을 주는 연구는‘비판적’접근에 속한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 공정, 정의, 평화, 존중, 인권, 자유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더 행복할 권리가 있고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주어진 현실을‘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세상을 탓하기 보다는 네게 주어진 일에 더 충실해라”또는“비판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주어진 자원을 더 잘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있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비판적 관점과 달리 이러한 시각을‘기능적’관점 또는‘도구적’관점이라고 부른다. 다시 매스미디어로 돌아가 보자.
1980년 미국의 방송국 PBS는 우주와 생명을 주제로 한 13부작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방영했다. 천체물리학자인 칼 세이건, 앤 드루얀, 스티븐 소터 등이 방송작가들과 같이 시나리오를 담당했다. 우주와 천문의 역사, 원시문명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철학 등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국인의 과학 지식은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관점은 크게 변했다. 칼 세이건이 매회 진행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 텔레비전 방송의 금메달에 해당하는 에미상(Emmy Award)와 피다비상(Peabody Award)을 휩쓸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스미디어를 국민 계몽이라는‘기능’을 위해 성공적으로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또한 한국교육방송(EBS)의 수능강의, 한국방송통신대학의 화상강의, 그리고 미국 비영리재단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의 인터넷 강의 등도 모두 매스미디어를 성공적으로 교육에 접목시킨 경우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성해야 시청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집중할 지, 방송을 위한 강의교재를 어떻게 개발할지, 어떤 주제를 어떻게 전달할 때 교육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그래서 기능적 접근)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도구적이라는 말은 양날의 칼이다. 정부나 대기업은 다양한 목적에서 매스미디어를‘도구’로 활용하고자 한다. 전쟁이나 경제위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전쟁에서 패배하면 국민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국민이 하나로 단결해야 하고, 물자의 부족이나 군대 지원을 위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또 군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전․선동(Propaganda) 연구가 등장했고 그 목표는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아군의 애국심을 높이는데 있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부족한 달러를 매우기 위해 대대적으로‘금 모으기 운동’을 실시했다. 방송국과 신문 등이 모두 동원된 이 운동을 통해 국민은 결혼반지며, 목걸이며, 메달을 자발적으로 모았고, 그 돈으로 금궤를 만들어 약 26억불 정도의 달러를 모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적 접근은 자칫 이미 권력을 갖고 있는 계층이나 집단에만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정부는 경제위기를 구실로 정당한 노동자의 요구를 묵살할 수 있고, 국가안보를 핑계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거나,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학이 비판적 접근과 기능적 접근으로 나누어져 서로 경쟁하면서 공존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커뮤니케이션학이라는 숲은 방대하다. 그러나 이 숲을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면 비슷한 분야끼리 일종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정도 비교적 풍부하고 연구자들도 많은 곳을 분류하면 커뮤니케이션연구, 미디어연구 및 저널리즘연구를 포함해, 전문커뮤니케이션, 전략커뮤니케이션, 비판커뮤니케이션과 국제커뮤니케이션 등 7개의 군락이 있다. 지금부터 이 군락의 핵심 기관과 인물을 차례로 방문해보자.
첫 방문지로 커뮤니케이션연구 군락에 들러보자. 커뮤니케이션연구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이론, 철학, 역사, 정책과 법률을 다룬다. 의제설정이론, 프레임이론, 다원적 무지, 침묵의 나선이론, 이용과 충족이론 등이 얼마나 타당한지,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지, 이들 이론의 약점은 무엇인지 등을 연구한다. 커뮤니케이션 역사는 경제사, 과학사, 정치사와 마찬가지로 미디어 기술의 역사적 발전, 일본 식민지 시대의 매스미디어 및 텔레커뮤니케이션법안의 통과와 같은 중요한 사건과 그 배경을 다룬다. 이 군락에는 커뮤니케이션이론, 커뮤니케이션 사상․철학, 커뮤니케이션 정책․제도․법률 등이 있다.
“사람이 희망이다”는 말이 있다. 저널리즘학과에서 출발했던 커뮤니케이션이 오늘날 이처럼 방대한 숲으로 성장한 배경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윌버 쉬람(Wilbur Schramm)은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마리에타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하버드대에서 미국문화 전공으로 석사를, 아이오와주립대에서 영문학으로 박사를 취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지금의 미국중앙정보국(CIA) 전신인‘전쟁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에서 프로파간다 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교인 아이오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43년 이 대학에 세계 최초로 매스커뮤니케이션 박사과정을 개설했다. 그 이후 일리노이주립대에 있는 동안 커뮤니케이션연구소(Institute for Communication Research)를 설립했고, 스탠포드대(Standford)로 옮긴 1964년에는『매스미디어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책을 썼다.
쉬람은 또 커뮤니케이션의 4대 이론가를 꼽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해롤드 라스웰(Harold Laswell), 폴 라자스펠드(Paul F.Lazasfeld), 칼 호블랜드(Karl Hovland) 및 커트 레윈(Curt Lewin) 등이 포함되어 있다. 라스웰은 잘 알려진 SMCRE 모델을 제시한 학자다. 이 모델에서 S는 송신자(Source), M은 메시지(Message), C는 통신수단(Channel), R은 수신자(Receiver), 그리고 E는 효과(Effect)를 나타낸다. 라자스펠드와 호블랜드 등은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의견이나 여론은 TV나 신문을 통해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견지도층(opinion leader)이라는 일종의 징검다리를 통한다는 것을 밝혀낸 인물이다.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인 레윈은 언론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뉴스는 여러 단계의‘관문'(Gate)을 거친다는 점을 밝혔으며, 편집자의 판단, 기자의 성향, 직장 문화 등이 그 관문들에 해당한다. 유럽의 대표적인 커뮤니케이션 연구기관으로는 암스테르담 커뮤니케이션학교(Amsterdam School of Communication Research, ASCoR)가 있다.
유럽을 포함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케이션 연구기관인 이 학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University of Amsterdam) 내에 있다. 50명 이상의 상근 연구자들이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영어 박사과정 학생만 35명이 있다. 연구 영역은 설득커뮤니케이션, 정치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 청소년 및 미디어오락, 일반 미디어연구 등이 있다. 미국의 유수 커뮤니케이션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 대학이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데니스 맥퀘일(Denis McQuail)이라는 학자 덕분이다. 이 학교는 2006년부터 커뮤니케이션이론을 발전시킨 최고의 학자를 선정해‘멕퀘일상’을 수상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상이 있을 만큼 잘 알려진 맥퀘일은 도대체 누구일까? 흥미롭지만 맥퀘일 자신이 제시한 유명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없다. 그 대신 그는 일찍부터 커뮤니케이션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위험을 알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1980년대 그는 스웬 윈달(Swen Windahl)과 공동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연구를 위한 커뮤니케이션모델』(Communication models for the study of mass communication)을, 1992년에는『미디어 수행성』(Media Performance)을 발간했다. 특히『맥퀘일의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McQuail's Mass Communication Theory)은 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였으며 국내에서도 여러 학자들이 번역했다.
서울 영등포구, 인천 남동구, 경기도 안산시, 경남 김해시, 부산 사하구, 경북 경산시, 충북 청주시. 국내에서 다문화가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곳이다. 미디어연구 군락도 이처럼 전공이 다양한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미디어연구는 한 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역할을 비롯해 미디어의 도입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다룬다. 우리의 사고방식, 태도, 감정에 있어 미디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효과를 초래하는지, 미디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은 무엇인지, 미디어의 진화에 따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 지 등에 대한 연구도 여기에 속한다. 미디어철학, 미디어심리학, 미디어사회학, 미디어생태학, 미디어리터러시, 미디어효과 연구 등 분야도 많다. 그 중에서 미디어철학은 캐나다 출신의 해럴드 이니스(Harold Innis)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경제사학자였던 이니스는 문화와 문명의 변화에 있어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일찍부터 연구한 학자였다. 미국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곳에 있는 동안 사회학자이면서 커뮤니케이션연구자로 유명한 조지 메드(George Mead)와 로버트 박(Robert Park)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제국과 커뮤니케이션』(Empire and Communications) 및 『커뮤니케이션의 편향』(Bias of Communication)등의 책을 발표했으며, 이 책을 통해 시간편향적인 미디어와 공간편향적인 미디어라는 철학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돌과 진흙과 같은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매체를 사용하는 문명은 상대적으로 완고하고 보수적인 반면, 이동하기는 쉽지만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 종이를 주로 사용하는 문명은 변화에 민감하다. 그는 또 시간편향적인 문명은 영원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교적이고 공간편향적인 문명은 광활함을 선호하기 때문에 제국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맥루한은 이러한 이니스의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1년『구텐베르그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와 1964년『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 등의 작업을 통해 그는 “매체는 곧 메시지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미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WWW(World Wide Web)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매체가 다르면 메시지도 달라지고 수용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또한 미디어는 뜨거운 것(hot)과 차가운 것(cold)으로 나눌 수 있으며 책이나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로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반대로 TV나 전화와 같은 차가운 미디어는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기 때문에 이용자가 보충할 것이 많다고 했다. 미디어 분야에서 그는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학자 중 한명으로 토론토대학에는‘문화와 기술, 맥루한 센터’(McLuhan's Centre for Culture and Technology)가 세워지기도 했다. 맥루한의 철학은 그 이후 미디어생태학(media Ecology)의 이론적 토대로 작용했다.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에 따르면 미디어생태학은 다양한 미디어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며, 수용자들은 이를 어떻게 활용하고, 그 결과 사회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쉽게 말해, 우리의 건강이나 의식이 주변 자연환경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일상적으로 먹는 것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생태학 연구를 미디어로 확장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 군락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연구 분야로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미디어리터러시(Media Literacy)다.
팔리 미디어 센터(Paley Center for Media). 미국의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가 창의성, 문화적 소양 및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논의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다. 청소년미디어교육센터(Centre for the Study of Children, Youth and Media)도 있다. 영국 런던대학 교육학과에 있는 이 기관의 책임자는 현재 데이비드 버킹햄(David Buckingham) 교수다. 이 기관의 목적 역시 학생들의 미디어 이용시간이 그 어느 때 보다 늘어난 상황에서 미디어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은지, 미디어 기술을 창의력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인터넷을 통한 시민 참여를 높이는 방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연구하고 논의하는데 있다. 미디어 교양교육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분야는 처음 영국, 호주와 남아프리카, 캐나다 등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 네덜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스위스, 인도와 러시아 등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의 경우 애팔래치아주립대(Appalachian State University), 컬롬비아대(Columbia Univesrity), 뉴욕대(New York University), 텍사스주립대(University of Texas-Ausitin)과 템플대(Temple University) 등이 주도하고 있다. 그 밖에, 미디어와 사회변혁을 위한 찰스부르그 아카데미(Salzburg Academy for Media and Global Change) 역시 미디어 교육과 관련한 국제회의를 주재하고, 관련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기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나 관록, 연구진의 능력 등을 감안할 때 가장 강력한 군락 중의 하나는 다음에 들릴 저널리즘연구다.
저널리즘학은 종이신문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했다. 17세기 신문이 등장했을 당시 유럽은 혁명의 불꽃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뉴미디어였던 신문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핵심 기구로 자리를 잡았고, 왕과 귀족에 대한 비판은 물론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민감한 정보를 신문을 통해 얻고자 했다. 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된 초기 저널리즘학은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시스템이 제대로 유지되는데 있어 신문은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 바람직한 언론의 모습은 무엇인지와 같은‘규범적’연구의 전통을 수립했다. 그 이후 전문직 언론인을 양성하기 위한 직업교육 연구 전통이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908년 미국 미조리대학에서는 최초의 저널리즘대학이 문을 열었고, 1916년에는 독일의 라이프찌히대학에서 신문연구소가 출범했다. 저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학자, 정치학자와 경제학자 등이 참여하는 통섭분야로 영역이 확대되었고 언론윤리, 언론법, 언론철학, 언론정책, 언론산업 연구 등을 포괄하는 방대한 영역으로 성장했다.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와 윌라드 블레이어(Willard Bleyer). 저널리즘학의 양대 전통의 하나인 규범적 연구와 직업교육의 선구자다. 먼저 하버마스는 독일의 본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1년 하이델부르크 대학의 철학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국내에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학자다. 1970년 박정희 정권이 김지하 시인을 구속했을 때 그의 구명 운동을 했고, 독일의 대학교수로 있는 송두율의 지도교수다. 그는 특히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1962년 박사논문으로 제출했던“공론장의 구조변동”(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과 그 이후의 연구에서 이런 신념은 잘 반영되어 있다. 인간의 해방은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로‘공론장’(public sphere)의 복원을 주장했다. 언론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전통이나 권력이나 신분의 제약 없이 합리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광장을 제공해야 하며, 언론은 이 과정에서 특정 집단이 광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실과 거짓을 분별해 주며,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저널리즘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언론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언론인은 누구이며 이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직업교육 전통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다.
“한 사회의 번영과 민주적 정부의 성공에 있어 저널리즘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은 없다”미국 위스콘신대학(University of Wisconsin) 저널리즘대학을 설립했던 윌라드 블레이어(Willard Bleyer)의 말이다. 영문학 박사였던 블레어는 당시 위스콘신대의 총장이었던 찰스 반 히스(Charles Van Hise)를 설득해 1905년 영문학과에 처음으로 저널리즘 과목을 개설했다. 저널리즘 학과는 1912년에 첫 발을 내디뎠고 마침내 1927년 학교로 독립한다. 미국 최초의 미조리저널리즘대학(Missouri School of Journalism)은 1908년, 프랑스의 저널리즘학교(Ecole Superieure de Journalisme)는 그보다 좀 이른 1899년에 각각 문을 열었다. 직업교육과 관련한 연구는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 예로, 컬롬비아대의 사회학 교수였던 허버트 갠스(Herbert Gans)는 1979년 미국 주요 언론사의 편집국을 관찰한 다음『뉴스 선정하기』(Deciding What's News)란 책을 발표했다. 1986년 로버트 리치터(Robert Lichter) 등이 발표한 『미디어 엘리트』(The Media Elite) 역시 주요 언론사에 종사하는 간부급 언론인들의 이념성향과 출신 등을 연구한 책이다. 미국의 이러한 전통은 최근 저널리즘 전문 싱크탱크로 이어지고 있다.
탁월한 저널리즘을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 미국의 비영리연구소인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에 속해 있는 대표적인 저널리즘연구 조직이다. 이 조직의 책임자는 톰 로젠스틸(Tom Rosenstiel)이다. 그는 LA타임스와 뉴스위크에서 미디어 비평가와 특파원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미국 전역의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2003년『저널리즘의 기본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을 펴내기도 했다. 그 밖에, 2004년 미조리대학에 설립된 레이놀드 저널리즘 연구소(Raynold Journalism Institute), 1938년 설립된 니먼 재단(Nieman Foundation), 나이트 재단(Knight Foundation)도 이 분야를 선도하는 기관이다. 프랑스의 경우 1980년 라 몽타뉴(La Montagne) 신문 대표들이 창설한 바렌느 재단(Foundation Varenne)에서, 또 일본에서는 1994년 출범한 미디어종합연구소 등에서 관련 연구를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저널리즘학이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논의된 데는 컬롬비아대의 마이클 섯슨(Michael Schudson) 공이 컸다.
미국 윈스콘신의 밀워키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사립대 스와트모어(Swarthmore College)를 거쳐 하버드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78년“뉴스의 재발견”(Discovering the News)란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으며, 언론의 객관주의 전통은 전신의 발달과 상업적 동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학, 사회학 및 문화연구를 접목했던 그의 작업은 1995년『뉴스의 힘』(The Power of News), 1998년『선량한 시민』(The Good Citizen), 2003년『뉴스의 사회학』(The Sociology of News), 2008년『왜 민주주의는 까칠한 언론을 필요로 하나』(Why Democracies Need an Unlovable Press) 등으로 나타났다. 단일한 군락에 묶이기는 하지만 생활양식, 가치관, 구성원이 너무도 제각각인 곳이 전문커뮤니케이션 분야다.
정치커뮤니케이션, 과학커뮤니케이션, 조직커뮤니케이션, 휴먼커뮤니케이션, 건강커뮤니케이션, 스피치커뮤니케이션. 상대적으로 먼저 형성된 패밀리다. 의학, 종교, 경제, 사이버, 뉴미디어, 디지털커뮤니케이션 등은 현재 가족관계를 맺고 있는 중이다. 커뮤니케이션학의 역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군락이기도 하다. 그 중 정치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예를 들어 정치인의 화법, 정치인의 이미지 관리, 선거캠페인 전략 등을 통해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과학커뮤니케이션은 또 과학적 지식, 사고방식 및 과학기술 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과학자와 일반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는 전략을 연구한다. 그 밖에, 건강커뮤니케이션은 병과 치료에 관한 정보를 보다 효과적으로 환자에게 전달하고, 의사와 환자 간 신뢰를 형성하는 방안을 찾는다. 정치커뮤니케이션의 대표주자 몇 명을 좀 더 만나보자.
랜스 베넷(Lance Bennett), 피파 노리스(Pippa Norris), 샨토 아엔거(Shanto Iyengar), 로버트 앤트만(Robert Entman). 정치커뮤니케이션 관련한 책에 늘 등장하는 학자들이다. 베넷은 미국 워싱턴주립대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민참여와 커뮤니케이션 센터”(Center for Communication and Civic Engagement) 소장이다. 1974년 명문 예일대(Yale University)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스: 현혹의 정치』(News: The Polticis of Illusion), 『폭풍작전: 미디어, 여론과 미국의 걸프정책』(Taken by Storm: The media, public opinon, U.S. Foreign policy in the Gulf war) 및『중재된 정치』(Mediated Politics)등의 책을 발표했고, 정치와 미디어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그는 인덱싱가설(Indexing thesis)을 제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언론의 비판 강도는 백악관, 의회 및 다른 권력엘리트간의 합의가 강할 때는 약하고, 합의가 약할 때는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권력의 움직임을 일종의 지표로 삼아 언론이 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권력말기 현상이 나타나고 차기 총선에서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당의 결속이 느슨해지는 것과 언론의 비판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이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피파 노리스는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스쿨의 비교정치학자다. 영국 워릭대(Warwick University)에서 정치학과 철학으로 학사를,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그녀는 주로 여론과 선거, 민주주의와 문화, 세계 각국의 정치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으며, UN을 비롯해 유네스코, 세계은행, 민주주의를 위한 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등의 자문가로도 널리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다수 편집했다.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2009년의『공공의 감시자: 뉴스미디어와 통치의 주제』(Public Sentinel: News Media and the Governance Agenda), 1998년의 『뉴스를 통한 정치와 정치뉴스』(The Politics of News; The News of Politics), 1997년의 『여성, 미디어 그리고 정치』(Women, Media and Politics) 등이 있다.
정치학 교수, 스탠포드대(Stanford University) 커뮤니케이션 학장, 정치커뮤니케이션실험실소장. 샨토 아엔거가 현재 갖고 있는 직책들이다. 미국의 전국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전국보건기구(National Institute of Health), 포드재단(Ford Foundation), 퓨자선재단(Pew Charitable Trusts) 등이 단골로 지원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1991년 발간된 책『누구의 책임인가』(Is Anyone Responsible)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국내에서 프레임 연구에 자주 등장하는‘일화’(episodic) 및 ‘주제’(thematic) 프레임을 제안한 학자다. 프레임은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생각의 얼개다. 그가 제시했던 10대 미혼모 사례를 통해 프레임이 뭔지 살펴보자. 언론은 이들 10대 미혼모들이 현재 처한 불행이 왜 왔는지를 설명하면서 각자의 현명하지 못한 사연(에피소드)을 강조할 수도 있고 이들이 주로 빈곤층 출신으로 정상적이지 못한 가족에서 자랐다는‘줄거리’(테마) 중심으로 보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줄거리로 본 사람은 미혼모의 처지를 좀 더 동정하고 이들에 대한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반면, 사연 중심으로 본 사람은 개인의 잘못을 더 많이 지적하게 된다.
로버트 엔트만은 조지워싱턴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의 국제관계, 공공정책 및 미디어 석좌교수다. 정치학의 명문 예일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이란과 한국의 민항기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각각 격추되었을 때 미국 언론이‘기술적 실수’와‘의도적 타살’이라는 정반대되는 프레임을 채택해 정반대의 여론을 형성했다는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정치와 미디어의 관계를 주로 연구한 그의 작업은 2004년의『권력의 투사: 뉴스 프레임, 여론과 미국 대외정책』(Projections of Power: Framing news, Public opinion and US foreign Policy), 2001년의 중재된 정치』(Mediated Politics), 『시민 없는 민주주의』(Democracy without Citizens) 등의 책으로 나와 있다. 전략커뮤니케이션 군락 역시 외지인이 많다. 정부, 기업, 이익집단, 정당 등이 주요 고객이기 때문에 재정도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전략커뮤니케이션은 특정한 대상을 겨냥해 주어진 목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목표와 대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으로는 광고, 홍보 및 위기커뮤니케이션 연구가 있다. 먼저 광고연구는 시청자, 독자 또는 청취자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를 하거나 지속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반적인 제품이나 서비스 광고를 비롯해 이미지광고, 정치광고 등으로 종류도 다양하다. 기업, 정부, 시민단체, 정치인 등 누구라도 광고주가 될 수 있고 신문, 방송, 라디오, 인터넷, 옥외간판, 버스 등 모든 종류의 미디어를 광고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광고의 이론적 기초를 처음 제안한 이는 미국 미시간주립대(Michigan State University)의 마케팅 교수였던 에드문드 맥카시(Edmund McCarthy)다. 그는‘복합영업’(Marketing Mix) 개념을 통해 광고의 4대 요소인 생산물(Product), 가격(Pricing), 장소(Place), 판촉(Promotion)을 제시했다. 광고연구의 역사는 비교적 짧으며 학계가 아닌 산업계가 중심이다. 미국의 경우 광고학으로 박사를 처음 개설한 곳은 텍사스주립대(University of Texas-Austin)이었고, 광고학과가 독립된 것은 1974년이었다. 광고학 연구를 다루는 주요 학술 저널로는“광고저널”(Journal of Advertising)과“광고학연구저널”(Journal of Advertising Research) 등이 있다. 광고업계 주도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대표적인 연구자를 지목하기는 어렵다.
홍보(Public Relations)는 특정 조직과 공략대상 간의 정보흐름을 관리하는 기술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회사의 이해관계자에 해당하는 소비자, 주주, 투자자 및 종업원이 회사의 임원, 의사결정 및 상품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그것을 유지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홍보는 1900년대 초반 아이비 리(Ivy Lee)와 에드워드 버네이(Edward Bernays)에 의해 틀이 세워졌다고 알려진다. 리는 1877년 미국 조지아주의 시더타운에서 태어나 프린스턴대를 졸업했다. 한때 뉴욕타임스의 기자로도 일했던 그는 1905년 'Parker & Lee'라는 이름의 홍보회사를 차렸다. 미국에서 세 번째였다.‘홍보의 아버지’로 불리는 또 다른 인물로 버네이가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 대중정보위(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에 근무했고“미국의 전쟁은 유럽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확산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23년 뉴욕대(New York University)에서 최초의 홍보 강의를 개설했으며,『여론 담금질』(Crystalizing Public Opinion)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대중은 변덕이 심하고 여론 조작에 쉽게 휘말린다고 생각했던 그의 주장은 미국 정부의 프로파간다에도 큰 기여를 했다. 프로파간다와 관련한 그의 저서로는『프로파간다에 대한 여론의 판정』(Verdict of public opinion on propaganda),『비즈니스로서의 프로파간다』(This business of Propaganda),『동의의 공학』(Engineering of Consent) 등이 있다. 그 밖에,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홍보 전문가로는 제임스 그루닉(James Grunig)이 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매릴랜드대(University of Maryland)의 석좌교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손에 잡히는 홍보』(The handbook of public relatios)가 있다.
크게 보면 홍보에 속하지만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분야로 위기커뮤니케이션도 있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학자, 연예인, 경제인, 언론인 등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명예는 결정적인 자산이다. 대중의 신뢰를 먹고 사는 이들이 명예를 잃는 것은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사회적 손실로 이어진다. 기업, 단체, 국가도 마찬가지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위해 지출하는 광고나 홍보 비용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명성(reputation)에 대한 위기를 관리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권력은 항상 총구와 돈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만들 수 있고 심지어 힘없는 사람의 욕망도 조절한다. 부유한 사장님은 다이어트를 위해 음식을 줄이지만 가난한 노동자는 돈이 없어 굶주리는 이치다. 그래서 권력관계는 항상 지배와 피지배라는 문제를 다룬다. 설득하는 사람이 있고 설득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의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힘 있는 소수와 힘없는 다수가 불평등한 게임을 하고 있으며, 힘없는 다수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는다. 다음에 방문할 비판커뮤니케이션과 국제커뮤니케이션이 주로 여기에 해당한다. 겉보기는 아주 초라하지만 정신세계는 화려한 곳이 비판커뮤니케이션이다.
지식인은 사람이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체면을 지킬 일이 있고, 최소한의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는 족속은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재주가 별로 없다. 『자본론』『공산주의선언』등으로 유명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지식인을 쁘띠 부르조아라고 말하면서 궁극적으로 자본가와 권력자들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했던 이유다. 그래서 이 군락에 모여 있는 학자들은 주로 비주류다. 그럼 왜 이들은 굳이 비판적인 접근을 하는 것일까? 정부나 기업이나 힘 있는 이익집단이 원하는 도구적 접근을 하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더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번에 방문할 학자들이 여기에 대해 뭐라고 답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타고난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군락의 대표적인 진영으로는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가 있다.
정치경제학은 '계급의 갈등'에 주목한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한다. 생산수단에는 방송, 신문, 인터넷, 출판사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들 매스미디어는 경제의 주요 부분이면서 동시에 경제관계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상징의 생산자들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주장이다.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이 있어야 움직인다. 잉여노동은 많은 부분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나오고 이들은 최소한의 임금을 받아야 또 일을 한다. 돈이 많아지면 일을 하려고 하는 노동자는 없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일을 즐겁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도록 하고, 일을 통해 자아성취를 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거나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들이 스스로 배우게 하고, 자기절제를 하도록 하고, 건전한 생활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가장 친근한 벗은 TV다. 영국 웨스터민스터대학(University of Westminster) 미디어연구 석좌교수인 니콜라스 간함(Nicholas Garnham)의 주장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8년을 근무했고 그 이후에는 대학에서 필름이론과 실습을 가르쳤다. 그는 교조적인 공산주의 이론에서 무시되었던 매스미디어와 문화 그 자체가 경제적 관계라는 토대위에 떠 있는 허위의식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작동하도록 하는 실질적인 힘이라고 주장했다. 1972년의 『TV의 구조』(Structures of Television), 1988년『텔레비전의 경제학』(The Economics of Television), 1990년의『자본주의와 커뮤니케이션』(Capitalism and Communication) 등에서 보듯 TV에 대한 연구가 많다. 문화연구는 영국식 전통과 미국식 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영국전통의 대표적인 인물이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다.
홀은 영국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킹스톤에서 태어났다. 리차드 호가트(Richard Hoggart),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와 더불어 영국문화연구의 본산인 버밍햄문화연구소(The Birmingham School of Cultural Studies)를 설립했다. 피부색도 다르고 식민지 출신이었던 그가 영국 주류사회를 대표하는 매스미디어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왜 이민자들은 항상 범죄자로만 등장할까? 식민지 출신은 왜 영국 사회에서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지 못할까? 일반 국민들은 왜 모든 이민자들을 잠정적인 범죄자로 보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로 왜 이민자들 스스로 자신을 폭력적이고 무식하고 감정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자메이카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홀은 운명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안고 살았다. 당시 영국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처럼 홀 역시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에 실망했다.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그는 이피 톰슨(E.P. 톰슨), 레이몬드 윌리암스 등과 함께 『신좌파비평』(New Left Review)라는 잡지를 발간해 비판에 앞장서기도 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아니면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 헤게모니(Hegemony)와 문화에서 그는 답을 찾았다.
인간을 설득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뭘까? 총칼로 위협하거나 돈으로 회유할 수 있다. 그러나 나귀를 물로 끌고 갈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잠깐 동안 겁을 줘서 명령대로 움직이게 할 수는 있지만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이상 단순한 노예에 불과하다. 원시 경제라면 노예노동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복잡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인간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똑똑해졌고, 군집생활을 함에 따라 정치의식도 커졌다. 무식하고 게으른 것으로 알았던 대중이 왕을 단두대에 매달았고 민주주의를 이끌어냈다. 폭발력을 가진 이들 새로운 대중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그 답을 ‘동의를 통한 지배’즉 헤게모니(Hegemony)에서 찾았다. 피지배 계급을 지적(知的)으로 도덕적으로 압도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복종이 가능하다는 발견이었다. 그 자신 이탈리아 남부 시실리아의 가난한 노동자였던 그람시는 자본가 계급이 장시간에 걸쳐 구축해 놓은 생활습관, 가치관, 상식, 지식이라는 진지(요새)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지 않고는 혁명이 어렵다고 봤다.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법률, 윤리, 문화, 종교, 지식의 재발견이었다. 홀을 비롯해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이 이러한 상징물의 주요 생산자이면서 유통자인 매스미디어에 주목한 것은 당연했다. 1978년 공동으로 발간한 책『위기관리』(Policing the crisis)는 매스미디어를 통한 헤게모니를 분석한 대표적 작업이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백인 여성에 대한 강도사건이 미디어를 통해 재구성되고, 흑인과 이민자들에 대한 선입관이 이를 통해 어떻게 강화되며,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이민법으로 이어지는가를 분석했다.
홀은 문화연구자였다. 정치경제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중이 매스미디어에 일방적으로 휘둘린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코딩(Encoding)과 디코딩(Decod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국가와 자본가가 장악한 매스미디어에 심어진 가치관, 이념, 이미지가 곧바로 대중을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은 각자의 지식과 환경 및 경험을 통해 다르게 읽어 낸다는 주장이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최소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대중을 위한 문화, 하위그룹의 문화 혹은 해방을 위한 문화, 문화 게릴라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미국식 전통에서 문화연구는 영국과는 다른 질문에서 출발했다.
TV를 많이 볼수록 노동자는 반드시 더 불행해질까? 문화라는 것이 단순히 지배계급의 도구에 불과할까? 노동자는 이 지독한 착취관계를 어떻게 견뎌왔고 이 과정에서 대중문화의 긍정적인 역할은 없었을까? 대중은 TV나 영화에 나오는 대로만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정체성을 만드는 것일까? 문화의 즐거움, 능동적 수용자, 문화 간의 경쟁과 같은 개념은 미국식 전통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로렌스 그로스버그(Lawrence Grossberg)는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연구를 했고, 국내에도 많은 제자를 둔 학자다.
그로스버그. 미국 뉴욕의 블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리차드 호가트와 스튜어트 홀이 가르치던 영국 버밍햄대에서 석사를 마쳤고 박사학위는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취득했다. 현재 노스캐롤리나대(University of North Carolina)의 문화연구 석좌교수로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학술저널『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공동편집장이기도 하다. 전 세계 10개국 언어로 번역된 그의 주장은“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문화는 해방의 도구다. 지금은 탈현대성(Post-modernism)의 시대다. 객관적인 진리가 아닌 복수의 진리, 확실성이 아닌 모호함, 통일이 아닌 개성, 신념이 아닌 의혹이 필요하다. 문화연구의 대상은 계급만이 아니라 인종, 젠더, 지역 등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문화연구자는 이러한 모순을 개선할 수 있는 문화 생산을 지원하는 것이다”로 정리된다. 주요 저서로는『신성모독』(It's a Sin),『탈출의 필요성』(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자기 해방의 춤』(Dancing in Spite of Myself),『집중포화 속에서』(Caught in the Crossfire) 등이 있다. 이제 마지막 순서로 국제커뮤니케이션 군락을 방문할 차례다. 국제커뮤니케이션에는 문화제국주의, 국제정보질서, 미디어외교, 발전커뮤니케이션 및 국가 간 비교연구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문화제국주의와 미디어외교에 한번 들러보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그는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하루아침에 고향 땅에서 쫓겨난 불행한 민족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프랑스어, 영어, 아랍어에 모두 능통했고, 학사는 프린스턴대, 석사와 박사는 하버드대에서 취득했다. 영문학 박사였던 그는 미국 컬롬비아대학의 비교문학 교수로 재직했고 조국 팔레스타인의 국가 건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1978년 발표한『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통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명이 되었다. 무려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70개국 이상에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미셀 푸코, 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 문화정치, 식민주의, 문화제국주의 등 많은 낯선 이름과 개념이 이 책을 통해 확산되었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팔레스타인 출신으로서 그는 항상 미국과 유럽인의 의식 속에 있는 아랍의 이미지가 왜 이렇게 왜곡되어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는 도둑, 살인자, 테러리스트, 무식, 폭력, 야만 아랍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외피의 뿌리를 고민했고, 그 원천에 있는 제국의 지배라는 동기를 찾았다.
영화, 드라마, 뉴스, 학술논문과 책을 통해 특정한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그 풍경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자연스러운 것은 상식이 되고 상식에 반대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신이상자를 위한 치료감호소가 세워지고,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정당화 되고, 보편적 가치에 대립하는 집단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해도 된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문학, 음악, 미술, 상징을 이용해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문화정치(Culture Politics)의 본질이다. 매스미디어는 이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랍을 한 번도 방문하지도 심지어 아랍인을 직접 만난 경험도 거의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잘 안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1981년 『이슬람 보도』(Covering Islam), 1993년『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 2004년『인본주의와 민주적 비판정신』(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 등이 있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의 위선을 비판했던 그가 평생을 비주류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제2차 대전이후 국제사회의 뉴스와 영화, 드라마 등은 강대국 특히 미국에서 후진국으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구조였다.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향이었다는 말이다.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해주는 국제적 통신사는 모두 미국(AP, UPI), 영국(Reuters), 프랑스(AFP) 등 선진국에 있었다. 그들이 국제사회에 전하는 소식은 대부분 후진국에서 일어난 정치혼란, 빈곤, 질병, 무질서와 관련한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이들 후진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나 여론이 형성될 수 없었다. 게다가 선진국에서 쏟아지는 문화상품으로 인해 후진국은 공통적으로 전통의 붕괴 또는 가치관의 혼란에 직면했다.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를 수입하기 위해 무역적자가 나고, 그렇게 수입된 뉴스와 영화로 인해 자국의 문화산업은 붕괴되었다.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비동맹연합 77개국은 이에 새로운 정보질서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고 그 결과는 1980년 『다수의 목소리, 하나의 세계』(Many voices One world)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보고서는 미국과 유럽의 반대로 정책으로 옮겨지지 않았고 국제사회는 지금도 과거의 정보 질서에 머물러 있다. 당시 국제사회를 상대로 자신의 입장을 내보내고 싶어 했던 많은 국가들은 여전히 강대국 언론이 전해주는 정보에 의지하고 있으며 국제적 여론 경쟁에서 그들은 항상 패자다. 국제커뮤니케이션의 또 다른 영역인 미디어외교도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미디어 외교는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는 한편, 전략적 상대국의 여론을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국제사회가 자국의 문화, 지식, 생활방식에 대해 매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긍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과거에는 프로파간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프로파간다의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직후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라디오을 통해 블라디미르 레닌의 주장을 국제사회로 전달했다. 1930년대 독일의 괴펠스 역시 대중매체를 활용한 보다 정교한 형태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구축했다. 그 이후 냉전을 거치면서 TV, 영화, 라디오, 신문 등 보다 다양한 매체들이 프로파간다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1948년 사회주의 동맹국인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시작한 이래, 1956년에는 헝가리로, 1968년에는 체코로 그 활동을 확대했다. 미국도 이들 신생국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프로파간다 활동은 1950년 한국 전쟁 직후 본격화 되었고,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진실 캠페인’(Campaign for Truth)을 명령했다. 유럽의 민주화를 지원하고 공산주의 전파를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또한 1949년 유럽해방라디오(Radio Free Europe)를, 1953년에는 자유라디오(Radio Liberty)를 뉴욕과 뮌헨에 각각 설립했다.
냉전이 공식적으로 끝나기 전이었던 1980년대 후반까지 프로파간다는 가장 뜨거운 연구 주제 중의 하나였다. 1990년대 이후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경제적인 문제가 국가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표면적으로 프로파간다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진실성(honesty)과 공정성(impartiality)을 통해 합리적 설득에 주력하는 미디어외교가 부상했다. 국제사회의 의견지도층을 겨냥하기 위해 24시간 영어채널이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미국의 CNN과 영국의 BBC와 경쟁하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France24, 러시아에서는 Russia Today, 남미연합에서는 텔레수르(Telesur)가 2005년 각각 탄생했다. 2001년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글로벌 방송으로 성장한 아랍의 알자지라(Al Jazeera)는 2006년부터 영어방송을 추가했다. 2007년에는 이란의 프레스티브(Press TV)가 개국을 했고, 중국은 2010년 또 다른 24시간 영어채널인 씨엔씨월드(CNC World)를 출범시켰다. 국제정보질서의 불평등을 고치는 방식으로 자국의 입장을 직접 내보내는 미디어외교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미디어외교와 관련한 연구는 주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국이 처한 현실 때문에 이 분야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학자들이 있다. 이란의 하미드 모라나(Hamid Mowlana)와 이스라엘의 에탄 길보아(Eytan Gilboa)다.
미국 아메리칸대학(American Univeristy)에 국제커뮤니케이션센터를 설립한 모라나는 이란계 미국출신이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정치학과 커뮤니케이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는『글로벌 정보와 세계 커뮤니케이션』(Global Information and World Communication),『전환기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Global Communication in Transition)과 『기밀문서의 승리』(Triump of the File) 등이 있다.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정보전쟁을 경고한 대표적 학자로 2008년 이란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미국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rthern California)의 공공외교센터(Center for Public Diplomacy). 조지워싱턴대의 공공정책 및 글로벌커뮤니케이션연구소(Institute for Public Policy and Global Communication). 미국에서 미디어외교를 다루는 대표적인 연구기관이다. 길보아는 이 중에서 USC의 방문교수이면서 이스라엔 바-란(Bar-llan)대학의 교수다. 미국의 중동정책과 국제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다수의 책과 논문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미디어와 국제분쟁』(Media and International Conflict), 『아랍-이스라엘 분쟁』(The Arab-Israeli Conflict), 『중동분쟁의 원인과 해결책』(Simulation of Conflict and Conflict Resoultion in the Middle Eas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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